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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차이_태승철 (사도행전 2장 14절~18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5.05|조회수71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차이>의 줄거리:

그리스도 사역 이후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붓듯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가장 특징적인 변화가 예언과 꿈과 환상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을 그동안 성령 충만을 특별한 일로 생각하여 일상으로부터 제외했던 것과 꼭 같이 취급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언을 일상 안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차이

(사도행전 2장 14절~18절)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차이’

본문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외국어로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사람들이 조롱하며 빈정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을 변증하기 위하여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합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절반에 해당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언하기, 점보기, 예측하기의 의미를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와 성경적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하고 성령충만의 결과로써 우리 또한 예언과 환상과 꿈을 일상적인 일로 생활화할 수 있기 위하여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전에서 “예언하다”라는 말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를 종교적 영역에서는 “신이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는 말”이라는 의미에서 신탁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탁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언과 환상과 꿈은 신탁처럼 특별한 자들만 받는 일이 아닙니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일은 성령충만을 받은 자들의 일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편 사전에서 “점보다”라는 말을 찾아보면 “길흉화복을 미리 알기 위해서 점괘를 찾아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예문도 나와 있는데 이어령 씨의 글로써 “미신 타파를 부르짖는 어엿한 인텔리도 한 번은 그해의 신수를 점치기 위해서 토정비결을 펼쳐 보는 것이 상례인 듯싶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미래를 궁금해 하며 신 내림을 받았다는 무당을 찾기도 하고 온갖 방식으로 점을 치는 미신의 전문가들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측하다”라는 말을 찾아보면 “미리 헤아려 짐작하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점보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초월적인 힘을 동원하고자 한다면 예측하는 것은 과거의 흐름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미래를 짐작하고 전망하는 연속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점보기보다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여겨지는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미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대학의 경제학자들이 2019년 말에 앞으로 10년간의 경제동향을 예측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2019년 말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경제학자도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기에 아무리 과거를 잘 분석한 보고서일지라도 휴지조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계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2020년대 교회의 동향을 예측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고 모든 예측은 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박사와 전문가들의 예측은 단 하나의 변수만으로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신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꼭 이런 변수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예측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어령 씨의 책에서 본 내용인데 한국 기업들의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어렵기에 국제적으로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의 혼다, 도요다, 닛산 같은 기업들은 이름이 한 숨에 발음할 수 있는 짧고 명료함을 가지고 있어서 소비자들에게 쉽게 각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나 삼성은 영어로 발음하기에는 글자 수도 많고 발음이 늘어지는 경향 때문에 국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이름부터 고쳐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나 삼성이 예측을 넘어서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들로 성장한 것을 보자면 예측이란 이토록 불확실한 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10장 14절을 보면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매한 자일수록 말을 많이 하고 장래를 예측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예언과 환상과 꿈이 우매한 자들의 점보기나 예측하기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결코 유일회적으로 일어난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여길 때에 성령충만은 일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예언과 환상과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언급한 말세라는 말을 직역하면 “그 후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신 뒤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기준에서는 2000년이 넘게 말세가 지속되는 셈입니다. 다만 시간이 얼마가 흐르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하신 이후라는 점에서 승천으로부터 100년 후이든 1000년 후이든 마찬가지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 속의 예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이미 요엘서에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함이 일상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예언과 환상과 꿈을 꾸는 것도 일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꼭 자녀들만 예언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이들만 환상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늙은이들만 꿈을 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100살이 다 되어가던 시기에 환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이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성령충만을 받은 자들에게는 예언과 환상과 꿈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다만 예언과 환상과 꿈이 일상적인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말들은 성경적인 의미와 사전적 의미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예언과 환상과 꿈입니다. 한편 이에 대비되는 일은 앞서 살펴보았던 점보기와 예측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점보기와 예측하기는 세상을 소원하는 상태에서 비롯된 행위입니다. 소원하는 것이 미래에 이루어질지 궁금하기에 점을 보거나 예측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소원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악령의 역사로부터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악령이 임하는 상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과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때 소원이 세상을 향하게 된다면 악령이 임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다면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즉 성령충만의 상태는 있음의 느낌이 하나님께 적용되는 상태입니다. 세상에는 마음에 담을 수 있는 대상들이 수없이 존재하지만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기에 세상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된 상태에서 성령충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충만 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그 뜻이 알려지는 것이 예언과 환상과 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점보기와 예측하기는 철저하게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반면 예언하기는 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미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관심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세상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향해 나오는 모든 말이 예언이 됩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예언이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라면, 마음을 세상에 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점보기와 예측하기는 철저하게 악령의 역사입니다.

