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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_태승철 (요한복음 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0.02|조회수8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의 줄거리: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우리 눈앞에 참으로 특이한 방향성을 부각시킵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이 세상과 삼라만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영원부터 있던 천국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누가복음이 이 세상을 출발점으로 하여 별세와 탈출과 승천으로 방향을 정한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이 됩니다.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

(요한복음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은 갈 곳이 아니라 방금 나온 곳’

우리는 죽으면 분명히 천국으로 갑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천국 문을 열고 방금 나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끝나면 천국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세상에서 천국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요한복음은 천국에서 세상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천국으로 출근을 하든지 천국에서 세상으로 출근을 하든지 세상과 천국 사이를 왕복하는 운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강조하는 방향이 뒤바뀌었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떠나는 좁은 문으로써 별세의 통로였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이 머물러야 할 안쪽 벽을 만들어줍니다. 쉽게 말해 누가복음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하늘을 강조하였다면 요한복음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세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계속해서 별세를 지향하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요한복음은 이미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상태에서 이 땅을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천국으로 우리의 눈길을 끌어갑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천국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이 세상을 살게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이 세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늘로 가는 방향을 유지하면서 사는 모습을 끝없이 강조하였다면, 요한복음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음을 전제로 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나와 사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성향을 문답형식으로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는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 어디로 갑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인 이 세상 밖으로 나가 영원한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로 갑니다.”라고 대답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출신과 고향이 어디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저의 고향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천국입니다. 저는 지금 천국에서 방금 이 세상으로 나와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해줍니다. 이렇듯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성도의 모습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른 방향에서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누가복음에서 강조했던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방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고,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늘에서 출발하여 세상으로 나와 사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강조하는 부분에 차이가 있다는 것에 유의하는 것은 말씀을 이해함에 도움이 됩니다.

누가복음의 결론이 세상에 둔감하여 하늘에 민감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요한복음의 결론은 하늘에 민감하여 세상에 둔감하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세상에 둔감하기를 먼저 강조함으로써 하늘에 대한 민감함을 결과로 얻으려 하였다면, 요한복음은 하늘에 민감하기를 먼저 강조함으로써 세상에 대한 둔감함을 결과로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전제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창세기 1장의 태초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차원 안에 지구와 삼라만상을 만드시는 시작점을 의미합니다. 한편 요한복음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천국이 머물고 있던 영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아직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사차원의 세계인 영원함 속에 천국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함 속에 계시던 예수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님을 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말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는 헬라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요한의 의도를 알기 위해 헬라 철학에서의 로고스의 의미를 자세히 알아야 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 그 의미가 충분히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으로부터 제시된 하나님 아버지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인간이 듣는 인격성의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성이란 주체적으로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체성의 핵심은 언어성으로 나타납니다. 인격 안에 머물고 있는 언어가 생각이고, 인격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인격 밖으로 나온 언어가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말씀이라는 한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두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적 특징은 언어성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격체이시나 스스로 별도의 생각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실 때 아버지 안에 머물던 언어인 생각이 예수님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밖으로 나온 생각을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각을 모조리 다 받아들이셨어도 아버지와는 별도로 다른 생각을 하신다면 말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실 수 있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제일 좋은 것으로 여기셔서 다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꿀처럼 맛있는 것으로 여기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성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인격성의 특징은 언어입니다. 인격이 독립적인 특징을 가지기 위해서는 독자적 언어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독자적 언어를 가지시기를 자발적으로 거부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구분되시는 아들 하나님으로서 독립적 인격체이심에도 그 인격성이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심으로써 아버지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되는 말씀 덩어리로 규정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스스로 말씀이 되시고자 하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 하나 하나가 너무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너무나 좋고 달게 느껴지기에 다른 생각을 스스로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특성을 말씀에 비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은 생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생각과 말씀은 둘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안에 머물러 있는 언어가 생각이고 밖에 나온 언어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말씀은 분명히 구분은 되지만 둘로 나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생각과 말씀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의미이십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씀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한 번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절 하반부로부터 3절까지는 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창조에 관여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생각을 받으셔서 바깥으로 말씀하십니다.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에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는 생각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창조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셔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너무너무 사랑스럽게 여기십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하시면 그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들 예수님이 받아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말씀의 의미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생각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받아 말씀하신 동일한 내용대로 성령께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다는 것은 생각을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땅에 대해 생각하시면 예수님께서는 이 생각을 바로 받으셔서 “땅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그 생각과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를 실제로 이루십니다. 창조의 과정이 이러하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아버지의 생각을 너무너무 좋고 맛있는 것으로 여기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과정에서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창조는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이 바깥으로 표현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생각만을 맛있어하고 좋아하고 받아들여서 말씀할 수 있는 인격적 피조물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이 되었고 성령님과 동조하여 인간은 창조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생물학적 목숨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개념이라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쉽게 말해 생명(生命)이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나인 성 과부에게 살아야 할 이유는 외아들이었습니다. 외아들이 나인 성 과부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사업이 전부인 사업가에게는 사업이 살아야 할 생명입니다. 성악가에게 생명은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를 보존하며 노래하는 것이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나인 성 과부는 외아들이 죽자 살아야 할 이유를 잃었습니다. 아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어머니는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가는 사업이 망하면 목숨은 붙어 있지만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육체의 목숨을 끊는 일조차 벌어집니다. 이처럼 생명은 사람을 살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동위 안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고 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 끝나자마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각을 받으시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심으로 기뻐하셨고,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이 당신의 생각을 곧바로 가져가는 것이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예수님과 똑같은 인격적 피조물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한 명의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야 할 이유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라만상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내 삶과 관계된 부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만 성령님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무척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12절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이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곶감 빼먹듯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로서의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과 몸을 통해 관계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예수님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생명입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주체적 인격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태어났고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이셨듯이 우리는 나의 삶에 대한 말씀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삼라만상 모든 것들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시는 말씀 덩어리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내 삶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이는 말씀 덩어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에 대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로서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서두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지금 2021년 10월 1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로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와 주권이 예수님을 통과하면서 성령에 의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이 올바름이고 밝음이고 정당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선택하여 타락하였고 더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좋고 재미있고 맛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조의 세계에서는 아버지의 생각 외에는 그 누구의 생각도 다 틀림이고 어두움이고 부당함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만이 올바름이고 밝음이고 정당함이기에 그 외의 모든 생각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모든 생각이 틀리고 어둠이고 천하에 부패하고 부당한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네 가지 유형을 통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릉에 살고 있는 태승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태승철은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야 하나님의 생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태승철이라는 한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아리조나주에 살고 있든지 태국의 주지스님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태국의 주지스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해 갖는 생각은 틀림이고 어둠이고 부패함이고 부당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이 땅으로 갖고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태국의 주지스님은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자기의 생각으로 살아가는데 그 생각은 애초에 틀림이고 어둠이고 부패함과 부당함이기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올바름과 밝음과 정당함의 빛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위치를 살아가고 좋아하느라 이 빛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인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장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하늘을 향하게끔 하였다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십자가 안쪽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에 참여한 상태로부터 세상을 살도록 우리의 시선을 하늘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진 요한복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강조한 것과는 다른 방향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는 세상과 하늘 양쪽 모두를 향한 영적 균형을 갖추는 이득과 은혜를 충분히 받아 누리며 만끽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생명과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대로 세상에 둔감함으로 하늘에 민감하게 하시며, 또한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하늘에 민감함으로 세상에 둔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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