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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세상 떠나보면 세상 가진 자가 참 안됐다_태승철 (사도행전 26:24~3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23|조회수10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떠나보면 세상 가진 자가 참 안됐다>의 줄거리:

마음이 세상을 떠나보면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세상 것을 가졌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참 안됐습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가졌다고 좋아하면 할수록 불쌍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에겐 그토록 좋은 세상을 떠난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미쳤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미쳤음을 드러내지요.

 

세상 떠나보면 세상 가진 자가 참 안됐다

(사도행전 26:24~32)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30.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떠나보면 세상 가진 자가 참 안 됐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떠나보면 세상 가진 자가 참 안됐다’

우리가 길에서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을 보면 “겉은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되었는지 참 안 됐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멀쩡한 사람이 미친 것처럼 말과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화를 내며 “어디서 저런 미친 사람이 굴러왔지? 당장 내쫓아라”고 반응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변론이 끝난 상태에서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의 반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22~23절을 보면 사도 바울 변론의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을 뿐이며,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하였고 선민이라면 누구나 기다려야 하는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 바울의 자기변론을 들은 베스도 총독의 반응이 24절에 나타납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학문이라고 기록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많은 책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은 유식하고 박식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은 오히려 사도 바울이 학문을 많이 한 나머지 미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자기변론의 마지막 결론부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변론을 통해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베스도 총독은 바울을 향해 미쳤다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라는 사람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출발점으로 해서 엄청난 생각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언어의 체계는 논리적으로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바울에게서 이것을 느끼고 학문이 많은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논리적으로 뛰어난 언어와 사고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체계는 베스도 총독이 이제까지 평생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느끼는 현실적인 세상과 사도 바울의 언어체계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세상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이 뛰어난 학문적 능력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 안에 들어가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재판정에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있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느끼고 살아가는 세계야말로 진짜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의 뛰어난 학문과 언어와 사고의 능력이 진짜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스스로 갇혀버린 정신병자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뛰어난 학문적 논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는 바로 예수라는 사람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이 기초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특히 답답했던 것은 부활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사람이 살아나서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이상한 사건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언어체계를 통해서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이것이 도무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다고 받아들였고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베스도 총독의 반응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응은 일관적입니다. 25절을 보면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풀어보자면 “총독께서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오히려 제가 하는 말이야말로 참되고 온전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리와 언어체계가 참되고 온전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베스도 총독이여,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당신이 미쳤다는 반증입니다. 저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본다면 그것은 당신이 미쳤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항상 의식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세워진 언어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미친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이 미쳐있는 것은 세상입니다. 돈에 미쳐있고, 건강에 미쳐있고, 가족에게 미쳐있고, 세상적인 자랑거리에 미쳐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미쳐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항상 의식하고 그 죽음과 부활을 출발점으로 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의 말과 행동이 미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에 미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미쳐야 겨우 제정신이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쳤다는 표현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한 가지에 몰두하느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도박에 미친 사람은 도박에 몰두하는 바람에 사회나 가정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세상과 다른 점은 십자가에 미쳐서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제정신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받아들여 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무조건 미쳐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눈에는 이것이 미친 짓으로 보여야 합니다. 반대로 돈을 못 벌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미친 짓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상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미쳐야만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기뻐하는 사람, 자녀가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기뻐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미쳐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자마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미친 말과 미친 행동과 미친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을 미쳤다고 보았지만 사도 바울이 볼 때는 베스도 총독이야말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머리털 하나 빠지는 것,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 세포 하나에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은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바늘구멍 하나 없이 치밀하게 내려오고 있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미친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좋고 나쁨을 가리며 희희낙락하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빈틈없이 섭리되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돈을 벌었다고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전철에서 신사가 옷을 훌훌 벗더니 손잡이 아래서 샤워를 하려는 시늉을 하고 있다면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 기뻐하려는 것은 이와 똑같을 정도로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미쳤다고 느끼질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미치지 않은 사람의 유일한 모습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미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절에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미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의식이 십자가에 몰두할 때에 영인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항상 기뻐해야 될 마음이 땅에 있으면서 돈 벌면 기뻐하고 돈을 못 벌면 슬퍼하고 있다면 미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승진하면 기뻐하고 승진 못하면 슬퍼한다면 미친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기쁨의 이유가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기뻐하는 사람은 돈을 못 벌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왜 슬퍼하지 않느냐며 미쳤다고 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고 나서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뒤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시시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요청이 쇄도해 들어오기에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의 지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고자 기도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친 것입니다.