예언기도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행해지는 예언활동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의 해답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동원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미래가 궁금하여 예언기도를 받고자 한다면 세상 것을 소원하는 악령의 상태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고 소원하기에 미래에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소위 예언기도를 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안수를 받아보지만 이것은 무속인을 찾아가 길흉화복의 점을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점을 보고 예측하게 하는 악령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악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많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관심은 미래가 아닌 지금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근본 취지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활동의 초점은 지금 선민들이 하나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벌어져있는가를 측정하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영적인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의 핵심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의 마음은 세상을 향하기 십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예언을 통해 이것을 지적함으로써 선민들과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져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언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악행의 결과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영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타날 결과를 예언으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몇백 년 앞서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이 예언되고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이 예언된 것도 지금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신 취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있으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하심으로써만 선민은 하나님과의 밀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의 관심은 미래가 아닌 하나님과의 거리에 있었기에 모든 예언 또한 그리스도를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민과 하나님과의 거리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 것조차도 지금 선민들과 하나님과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거리의 문제가 말세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가능해 질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수된 이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때 예언 또한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충만이 일상적이라면 예언 또한 일상적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언을 산골짜기에서 기도드리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사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우리의 일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계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언과 환상과 꿈이 주어질 것이 예고됩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동일시가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기 부인을 통해서 성령은 임하시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모세의 떨기나무 불꽃처럼 오순절의 불의 혀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느낌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고 좋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소원 또한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나 가족이나 단체나 나라나 민족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있기에 세상을 향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있기에 수평으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별세는 엑소도스(ἔξοδος) 즉 세상에 대한 탈출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의식 안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장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집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지금 하나님의 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강렬하게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열정적으로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 땅에서 일어날 미래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계속해서 미래의 일들이 신경이 쓰인다면 그것은 악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령 충만한 이들에게 아무런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는 하늘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몇 년 며칠을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존재합니다. 나의 미래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기 때문에 나와 연관성을 가진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소원의 대상으로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계획들을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미래를 알기 위해 구하는 예언은 필요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만 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장래 일에 대해서 말한다는 예언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이는 성령충만함에 의해서 말하게 되는 일상적 예언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은 물론이고 죽는 순간까지 내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미래의 한 수 앞을 내다보시는 정도가 아니고 백 수,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시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전지전능하심의 기준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보시기에 좋은 최선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합니다. 인생의 미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만을 갖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백만 수 앞을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연쇄적으로 이어져나갑니다. 다만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말과 행동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당연히 앞으로 계획하신 일들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수, 세 수는커녕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에서 무슨 변수가 생길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최상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나는 한 수 앞도 모르지만 성령께서는 백만 수 앞을 내다보시며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께서는 나에게서 가장 알맞은 말과 행동이 나오게 하시고, 그 결과 마치 백만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과 같은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이 일상화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일상적 예언입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연쇄적으로 이어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조금도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 마치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에 빗나가지 않는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선민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지금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지금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에게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셨습니다. 이 계획은 나에 대한 계획이고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계획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모르는 상황에서 최상의 말과 행동을 위해서는 미래를 아시는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예언이고 환상과 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언을 해야 됩니다. 다만 우리의 예언은 미래를 모른 채 이루어지는 예언입니다. 성령충만이 일상화될 때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온전하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고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할 것도 예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지금 선민들과 하나님의 거리가 벌어졌음을 깨우치게 하고 돌이킴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유지된다면 그 미래는 멸망이라는 결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바벨론에 의한 멸망의 백만 수 뒤의 합당한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참혹한 멸망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조금도 이탈되지 않게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민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대신에 가족과 나라를 먼저 느꼈고, 하나님 대신에 세상에서 형통하고 장수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소원하였습니다. 그 결과 백만 수 뒤에 바벨론에 의해 참혹한 멸망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합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악령의 역사를 받고 있다면 백만 수 뒤에 이루어질 지옥을 위해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악령의 역사에 의한 예언을 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가 멸망이라는 것을 모르면서도 조금도 차질이 없이 정확하게 멸망을 향해가고 있으니 예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좋아하고, 건강과 장수를 좋아하고,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갖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은 멸망을 향해가는 예언적 삶의 모습입니다.

성령충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예언의 삶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계획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으로써 그 계획에 조금도 차질이 생기지 않는 합당한 말과 적절한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계획을 다 보고 아는 것처럼 합당하고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이 일상적이 될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예언과 환상과 꿈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충만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예언의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언은 미래를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미래는 관심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6~8절을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나라의 회복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무엇이 언제 일어날지에는 관심을 갖지 말 것을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끼워 맞추는 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일어나는 예언은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과 같은 효과를 나타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계획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로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범주 안에서 삶은 예언의 활동이 됩니다. 전혀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시기에 성령충만에 의해서 지금 하는 말과 행동들은 예언이고 꿈과 환상이 보이는 근본취지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언의 삶을 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될 때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이 불타오르고 미래에 대한 관심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다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기존의 오해대로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손 놓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미래를 위해서 지금부터 무엇이든 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미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만 수 앞을 꿰뚫고 내다보는 사람처럼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삶은 바로 일상적으로 성령충만이 이루어질 때 나타납니다.

배우자에게 하는 말, 직장에서 하는 말과 행동을 비롯한 우리의 삶은 예언이 되어야 합니다. 백 수, 천 수, 만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함은 성령충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성령충만과 예언이 일상적으로 가능해집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하는 말과 행동마다 미래를 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예언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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