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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안 믿는다_태승철 (요한복음 4:43~4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0.30|조회수8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안 믿는다>의 줄거리:

숱한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온 유대 땅에 예수 이름이 다 퍼졌어도 결국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맙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은 바로 세상에서 버림받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음속 목마름이 세상을 향하는 한 예수는 믿어도 그리스도는 안 믿는 기현상이 발생합니다.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안 믿는다

(요한복음 4:43~45)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안 믿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안 믿는다”

본문 말씀은 일견 모순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4절에서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45절을 보면 정작 예수님께서 향하신 곳은 나고 자라신 갈릴리였고 그곳에서 영접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상태의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예수 믿음과 그리스도 믿음을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망각하면 안 됩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이 참으로 어색하고 거북하게 들리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요한복음에 담겨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오직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공관복음서 전체는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됨을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공통되게 이 고백 뒤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0~21절에서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마가복음 9장과 누가복음 9장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믿음은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세상을 탈출하는 별세 즉 엑소도스(ἔξοδος)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빠져나가는 과정을 만드신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할 때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거리끼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을 통해서 오늘 본문과 다음 말씀에서 살펴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을 제시해주십니다. 이 두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그저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이 예수 믿음과 그리스도 믿음을 구분함에 있어서 특별히 제시하는 단어가 바로 목마름입니다. 목마름이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에는 마음의 목마름이 전제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서 본 3장에서는 니고데모와 세례 요한의 사건들을 통해서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가 제시되었던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장 14~15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마음의 목마름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목마름을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보면 예수 믿음과 그리스도 믿음이 명확하게 갈라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만 내용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내용에서 모순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글 번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상의 헬라어 접속사 하나가 본문의 이해를 무척 어렵게 만듭니다. 43절과 44절의 사이에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가르(γάρ)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43~45절의 내용에서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는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신 갈릴리에서는 영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가르”라는 접속사가 왜 들어가 있는지 신학자들이 골치 아파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표현 자체가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문장을 나눠보면 좀 더 해석이 쉽습니다. 한글 번역에서는 구절들의 끝부분이 “가시며, 하시고”라는 식으로 다 연결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문장 자체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43절은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라고 마무리 지어 봅니다. 그리고 44절도 “(왜냐하면)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정리가 되실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틀 동안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계시다가 자라신 고향 갈릴리에 가기로 하십니다. 고향으로 가시는 이유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높임을 받지 못하는 곳으로 가신다는 것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는 선지자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무조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원문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이렇게 해석을 하고도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높임을 받지 못하신다고 했는데 영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영접에 담긴 의미가 오늘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45절 하반부를 보면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유대 땅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 많은 군중들 앞에서 반복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알던 갈릴리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예수님의 소문은 고향인 갈릴리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돌아오시자 갈릴리 사람들은 영접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열렬히 환영했을 것입니다.

갈릴리는 유대 땅에서도 북쪽 변두리에 위치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골마을 출신의 예수라는 젊은이가 예루살렘에 모였던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예수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금의환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가워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고향 사람들이 이렇게 반기고 영접할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신 것은 선지자로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보았던 것은 2장의 내용입니다. 2장 22~23절을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로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을 아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 살펴본 대로 오히려 이방 땅이었던 수가성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영접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수가성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물가에 있던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뒤에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했을 뿐입니다.

4장 42절을 보면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수가성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단 한 건의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될 46절 이하에서 등장합니다. 왕의 신하라는 사람이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간청을 대단히 언짢게 여기시며 48절에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모습과 갈릴리에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은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차이점을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하였고 4장 48절에서도 왕의 신하와 그 가솔들과 관련하여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갈릴리 사람들 또한 예루살렘에서의 표적과 기사를 이유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높아졌다고 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심을 느끼셨습니다. 수가성에서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영접되셨고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고향인 갈릴리에서는 영접을 받으셨지만 그리스도로 영접되셨던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에서 선지자 대신에 그리스도를 집어넣으면 단숨에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성에서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셨지만 고향땅 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은 세상을 빠져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사회라는 동심원을 그려보면 그 중심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가면서 유대 남자가 있고 유대 여자가 있고 사마리아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로써 동심원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열렬히 중심부를 향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세상의 가치를 획득함을 통해 마음의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해 마음의 목마름이 흐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곤란한 처지가 되셨습니다. 세상의 중심부를 향하고 세상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떠한 인상도 남길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중심부를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관계해야 될 필요도 믿어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이들이 아는 예수라는 사람은 남루한 목수의 아들로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셨기에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구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사회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어쩔 수 없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증거를 표적과 기사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통해 마음의 목마름이 하나님을 향해야 함을 가르쳐주시고자 했습니다. 마음의 목마름이 명중시켜야 할 과녁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없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는 것 또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실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바람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부를 향하던 마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목마름을 위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거나 가진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를 세상 것을 얻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믿었다”라는 말이 거침없이 사용됩니다. 실제로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이들이 믿었던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님이었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공생애 때의 표적과 기사를 보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 세상 중심부를 향해 목마름이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 세상을 향한 마음속 목마름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여전히 세상 것을 바라고 소원하는 중에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믿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을 얻는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주신 것일까요? 그 이유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원하고 바라는 것이 세상을 향해 있는 한 구원을 얻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거의 60년이 지난 뒤에 쓰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60년이란 세월이 지났듯이 앞으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처럼 예수는 믿지만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60년 동안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생겨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돌이키기를 바라면서 본문 말씀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의 구분법을 따르자면 마음의 목마름이 세상 것을 원하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며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인은 그 기쁨으로 물동이도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자들이 양식을 마련하여 돌아왔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입장도 이 세상을 향해 목마름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높임 받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가장 변두리로 밀려난 하찮게 여겨지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고백에서 드러난 대로 이 여인의 마음속 목마름은 더 이상 이 세상 안에 있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상에서 여인에게 남편은 마음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는 남편에게 목마름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대상이 없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인에게 목마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마름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다만 세상에서 과녁을 찾을 수 없어서 듣고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께 어떻게 마음의 목마름이 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예배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예배를 다 철폐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려는 여인의 목마른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추수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그리스도로서 높임을 받으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역할이 존중되어야 하며 역할이 수행되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목마름이 이 세상을 향하여 있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써 이루신 그리스도로서의 연쇄과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영접을 받으셨음에도 그리스도로는 내팽개쳤음을 아셨기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수가성 여인에게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기적을 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바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여인은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실 필요도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려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만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 믿음과 구분되는 예수 믿음이란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보여주셨던 능력만을 채택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향한 목마름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 수많은 바람을 갖습니다. 큰 바람이든 작은 바람이든 생겼다가 금세 사라지는 바람이든 이루어져서 기쁨을 주는 바람이든 끝없이 바람을 갖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목마름의 방향 자체가 세상을 향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부르고 찾아도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되심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보고 환영하고 영접하였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수가성에서는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셨지만 고향 땅 갈릴리에서는 그리스도 되심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질 것을 아셨기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이유는 바로 그러한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예수님을 내팽개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을 염두에 두시고 믿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환영을 받음과 동시에 땅바닥에 내쳐지는 상황을 직접 나타나게 하시려고 고향 땅에 가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준을 따라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공생애 때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던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부로 가고자 합니다. 중심부의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가치를 같이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중심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 것이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믿는데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기현상은 적어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라도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얼마나 오랜 세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는 믿지 않았는지 차마 부끄러워 말씀을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오직 그리스도로만 믿게 해주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세상 밖으로 빠져나와 아버지를 갖는 구원을 이루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이 땅의 삶에서도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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