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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_태승철 (요한복음 3:31~3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0.21|조회수4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의 줄거리: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출생을 시작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세상 탈출의 별세(Exodus) 과정과 승천의 천국 영입 과정을 향하여 기록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영원한 천국과 십자가를 함께 출발점에 놓고 기록을 합니다. 이런 기록 방식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공생애 때 예수님 모습을 십자가 독생자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서 찾으려는 거지요.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

(요한복음 3:31~36)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

지난 시간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독생자 가지기만을 평생 동안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중에 여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기존의 삶이 진행되는 위에 첨가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독생자를 가지는 일 이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독생자만 가지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일까요?

 

어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가족 세 분이 강릉에 오셨습니다. 그중에서 한 자매님이 복지사 자격을 얻기 위한 수업을 듣고 있는 중인데 과제들이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하십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한동안 하시다가 수업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화중에 “믿음이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만 가지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독생자 가지기만 하고 있으면 과제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이 경우 독생자 가지기만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과제에 대한 부담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독생자의 비중과 존재감을 더 먼저 느끼고 더 크게 의식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과제에 대한 부담감이 만만치 않기에 얼른 과제를 끝내고 말씀도 듣고 십자가로 주의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평강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합니다. 많은 경우에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도 않고 말씀을 듣기만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고 스스로 답을 얻고 삶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로 삶이 진행되는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결국 십자가 복음 말씀을 듣는 것조차 포기하고 중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삶의 현장 속으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다 걸려 넘어집니다. 자매님이 갖고 계셨던 궁금증과 의문을 넘어서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삶이 이렇게 진행된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채로 끝내고 맙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지속적으로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방송을 거쳐 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거쳐 가신 분들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도 없지만 찾아오기도 하고 그렇게 좋아하기도 했던 분들이 사라진 경우를 봅니다. 말씀이 너무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득달같이 강릉까지 내려와서 기쁨을 토로하시던 분들이 사라진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삶의 현장 속으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실패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는 실패가 아닌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설교 말씀을 듣다가 끝나버렸습니다.

매년 치러지는 수능을 보면 대학에 들어가는 숫자는 전체 학생 수에 비해서 적습니다. SKY는 물론이고 그 밖의 대학들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한정적입니다. 수능이라는 관문에서 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도 관문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생활 속에서 해야 한다는 고개에서 많은 분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이제까지 거쳐 간 분들의 숫자에 비하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고개를 넘어 생활 속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해나가거나 시도하고 있든지 시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방문하셨던 자매님은 과제가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보다 과제에 대한 부담을 큰 비중과 존재감의 대상으로 의식이 붙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과제가 빛이 되었기에 마음이 과제에 억눌려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때 해야 되는 일은 이러한 의식 상태를 직시하고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죽음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의 자리는 과제에 억눌린 내가 죽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독생자를 바라보며 주의 기도를 드리다 보면 마음은 과제를 등지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기도를 할 때 이 세상일들은 어둠 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의식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중에 마음은 십자가 사건에 주어져 있는 약속을 따라 하늘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과제를 해나갈 생각과 힘이 생겨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보면 기어를 중립이나 파킹에 놓으면 엔진이 돌아가도 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엔진의 힘을 전달하는 크랭크축이 바퀴로부터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전진이나 후진에 놓을 때는 크랭크축이 연결되면서 엔진의 힘이 바퀴로 전달되어 차가 움직이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해야 될 과제들을 어둠 속에 밀어 넣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식의 전면에 세워서 빛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자동차에 전진 기어를 넣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전진 기어를 넣으면 엔진의 힘이 바퀴까지 전달되듯이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동안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하고 평안해지기 시작하면서 삶의 과제들을 해나갈 생각과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매일 경험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의 좋음과 채움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독생자 가지기는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이지만 실제로 해나가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관련하여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1~32절을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앞에서 다 언급된 내용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치 총정리를 하듯이 앞서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단지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포인트를 정형화해서 말씀드리자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정식이란 “A=B다” “C=D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의 행적을 십자가 사건이 완수된 이후의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예언대로 태어나서 자라셨으며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과정은 세상을 떠나고 부활의 자리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태초에 영원한 세계의 천국과 십자가를 처음부터 언급합니다. 1장 5절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말씀부터 이미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십자가 사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장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또 2장에서는 성전정화 사건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1장, 2장, 3장에서 계속해서 영원하심과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의 십자가 사건이 붙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이러한 방식을 취한 이유는 요한복음의 목적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을 묘사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우리가 살펴본 3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목적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통하여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1장부터 태초에 영원함 속에 말씀으로 계시던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이야기로부터 십자가 사건을 첫 번째로 언급했습니다. 장대의 구리뱀을 바라보듯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사람의 모습을 영원 속에서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앞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방정식”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공생애의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은 전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평생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이상하고 낯설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공생애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러한 묘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앞서 강릉에 오셨던 자매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에만 몰두한다면 과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제 앞에서 독생자 가지기를 고집하고 지속하고 유지하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셈입니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붙잡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때에 예수님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생애 때의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는 사람”이 독생자 방정식이고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같이 될 수 있다니 기절할 일입니다.

