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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절대 둔감, 십자가생활화의 최종단계>의 줄거리: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불을 쬐던 중에 장작더미 속에 도사리던 독사 한 마리가 튀어나와 사도바울의 손을 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맹독성의 짐승임을 잘 아는 멜리데 섬의 주민들은 경악합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사도바울은 마치 손 등에 앉은 파리 한 마리 쫓아내듯 떨구어버립니다. 이 절대 둔감.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입니다.
절대 둔감,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
(사도행전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절대 둔감,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절대 둔감,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
본문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입니다. 1~10절은 하나님께서 누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사도행전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절대 평강, 절대 기쁨 같은 표현을 사용해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절대 둔감입니다. 절대 둔감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이자 마지막 경지입니다.
사도행전 전체는 십자가 생활화의 실례(實例)를 제시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을 단지 사도들의 전도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왔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십자가로 살아가는 실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중심인물은 사도 바울로서 마지막 장에서도 바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한배를 탔던 사람들은 멜리데 섬에 표류하게 됩니다. 다행히 원주민들이 이들을 동정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추위를 느낀 바울이 장작을 불에 넣었는데 그 속에 숨어있던 독사가 튀어나와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반응을 볼 때 잘 알려진 맹독성의 독사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뱀에 물린 바울이 이내 죽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별세 즉 세상에 대한 탈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세상을 탈출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심오하고 신비함으로 가득한 십자가 생활화의 실례를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결론이 고작 독사 한 마리에 물린 것이라니 다소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독사가 손을 물었는데 사도 바울은 놀라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기겁을 하고 소란을 피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치 독사가 물고 있는 상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가만히 둡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습이 심오함과 신비함을 담고 있는 사도행전의 결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나 지나가는 일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도들의 실례를 보여준 사도행전의 결론으로써 제시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 사건에 사도행전 전체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사도행전의 결론적 메시지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절대 둔감입니다.
본문의 독사는 맹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독사가 손을 물었다는 것은 죽음이 내 손을 물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손에 뱀이 매달려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그 광경을 방관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신경하고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사람이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절대 둔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절대 둔감이야말로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이며 십자가 생활화의 실례를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이 상황은 참 특이합니다. 멜리데 섬 주민들은 독사가 사도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떠올린 것은 인과응보였습니다. 4절을 보면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시무시한 유라굴로 광풍에서 살아남아 육지에 올라왔지만 결국은 맹독을 가진 독사에 물려 죽게 된 것을 보니 살인범이 틀림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독사가 바울을 물고 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놀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멜리데 섬의 주민들만 이 상황을 보았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뱀을 보고 놀라 소리치자 바울과 함께 난파를 당했다가 살아남은 275명도 독사가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보고 기겁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은 그렇다 치고 이미 한 번 바울의 말대로 살아남게 된 일행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사람을 살아남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광풍에서 벗어나자마자 독사에 물려 죽게 된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마치 달려오는 쓰레기 수거차를 피하려고 했다가 분뇨 수거차에 치여 죽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껏 유라굴로 광풍을 피해 살아남았는데 뭍에 올라오자마자 독사에 물려 죽다니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이런 식으로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275명이 다 뱀에 물리더라도 사도 바울 한 사람은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러한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현장에서는 275명이 추위를 피하고자 했으니 삼삼오오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도 바울만 독사에 물립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대체 왜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면 뱀이 바울을 무는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독사를 준비시켰다가 바울을 물게 하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의도적으로 사도행전의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반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맞습니다. 맹독성의 독사가 갑자기 장작 속에서 튀어나와서 손을 무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경악하고 소리를 치며 뱀을 떨쳐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고 표현된 대로 바울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둔감합니다. 뱀이 물고 있는 걸 사람들이 볼 때까지 어떻게 방치하고 있는지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에 사도행전의 결론적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지난주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두 분이 강릉에 찾아오셔서 집사람과 함께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한 후에 강릉수목원에 있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겨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앉았던 분이 갑자기 기겁하며 놀라셨습니다. 당시에 날씨가 좀 쌀쌀해서 제가 차에서 담요를 꺼내와 무릎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담요 위에 사마귀 한 마리가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벌레만 봐도 놀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하물며 사도 바울은 독사에 물렸습니다. 물린 통증도 있었을 것이니 기겁을 하고 반사적으로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설령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일로 사도 바울의 영성이나 믿음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보면 마치 반사 신경이나 통증을 느끼는 기관이 죽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제시되는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가 절대 둔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참조해보겠습니다. 8절을 보면 멜리데 섬의 추장격인 보블리오라는 인물이 언급됩니다. 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열병과 이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언급된 증상을 보자면 이 열병은 장티푸스로 여겨집니다. 계속 고열이 나면서 땀이 물처럼 흐르기에 기진하고 탈진합니다. 그리고 이질의 특징은 쉬지 않는 설사로 인한 탈수현상이 나타납니다. 당시에는 장티푸스에만 걸려도 4개월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합니다. 뱀이 물고 매달려 있어도 반사 신경도 안 쓰는 절대 둔감의 사도 바울과, 열병과 이질로 체력이 탈진한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비교되면서 사도행전의 결론이 내려집니다.
