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의 다른 말 '나의 고생 끝">의 줄거리:
살면서 고통을 겪는 것을 고생이라 합니다. 고생이 사람을 지치게 하며 몸도 마음도 병들게 합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영적인 바보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사는 고생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다른 말로 하면 '나의 고생 끝'입니다.
십자가의 다른 말 ‘나의 고생 끝’
(사도행전 26:1~23)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의 다른 말 ‘나의 고생 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의 다른 말 ‘나의 고생 끝’
유대의 분봉왕 아그립바는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만나러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그리고 베스도 총독의 부탁으로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던 사도 바울의 재판에 배석합니다. 이때에 베스도는 황제 가이사에게 보내야 할 공소장에 사도 바울의 죄목을 정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의 사정에 밝았던 아그립바 왕에게 부탁하여 사도 바울의 자기변호를 듣고 죄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건 뒤에 사도 바울이 자기변호를 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항상 붙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하나만을 이야기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는 자리까지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과 연관하여 이 십자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의 고생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고생이 끝나는 곳은 십자가 외에는 달리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제 고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고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고생이 끝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에 대해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생이란 괴로움과 어려움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인생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과정이라면 괴로움과 어려움의 파도가 끊임없이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고생을 하고는 있으나 고생이 오는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진짜 고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영적인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셔서 살게 하신 곳이 낙원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삶에서 괴로움과 어려움을 느끼며 고생을 하고 있다면 없어야 될 것이 끼어든 것입니다. 사람이 30년을 살든 5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고생이라는 단어는 인생의 사전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 고생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인생에 녹아들게 되었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망발까지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기변호를 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선 9장에서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언급하였고, 22장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을 때 천부장 루시아에 의해 격리된 후에 했던 자기변호에서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언급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을 전도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전도는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식하는 것이 사명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 앞에서도 이 경험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변호에서 이 내용이 꼭 필요한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선조들이 구약시대로부터 계속해서 기다리고 기다려온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인들에게 욕을 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기다렸던 분이 바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논조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왕과 총독에게도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것처럼 당신들을 만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언급하는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두 번 반복 되었던 다메섹 경험에 대한 언급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표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맥락 속에서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이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특별히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헬라와 로마 사람들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던 속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이 잘 알던 속담을 말씀으로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시채란 골프채, 배드민턴채, 파리채와 같은 막대기로 끝부분에 쇳조각이나 뼛조각을 박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 가시채는 소나 말이나 노새 혹은 낙타와 같은 짐승들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사용했습니다. 짐승들은 때때로 주인에게 저항하고자 뒷발질을 할 때가 있지만 하필이면 가시채에 뒷발질을 하니 자신의 발을 아프게 하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몸에 생채기를 내며 고통과 괴로움을 자처하게 됩니다. 또한 이 속담은 신에게 저항하고 대적하는 사람의 모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에게 저항하고 대적하면 스스로 어려움과 괴로움을 자처함으로써 고생할 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탄압하고자 했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신의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있는 자는 유일하게 하나님뿐이십니다. 태양 달 별 구름 바람 바이러스 참새 꽃 등도 모두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만난 뒤에 모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모세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끄시는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구름기둥을 통해 인도하실 때에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멈추었습니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서라 하면 서고 가라 하면 가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민들에게 율법을 전해준 자는 모세였지만 모세 자신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만난 뒤로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있게 하려는 삶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려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한 채 스스로 좋게 여기는 것들을 있게 하려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삶이고 고생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보면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몸이 태어나면서 세상에 있게 되었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생김새로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나라까지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있게 된 것들을 기본적으로 받는 위치에서 완전히 뒤집혀진 방향의 삶을 살아갑니다. 있게 된 것들의 토대 위에서 있게 하려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것을 거부하고 내가 스스로 좋게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는 삶을 살 때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고 모든 고생은 이로부터 나타납니다. 이처럼 사람은 있게 된 존재입니다. 몸과 생김새도 있게 되었고, 부모님도 있게 되었고, 태어난 집안의 상황도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고생이 시작됩니다.
