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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 하다 죽자>의 줄거리: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외에는 하나님이 각각의 인격이 가져도 좋을 것을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몸부터 해서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은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고 그러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멈추신 적이 없으십니다. 평생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 주신 독생자를 받아 가지는 겁니다.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 하다 죽자
(요한복음 3:19~21)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 하다 죽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 하다 죽자”
세상이 너무나 많이 편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인터넷 뱅킹을 할 때 돈을 받는 사람의 계좌를 알아야 송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방의 계좌를 몰라도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서 문자를 보내듯이 받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금액을 적어서 보내면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송금된 돈은 정해진 기간 내에 수령하지 않으면 무효처리가 되고 내 계좌에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이 마치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작은 복음이라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은 한 사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75억 인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제 주신 독생자를 받아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문자로 송금할 때에 받는 사람이 수령을 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효가 됩니다. 싫어서든 혹은 받는 방법을 몰라서든 이유가 어떻든지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는 내 것이 될 수 없으며 믿음도 성립할 수 없고 영생 또한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독생자 가지기”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필립 체스터필드는 아들을 위해 책을 남겼습니다. 제목이 “아들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소중한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입니다. 제목만 보아도 어떤 마음과 내용이 담겨 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와 비슷한 제목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고인이 되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을 향하여 인생에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권고하는 내용의 책들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의 측면에서 보자면 세계는 넓고 해야 할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기간이 30년이든 40년이든 70년이든 그동안 많은 일을 해오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회에 이바지하고 인생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 책들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으니 세상을 넓게 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는다면 세상이 넓다 해도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만사를 젖혀두고 열일을 뒤로하고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이 한 가지를 할 때 인생은 가장 잘될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를 받아서 내 것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필립 체스터필드나 김우중 회장의 많은 할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전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해나가실 일입니다.
몸부터 시작하여 몸과 연관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에 두신 것이지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독생자를 받아서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생을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가지는 일에 올인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그 외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는 활주로와 같은 것입니다. 몸과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주권이 착륙하기 위한 준비된 활주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독생자 가지기”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하루를 사는 동안에 깨어있는 모든 순간과 장소와 상황이 바뀔 때마다 독생자를 가지면 됩니다. 살면서 아빠 노릇, 엄마 노릇, 목사 노릇, 선교사 노릇, 정치가 노릇 등을 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어떻든 처지가 어떻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뿐입니다. 설령 몸에 병이 났어도 그것은 하나님이 두신 것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계속 임해야 할 곳입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단 한 가지 독생자를 가지는 것입니다. 회사나 시장이나 광장이나 강단이나 모임에서 독생자만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해나가십니다.
다시 16절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에게 가져야 할 우리의 태도입니다. 문자로 송금이 확인되면 수령을 해야만 하듯이 독생자를 받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제목의 취지에 맞추어 풀어보자면 “…이는 그를 받아 가지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산 물건은 버리지 않는 한 나의 소유입니다. 집구석에 세워져 있든 내 곁에 두고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은 믿음으로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기에 믿음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는 물건처럼 집안 한곳에 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어디에 두어야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독생자는 오직 나의 인격 안에 가질 수 있습니다. 독생자는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지만 의식으로 붙잡을 수는 있습니다. 믿음이란 의식으로 나의 인격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붙잡음으로써 가지는 것입니다. 집안에 돈 주고 산 냉장고나 TV가 있듯이 인격 안에 내가 가질 수 있도록 독생자가 들어오실 수 있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독생자는 의식으로 붙잡을 때 인격이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독생자 가지기”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의식에서 “독생자 가지기”가 중단되면 믿음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독생자를 의식이 붙잡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식으로 붙잡기가 중단되면 내 인격 안에 독생자는 없습니다. 인격이 독생자를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유일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식으로 붙잡음으로써 인격 안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 안에 갖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전화번호만 알고 문자로 송금했을 때 수령하지 않으면 무효처리가 되듯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무효처리가 됩니다.
19절을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즘 백열전등이나 형광등을 대체하여 LED 전등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LED 전등은 수명이 반영구적이고 전력소비가 현저하게 낮은 것이 장점입니다. 그렇기에 지하주차장처럼 24시간 불을 켜야 하는 장소에서는 형광등은 더는 쓰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형광등의 수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센서를 설치해서 사람이 있을 때만 전등이 켜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LED 전등으로 교체한 후에는 항상 불을 켜놔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전등이 켜져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기가 계속 흘러 들어가야만 합니다. 밝게 빛날 수 있는 LED 전등이 있더라도 전기가 끊어지면 밝음은 사라지고 맙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나의 인격이라는 주차장에 LED 전등으로 오셨다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이 LED 전등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진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내 인격 안에서 환하게 켜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나의 인격 안에서 환하게 켜져 있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LED 전등이 계속해서 빛을 내기 위해서는 24시간 전기가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나의 인격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예수님의 빛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식이 십자가라는 사건 속으로 계속 흘러가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인격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예수님이라는 LED 전등은 켜질 수가 없습니다. 인격 안에서 예수님이 밝히 켜지지 않는 상태라면 예수님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내 인격은 지하주차장과 같은 곳이기에 예수님이라는 LED 전등이 켜지지 않으면 새카만 어둠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이 있어야만 모든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불이 켜져야 차들을 구분할 수 있듯이, 십자가의 예수님은 75억 인구 각자의 마음에서 빛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인격의 빛이 되어줄 전등이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님만이 인격의 전등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독생자 예수님만이 모든 사람의 인격을 밝히는 전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어둠을 사랑하기에 전등이신 십자가 예수님을 켜고자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의식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24시간 전기가 흘러 들어가듯이 의식이 24시간 예수님 안으로 흘러 들어가야만 합니다. 예수님만이 빛이시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나 이 세상 그 누구 안에도 빛이 없기에 밝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같이 창조적인 일을 많이 했어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빛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독생자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LED 전등이라서 의식의 전기가 들어가야만 켜질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는 인격에는 밝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밝게 켜지면 무엇이 보인다는 것일까요? 인격 속에서 십자가가 켜지면 제일 먼저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나 자신이 밝히 보이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가 보입니다.