절대 둔감의 사도 바울은 결국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로부터 퍼져나가게 될 복음은 모든 사람을 바울과 같은 절대 둔감의 상태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절대 둔감과 반대되는 모습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열병에 시달리며 탈진해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피곤하고 지치고 탈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피곤과 지침과 탈진의 문제는 육체가 아닌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은 비어있어서 끝없이 채움을 욕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기에 이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채워졌다고 느끼더라도 곧 다시 공허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즉, 마음이 지치고 피곤한 이유는 몸을 통해 세상에서 채울 거리를 찾으나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채울 거리를 찾을 때는 마음에서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신경이 작용합니다. 마음의 신경에서 좋다고 느껴지면 빨아들이려 하고 싫다고 느껴지면 밀어내고자 합니다. 좋음을 빨아들이려는 시도, 싫음을 거부하려는 시도가 모두 수고와 노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도해도 만족은 주어지지 않기에 이로부터 피곤과 지침과 탈진이 찾아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잊지 않았고, 이를 위해 작정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타난 결과가 본문에 나타난 절대 둔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좋음과 싫음의 신경이 죽어버렸습니다. 독사가 무는 것을 내버려 둘 정도로 세상에 대해서는 둔감해졌습니다. 독사가 물고 있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죽음의 위기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둔감해지자 이러한 상황조차 전혀 다급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 있었습니다.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마음의 신경이 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마음의 신경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상황에 따라서 좋음과 싫음을 느끼고자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것은 끌어들여 채우려 하였고, 싫은 것은 거부하여 떨치려고 하면서 노력하고 수고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인해 피곤하고 지치고 탈진했습니다. 바울 또한 이전에는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열병의 이유를 끝없이 생각했지만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자 독사가 물어도 반사적 신경으로 대응하지 않을 만큼 세상에 대해 둔감해졌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실례를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치과에서 이루어지는 치료 중에 신경치료가 있습니다. 치신경은 단단한 치아 구조에 싸여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른 신경이 아플 때는 항생제를 쓸 수 있지만 치아는 그렇지 못하기에 신경치료가 요구됩니다. 그럴 때 치과에서는 문제가 되는 치아의 신경을 끊어버립니다. 신경을 끊어버리면 그렇게 아프고 시리던 것이 싹 사라져버립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바로 이러한 신경치료와 같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뿌리내리고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마음의 신경을 끊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몸과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 대해 신경이 끊어졌기에 더는 세상에서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보블리오의 아버지처럼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24시간 채움을 욕구하는 마음의 신경이 몸을 통해 세상으로 뻗어있었기에 끊임없이 세상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신경이 닿는 부분에 대해 좋고 싫음을 느끼고 그로부터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채워질 수 없었고 탈진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사도 바울을 통해 반대의 상황을 보여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작정을 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잊지 않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물세례는 나는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자각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나는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물세례의 의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십자가를 잊지 않기 위해 작정하고 몸부림쳤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몸과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신경치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절대 둔감을 향해 나아갑니다. 옛날에는 독사에 물린 것 같이 위급한 일이 생기면 기절초풍을 하였습니다. 사마귀가 옆 사람 무릎에 앉은 것만 보아도 기겁을 하면서 놀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사마귀나 뱀에 대해서 놀라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해 그렇게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하던 사람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세상일에 대해 둔감한 마음 상태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십자가 생활화를 이어나갈 때에 사도 바울과 같은 절대 둔감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둔감해진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민해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는 절대 민감함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대 민감하기에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지속되는 동안에 세상일에 대해서는 절대 둔감해집니다. 십자가가 세상과 나의 마음 사이에 간격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신경치료가 이루어져 세상에 대해 둔감해진 마음에서는 오직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의미만이 살아있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은 너무 좋거나 너무 싫어하는 사건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둔감의 상태에서 반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어찌나 세상에 대해 둔감했는지 손에 뱀이 매달린 것조차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뱀이 물고 있는 상태를 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마음을 움직여서 모든 사람에게 그 모습을 다 보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손등에 앉은 파리를 떨쳐내듯이 뱀을 떨쳐냅니다.
이 장면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이 안 벌린다고 해서,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해서,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뱀에 물린 것처럼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마음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중에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점점 더 마음의 반사적 신경이 둔감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좋게 느껴지지 않고 돈을 못 벌어도 싫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 십자가 생활화의 효과입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반드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민감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지며 몸으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극도로 둔감해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최종 단계입니다. 이 최종 단계가 유지되는 가운데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막힘없이 소통될 것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의미 있는 일들로 채워져 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대 민감해지고, 몸으로 만나는 땅에 대해서는 절대 둔감해지는 상태를 향하여 한 걸음 더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세상에 민감해질 때에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셔서 오직 하늘에 대해 절대 민감한 상태를 갖게 하시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절대 둔감한 상태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