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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열등감이 은혜를 모조리 파괴한다_태승철 (요한복음 4:28~4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0.28|조회수5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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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열등감이 은혜를 모조리 파괴한다>의 줄거리:

수가성 여인은 수가라는 마을 사회에서 가장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을 전체에서 실제로 열등감이 가장 없었던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원천리하고 유대 예루살렘에서 이 사마리아 땅 수가성까지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십니다. 열등감이 없어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열등감이 은혜를 모조리 파괴한다

(요한복음 4:28~42)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9.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열등감이 은혜를 모조리 파괴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열등감이 은혜를 모조리 파괴한다”

열등감은 복음을 찢고 구원을 잡아먹는 천적입니다. 열등감과 구원은 천적관계에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다면 십자가 복음을 통해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뿌리째 뽑혀나가게 됩니다. 열등감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기에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속성이 지극히 악하기 때문에 절대로 불쌍하게 보아줄 일이 아닙니다. 우월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월감은 열등감의 악함에 목불인견의 꼴불견까지 보태놓은 양상입니다. 우월감은 열등감과 같은 악한 속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열등감의 다른 표현방식에 불과합니다.

 

수가성 여인은 수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여인이야말로 수가 마을에서 가장 열등감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불원천리하고 사마리아 땅의 수가 마을까지 오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여인처럼 열등감이 없는 상태에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파를 비롯한 사람들이 사회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등지고 동심원의 가장 바깥자리로 나가십니다. 유대 남자와 유대 여자를 지나고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셔서 사마리아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도 지나고 가장 변두리 동심원에 있던 수가성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주권자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께 우연한 만남이란 있을 수 없기에 이 여인을 일부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야말로 인간사회의 중심부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이러한 위치에 있던 수가성 여인을 찾아와 만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 예수님께서는 행로에 고단하고 지쳐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드시기를 권하자 32절에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져온 음식을 드시지도 않고 별도의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양식이란 육체가 먹어야 할 양식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살맛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고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유대 땅 중심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등지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여인을 통해 살맛을 느끼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이란 살아있다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맛 난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일까요? 살아있는 이유가 잘 이루어지고 성취될 때에 사람들은 살맛이 난다고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시는 이유가 수가성 여인과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행로에 고단하고 지쳤던 육체까지도 원기를 회복하는 살맛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살맛 나게 만들었던 수가성 여인의 특징은 바로 열등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여인은 열등감에 절어있어야 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꾸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과정에서 세상적인 열등감은 극복되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열등감을 극복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사회에서 동심원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을 다 피하셔서 찾아오셨고 여인으로부터 살맛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열등감이 없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이 여인으로부터 그리스도로 영접을 받으셨음에 살맛을 느끼셨습니다. 이를 양식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목마름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채우고 싶어 욕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마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목마름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기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값어치만큼이나 귀한 것이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목마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 세상 것을 향하게 될 때는 변태적이고 기형적인 인격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하나님의 값어치만큼이나 소중한 마음의 목마름이 돈을 향하게 된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돈이 생수의 구실을 해주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미 나보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열등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을 갈망하는 것이 죄이고 갈망하는 돈을 얻기 위해 시도하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처럼 목마름은 소중한 것이나 죄악과 만나게 되면 기형적이고 변태적인 사생아로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이 태어나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생기는 열등감은 돈을 가진다고 해소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목마름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월감은 열등감이 둔갑한 형태입니다. 목마름의 근본적인 이유인 하나님이 안 계신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한동안 미친 듯이 꿈과 비전이 외쳐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나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세상 것들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열등한 상태로 스스로 규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 나아진 상황을 꿈과 비전에서 찾고 있기에 지금은 항상 열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꿈과 비전과 이 세상에서 이룰 목표라는 것은 열등감에 미쳐버린 사람들의 몸부림입니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무엇인가 바란다면 그것이 없는 상태를 열등하게 여기는 느낌과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등감이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인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열등감은 십자가 복음의 천적입니다. 그렇다면 수가성 여인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고 열등감이 가장 적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의 전도로 인해서 예수님은 수가 마을의 중심이 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한 이 여인 또한 마을의 중심 자리에 서게 됩니다. 42절을 보면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여인에게 이런 말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텐데 굳이 여인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열등하다고 여겼던 여인이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중심에 서있게 된 것을 보았고 마을 사람들은 놀라게 되었습니다. 항상 변두리에 있었던 여자가 중심이 된 상황이 어색하고 자존심도 상하였기에 “네가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겠다.”라는 의도의 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쳐나가실 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등감이 없는 사람을 중심점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를 넓혀 가십니다. 인간 세상의 동심원 중에 가장 변두리에 있던 이 여인을 중심점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는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떻게 열등감을 없애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에 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여인은 홀로 게임의 룰을 바꾸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목마름을 세상 것들에 적용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만큼은 이 게임의 룰을 바꿔서 목마름을 세상 밖에서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자기가 들었던 하나님께 마음의 목마름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게임의 룰을 바꿔서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 목마름을 적용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여인에게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의 자격이 박탈되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 목마름 해결에 있어서 이 세상의 것들은 가진다고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못 가진다고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인은 목마름 적용의 대상을 바꾸었습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바랄 것이냐”라는 게임의 룰을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직 하나님을 가지지도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열등감은 사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향해 있을 뿐이었고 아직 목마름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서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열등감은 극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려는 모든 은혜를 뿌리째 파괴해버리는 열등감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이 단칼에 열등감을 극복하게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여인은 세상적으로 참으로 박복하고 불운하게 보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꾸고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면서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여인은 깨닫게 됩니다. 이 여인도 처음 결혼했을 때에는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에게서 마음의 목마름 해소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통념대로 여인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은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통해 마음의 목마름은 전혀 해결될 수 없었기에 기대는 좌절되고 맙니다.