본문 31~36절을 보면 그리스도론 즉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에 대한 묘사 속에서 실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나의 초상화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만 가지기만 하면 공생애 때의 예수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들과 차별화되는 특징입니다. 공관복음서들은 십자가를 향하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마태복음은 구약의 2000년 역사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은 십자가 사건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렇게 공관복음서를 통해 알게 된 십자가 사건을 내 것으로 만든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중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가진 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참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는 놀라운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만을 할 때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나의 삶은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가? 사도 요한은 이것을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계속 유지하는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만 개괄적 내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말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31절을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말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말하고, 위로부터 오신 이는 위에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2절 까지를 보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만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만물 위에 계신 분이 위로부터 오셔서 만물 위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만물이 있는 세상에 내려와서 이야기할 때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잘 들리기를 바란다든지 잘 통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34절을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살아가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며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에는 그 사람에게 내가 잘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말을 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성령을 허락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게도 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애굽 왕의 바로가 받아들였고, 다니엘을 바벨론의 왕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우리는 만물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31절을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과거형으로 “오신 이”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는 방금 천국 문을 열고 나오신 것과 같이 사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살로메를 만날 때나 대중들을 앞에 두고 계실 때에도 방금 천국 문을 열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사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가지기를 삶의 현장에서 해나갈 때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직장에 있든 가정에 있든 방금 천국 문을 열고 나와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이 됩니다.

독생자 가지기 한 가지를 일생의 과제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천국살이가 됩니다.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이전에 살아서 천국을 살아가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부터 나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나와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천국에서 나와 살기 위해서는 일단 천국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 일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독생자 가지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천국으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 때 과제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부부가 서로를 마주할 힘도 생깁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 필요한 말도 하게 됩니다. 직장에서 해야 될 일들에 대한 말과 힘과 지혜도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으로부터 나온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천국으로부터 나올 때는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강릉에 오셨던 자매님은 복지사 수업에서 받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보내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한 것처럼 독생자 가지기를 하는 사람들은 천국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이 됩니다. 또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라고 한 것처럼 천국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은 만물 위에서 힘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만물에 장악되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방정식”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묘사는 “독생자 가지기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삶의 현장에서 가지기를 지속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초상화의 대략적인 스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으로부터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초상화를 그려갈 것입니다.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을 삶의 현장에서 평생 하는 나의 모습이 이제부터 요한복음을 통해 그려져 나갑니다. 나의 초상화를 어떻게 그려나갈 것인지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런 말씀이 실제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신 독생자 가지기 하나만을 하는 나의 초상화를 그리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역사하신 책이라는 것을 보며, 요한복음을 통하여 나의 사진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땅으로 보내시기 전에 구상하셨던 본래의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래의 모습을 찾으면서 가족이 하늘을 느끼게 하시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느끼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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