 

본문의 대화는 누가 미쳤느냐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스도 총독처럼 미친 사람을 향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을 향하는 베스도 총독의 마음입니다. 지금 둘 다 서로가 미쳤다고 봅니다. 베스도 총독은 사도 바울을 미쳤다고 여겼으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베스도 총독이야말로 미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적으로 베스도 총독을 미쳤다고 한 적은 없으나 스스로 미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는 것은 반어법적으로 베스도 총독이야말로 미쳤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베스도 총독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을 비롯한 재판정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들을 볼 때는 불쌍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진짜 미쳤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30절에서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왕과 총독과 고관대작들과 천부장 등이 모여 있었습니다. 설령 사도 바울이 결박되지 않았을지라도 사도 바울은 가장 초라한 입장이었습니다. 사실상 거지 나사로와 다를 바가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이들을 향해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의 처지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베스도 총독의 미쳤다는 말이 합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결박당한 것 외에는 왕이나 총독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참됨에서 우위에 있고, 의로움에서 우위에 있고, 좋음과 기쁨과 행복을 점함에 있어서 우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위에 있었기에 왕과 총독의 자리를 다 모아서 준다고 하여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도 바울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졌다는 왕보다도 자신이 더 낫다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왕과 총독은 고사하고 재벌이나 학박사 앞에서 나야말로 최고로 잘된 상태이고 최고로 좋은 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여기실 수 있겠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다를 바 없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모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처럼 되는 것이 최상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늘 의식하는 한 가지 일이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상태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좋게 여겼던 것은 세상에서 많이 얻고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여러분이 대통령 앞에서, 재벌총수 앞에서, 국회의원 앞에서, 자녀가 판검사라서 자랑스러워하는 부모 앞에서 “나처럼 되세요!”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싶으시다면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면 세상에서 어떤 것을 가진 사람보다도 훨씬 더 좋은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로 좋은 상태는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마음채움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 세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저것 좋은 것들을 가지기보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세상을 완전히 용도 폐기할 때에 세상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이 없을 만큼 최고로 잘된 상태이고 최고로 좋은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좋음과 채움을 욕구하는 마음에 대해 세상의 자격을 박탈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미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하나에 몰두할 때에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면 이제 세상 것을 가졌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미쳤다는 것이 보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면 배우자 때문에, 자녀 때문에, 건강 때문에, 재산 때문에 웃고 울고 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 떠나고 보면 대통령이 불쌍하고, 대학총장이 불쌍하고, 국회의원이 불쌍하고, 의사 판사 검사가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왕과 총독 등을 향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에 몰두함으로써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들의 삶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임을 알고 나를 미쳤다고 여길 때는 화를 내든지 멀리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그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정말로 미쳐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겨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는 세상을 빠져나간 자리입니다. 이 부활에 자리에 설 때 아직도 세상에서 좋은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미쳤다는 것이 보입니다. 또한 내가 이전에 이렇게 미친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도 이것이 로마법과 부딪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죄 없음을 소명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러한 사도 바울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1~32절을 보면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방면해도 결국 유대인들이 죽일 것을 알고 있었고 황제에 대한 상소가 있었기 때문에 감금한 채로 로마로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울을 로마로 향하게끔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미치는 것은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기에 바울 또한 로마제국에 불만을 표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세상 법은 행동에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미치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의식이 예수님께 미치게 되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을 떠나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참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돈을 벌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미치광이가 날뛰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돈을 못 벌었다고 슬퍼하는 모습이 참 어이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세상에 미쳐있는 사람들이 딱하고 불쌍히 여겨지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어떠한 행동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이 작용은 말과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세계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미칠 때 오히려 정상이 됩니다. 이 자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고관대작의 자리나 재물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리입니다. 사람이라면 제정신이 드는 것이 최고입니다. 미친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최고의 구원입니다. 돈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웃고 우는 것은 본래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죄악 때문에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 미치는 길뿐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바늘구멍만큼도 빈틈없이 내려오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좋음과 채움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자녀 때문에, 사업 때문에, 승진 때문에 웃고 울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미친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쌍히 여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진짜 미쳐야 할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없이도 제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제정신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미친 상태를 돌이키는 방법은 세상을 빠져나가는 십자가에 미치는 것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빠져나가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온갖 가치들을 다 가진 사람보다도 이것이 더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기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세상에 미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제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최고로 높은 자리이고 최고로 좋은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때 제정신이 들게 됩니다. 제정신이 들면 지금까지 얼마나 미친 모습으로 살아왔는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이 미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 됐고 불쌍한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을 스승으로 삼아 어디를 가든 누구 앞에 서든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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