내가 되어야 하는 모습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살갗은 채찍을 맞아 찢어지셨으며,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히셨고, 배에 창을 찔리신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모습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남이 보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아야 부활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어서 채움을 필요로 합니다. 기존에 세상에서 채움을 열망하였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한 후에는 부활하여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 하나님으로 채움을 열망하게 됩니다. 인격 속에서 십자가 LED 전등이 켜지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꼼짝 못 하고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일거수일투족마다 죄악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고 있지만 그것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LED 전등 같은 빛이라서 의식의 전류가 24시간 흘러 들어가지 않으면 인격 안에서 켜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이 켜질 때는 내가 세상 안에서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가 보입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열망해야 하는가가 보이게 됩니다. 드디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은 분이라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마음에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인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환히 보일 때에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은 분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진짜 현실임이 보입니다.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것은 단지 오늘의 번제 말씀을 들으면서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기와 같은 의식이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 LED 전등과 같이 인격을 환하게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천국이 현실로 보이고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예수님을 원치 않고 가지지 않는 이유는 빛이 싫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켜지면 비로소 나의 진짜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보고 싶지 않아서 유일한 빛이신 예수님을 꺼버립니다. 내가 이 세상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사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손발을 움직이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두신 것들을 주신 것처럼 좋아하고 끌어안아서 마음에 살이 찌는 것을 좋아합니다. 몸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만나는 가족이나 재물까지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을 가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이 환하게 켜지게 되면 더는 이러한 마음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살이 되도록 붙잡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싫어서 십자가의 예수님이 꺼진 어둠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신 분이심을 원치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좋다고 느끼던 것들을 그대로 다 좋은 것으로 느끼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LED 전등에 전기를 흘려보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식을 흘려보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인격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켜질 수가 없습니다. 문자로 보낸 송금을 수령하지 않아서 무효가 되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를 받지 않아서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가 이루어질 때 인격 옆에 두신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필요한 것들이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들어오셔서 움직여나가실 것입니다. 이전에는 슬퍼해도 기뻐해도 어둠 속이었습니다. 어둠이 재료였기에 슬퍼해도 가짜 슬픔이었으며 기뻐해도 가짜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주권이 들어오면 감정도 진짜가 됩니다. 진짜 슬퍼할 일에 슬퍼하게 되고, 진짜 기뻐해야 할 일에 기뻐하게 됩니다.
인격에서 십자가가 밝혀지면 그동안 내가 하던 모든 행위가 악한 것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악한 것은 끝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것을 좋아하기에 끝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인격을 환히 밝히는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이전의 나의 상태가 악함이고 어둠 속에서 자행되고 있었던 부패하고 썩은 것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드러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또 영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의식은 어둠을 좋아합니다. 몸과 몸으로 관계 맺는 사람과 사물들을 어둠 속에서 걸리는 대로 닥치는 대로 끌어안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래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도록 두신 것들입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삶은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고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손 한 번 움직이면 부딪히고, 발 한 번 움직이면 부딪힙니다. 밝은 곳에서도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칠 때가 있는데 어두운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충돌의 아픔이 마음의 걱정과 근심과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나의 인격이라는 지하주차장의 LED 전등입니다. 나의 의식이 십자가라는 사건 속으로 계속 흘러감으로써 인격 속에 주님이 환하게 켜질 때 모든 것이 밝히 보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으며, 마음의 공백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는지,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는 어떤 재료들이 들어와 움직이게 되는지가 다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를 받아 가지는 것입니다. 주신 것이 아닌 두신 것들을 자꾸 가지려고 하니까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아무쪼록 평생을 바쳐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한 분 가지기에 올인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해나가야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하나님의 뜻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어떻게 장갑으로 삼아 움직여 가시는지를 관찰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것은 가정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직장을 주신 것은 직장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직하게 하셨다면 실직한 상태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해야 하고, 은퇴하게 하셨다면 은퇴한 상태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하면 됩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사역지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하면 됩니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하면 됩니다.
“독생자 가지기” 이외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권대로 해나가실 것입니다. 몸을 주신 이유도 몸을 입고 있는 인격으로써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 하면 됩니다. 건강도 하나님의 일이고 돌에 맞아 죽더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독생자 가지기”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가지기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분을 가지는 일이기에 믿음입니다. 이 가지기는 일평생 매일 매순간 지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표현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이라는 주차장을 밝히시는 LED 전등입니다. 의식이라는 전기가 흘러가지 않으면 켜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켜지지 않는다면 어둠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이 인격 안에서 밝히 켜질 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은 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독생자 예수님을 인격 안에서 밝히 켜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밝히 켜고자 한다면 의식의 전기를 십자가에 24시간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격 안에서 십자가가 밝히 빛을 내는 상태를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의식 안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이 켜지는 “독생자 가지기”가 유지되고 있다면 인격 내적 외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은 넓고 평생 할 일은 “독생자 가지기” 단 한 가지뿐이라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이 한 가지에 단순하게 몰입할 수 있게 해주시고 나의 인격 안에 십자가의 빛이 항상 켜져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어지는 은혜의 내용물들이 밝히 드러나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