여인은 이후에 이혼을 했는지 사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결혼하여 두 번째 남편과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남편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살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기대는 또 다시 깨지게 됩니다. 그것이 세 번째 네 번째를 거치며 실망으로 바뀌었고 다섯 번째를 거치며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남편이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면서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바로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의 목마름을 남편의 존재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나야말로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첫 남편에게 기대를 갖고 결혼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를 거치는 동안에 실망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를 거치는 동안에 남편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는 나를 목마름에서 해방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남편의 자격을 박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깨달은 것은 내가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남편은 원망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의 생수 자격을 박탈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남편을 기대했던 자신도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목마름을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적용하며 생수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인은 세상 것들에 목마름을 연결시키고 해소하기를 기대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타난 일이 열등감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사람들은 한 남편과 같이 사는 여인을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남편의 존재의 의미를 죽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사람들 모두가 칭찬하는 남편을 보면서도 부러워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금 남편이 모자라도 하나도 아쉽지 않습니다. 훌륭한 남편이어도 마음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고, 남편이 부족해도 마음의 목마름의 해결에는 아쉬울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남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 남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남편입니다. 사람들은 목마름을 해소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세상 것들을 남편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갖가지 종류의 남편들에 대해 큰 남편이든 작은 남편이든 사소한 남편이든 목마름을 이 세상 것을 향하여 적용시켜 작게라도 바란다면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 그것을 바라는 나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모든 것에 생수 자격을 박탈함과 동시에 열등감은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삼수를 하다가 군대를 가기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반창회를 한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당시에 달동네에 살던 저는 아버지가 입으시고 큰형에게 물려준 옷을 다시 물려받은 잠바를 입고 있었습니다. 잠바는 소매가 다 헐어서 너덜너덜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대문 시장에서 산 공사현장에서나 신는 안전화를 신고 맞지도 않는 바지를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의 저에게 동창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에 우수반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삼수를 한 사람은 저 혼자였을 겁니다. 그 우수반에 있던 40명 정도가 서울대 연대 고대 서강대 성균관대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삼수하다가 대학에 못가서 군대를 가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제 얼굴이 활짝 펴있으니까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으며 그들이 열등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도를 닦다가 왔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고 화제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당시에 제가 했던 일은 달동네 슬라브 지붕 밑에서 비를 피해가며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만을 관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과 금강경을 비교해서 읽고 기도하며 꿈과 계시로 살 때였습니다. 저는 달동네에 산다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얼굴이 펴면 부자가 된 줄 압니다. 굉장한 일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런 경험이 참 많았습니다. 군대에 가서 카투사로 있을 때도 미군들이 저를 “프로페서”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와서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몰랐는데 교수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자기들 기준에서는 제가 그렇게 세상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이러한 경험을 일상적으로 해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몰라야 열등감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수가성 여인의 상태는 저의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가 살았던 달동네는 세상의 가장 변두리입니다. 삼수를 하면서 대학을 못가고 군대에 갔던 처지도 세상의 변두리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상태에서 열등감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삼수생이 대학을 목마름의 대상으로 정했다면 열등감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달동네에 사니까 돈을 갈망하였다면 열등감이 안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저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하늘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백으로부터 목마름은 생겨납니다. 창조주로부터 생겨난 목마름을 피조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이 마음의 목마름을 피조물로 채우려고 할 때 악하고 기형적인 형태의 인격으로 열등감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등감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여섯 명의 남편을 바꾸어 사는 동안 마음의 목마름에 대해서 남편은 생수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세상 것에 목마름을 적용하지 않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찾아가셔서 그리스도로 영접받으시고 살맛을 느끼셨습니다. 제자들은 3년의 과정을 거쳐서 열등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5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등감이 사라지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무르익어 추수할 때가 된 것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등감이 사라지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사는 시점에서 열등감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르익은 마음 상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3년의 과정을 거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에 대한 바람이 사라집니다.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던 인격이 변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르익은 인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 것에 목마름을 적용하고 세상 것을 바라는 내가 죽어야 함을 느끼고, 세상 것을 아직도 좋아하는 죄적 체질이 죽고 또 죽음으로써 열등감이 없는 상태의 무르익음의 단계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듣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열등감을 극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을 바라는 나를 싫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바라고 있는 한 반드시 열등감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열등감은 도저히 그리스도 안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기형적이고 변태적이고 악한 모습입니다. 우월감 또한 열등감과 같은 본질을 가진 변태적 자아입니다. 이러한 자아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되겠다는 확신만 가져도 열등감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다른 차원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와 천적관계에 있는 열등감에 찌들어 살던 우리가 수가성 여인에게 오버랩 되어 남편이 여섯 명이나 바뀌는 과정이 십자가에서 고스란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에게서 열등감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남으로써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져서, 부활 승천의 길을 따르게 하시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사라진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닿을 수 있게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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