있게 하려고 하는 경향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 선동되고 부화뇌동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엉터리이고 하나님께 발길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좋게 여기는 것을 있게 하려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 저항하게 됩니다. 그 모습은 마치 가치채를 뒷발질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이가 들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이 좋으니 돈이 많은 상황을 있게 하려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고생이고 또한 나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부잣집에 태어났더라도 고생은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돈이 좋다고 생각하니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고 더 불리려고 애를 씁니다. 물려받은 재산이 유지되는 상황을 있게 하고, 재산이 불어나는 상황을 있게 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께 저항하며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아하는 것들을 있게 하려는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것들이 없어지는 상황을 있게 하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식 키우느라 고생이 많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식을 키우는 것이 고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과의 관계에서 있게 하시는 것들만을 받아들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고생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실제로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이 고생스럽기 때문은 아닙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내가 좋다고 여기는 무엇인가를 있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있게 하시는 유일한 하나님께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으니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고생이 아니라 자식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고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 고생입니다.
또 사업하는 분들은 으레 “사업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업의 상황도 본래 어렵거나 괴로울 수는 없습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는 대로만 사업을 한다면 고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생하는 이유는 좋다고 여기는 상황을 있게 하려 하고, 싫다고 여기는 상황을 없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저항하며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업도 그 자체가 어렵거나 괴로울 수는 없습니다. 사업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저항하느라 고생하는 것입니다.
만사가 이와 같습니다. 본래 이 세상에서는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생이라는 단어는 인생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은 물론이거니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인격적인 주체성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 인격적 주체성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용도로 활용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내 삶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주체성을 잘못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있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유대종교나 기독교종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있게 하려는 삶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까지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충성, 봉사, 헌금, 헌신을 하면서 신의 마음을 달래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종교란 좋게 여겨지는 것을 있게 하려는 도구로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종교의 신들이 만들어진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심지어 참 신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유대종교조차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율법주의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하니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실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돈이 많아지는 상황을 있게 하려면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는 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여겨졌기에 생고생을 해가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고생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생이란 우리 인생의 사전에 끼어들 곳이 없습니다. 어려움이나 괴로움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며느리들이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실은 전혀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명절이 고생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싫은 일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있게 하려고 고생합니다. 있는 것들 중에 싫어하는 것들은 없애려고 고생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없는 것을 있게 하고자 할 필요도 없고, 이미 있는 것을 없애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을 안 하며 사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나의 나라를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있게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없게 하려는 한 이 세상은 고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해(苦海)라고 부르는 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마음이 복잡할수록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 세상의 나의 것과 나의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내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삼아 주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고생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승천하여 하나님 아버지만을 기쁨으로 마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명절 때 시댁에 가서 음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힘이 주어집니다. 어차피 시댁과의 인연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시댁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직장과의 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설령 직장을 그만두는 일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결정에 의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는 삶을 사는데 사장님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해고한다면 그만둘 수는 있습니다. 직장과의 관계이든, 가족과의 관계이든, 시댁과의 관계이든 모든 관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고생하며 유지해나가야 할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있게 하려고 할 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형국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있게 하려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고해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고해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생하며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울은 십자가를 통해 고해의 세상을 떠나 부활에 자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은 언급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고생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싫었던 명절도 하늘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힘으로 하게 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양떼를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랬던 모세가 당시의 세계최강국이었던 애굽 경제의 하부구조를 도맡고 있었던 250만 명의 히브리 노예들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어렵지 않았고 고생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모세는 광야에서 250만 명을 끌고 다닙니다. 광야에서도 모세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내용들만 받아서 행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일이 출애굽이었고 40년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우리 생애에 250만 명을 이끌고 출애굽하거나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출애굽 사건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일들이란 조족지혈입니다. 모세도 안 한 고생을 우리가 사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삶이 고생스럽다면 가시채를 뒷발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좋은 것은 있게 하고 싫은 것을 없애려는 것은 고생을 자처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대로만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고생은 끝납니다. 정말 고생이 끝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자에게 이 세상의 삶에는 고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만을 받아 누리는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만을 받아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는 고생이 끝입니다.
못된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고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있게 하고자 할 때 고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삶은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안 풀리는 사업을 하고 못된 동료들이 있는 직장에 다니는 것이 고생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죽지 못함으로써 내 삶에 대해 있게 하는 자의 위치에 서고자 할 때 고생스러워집니다. 진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는 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삶은 스스로 고생을 만들어서 하는 삶이며, 고생을 사서 하는 삶이며, 고생의 달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있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한 고생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있게 하려는 고생을 끝내고 있게 됨의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 삶에 대하여 있게 하려는 어리석은 자로 고생을 사서 하는 삶은 끝나게 하시고, 오직 있게 됨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