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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오버래핑의 네 가지 포인트>의 줄거리: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일까요? 어둠 속에서 더러움과 부패에 찌든 장아찌가 바로 사람입니다. 이런 존재가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이시고 빛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는 천지 개벽보다 더한 변화는 오직 네 가지 포인트를 일치시키는 십자가 오버래핑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 오버래핑의 네 가지 포인트
(요한복음 1:6~18)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오버래핑의 네 가지 포인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오버래핑의 네 가지 포인트’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제목과 언뜻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고, 예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십자가에 오버래핑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나를 포갤 때 주의할 네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포인트를 정확하게 맞추어 포개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오버래핑을 통해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면 본문의 약속대로 누구도 실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오버래핑의 네 가지 포인트”라는 제목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살펴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사복음서와의 비교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모두 십자가를 의식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십자가 생활화를 말하면서도 특별히 집중하여 강조하는 부분에는 각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공통된 관점에서 쓰인 복음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공통된 관점이란 땅을 출발지로 해서 천국을 향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를 넘어서 천국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이 세상으로 나오려고 십자가를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만 사복음서가 모두 마음이 하늘로 가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길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으로 동일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땅에서 십자가 넘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천국에 마음을 둔 하나님의 자녀가 십자가를 넘어 세상으로 나와서 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의식하는 것뿐입니다. 십자가를 의식하는 동안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공관복음서가 말씀하는 일이 벌어지고 또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사복음서는 십자가만 의식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 주어지는 은혜들을 각기 특징을 가지고 보여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관복음서 각각의 특징을 세분화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세례 요한까지 이천년의 역사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향하여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손이 이천년 동안 가리키고 계셨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보여줍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천년 동안 선민의 역사를 통하여 가리키셨던 십자가 사건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누가복음은 이천년 선민의 역사를 가리키는 마가복음이 묘사한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별세의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날마다 생활화함으로써 세상을 탈출한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관복음과는 반대의 방향에서 십자가 사건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이 세상을 탈출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성도들의 삶이란 날마다 천국의 맨홀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와서 세상을 사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계신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다가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 성육신의 과정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개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골자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의 궁극적인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마태 안에도 요한이 말하는 바가 들어있고, 요한 안에도 마가와 누가가 말하는 바가 들어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특별히 조명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요한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 공관복음서의 내용 전체를 한 마디로 묶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제로 해서 다음 내용을 이어갑니다.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관복음서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하늘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마주대하시며 하나가 되어 계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에 참여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공관복음서 전체의 내용입니다. 요한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살아가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것을 14절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천국은 우리가 사는 동안에 앞으로 갈 곳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방금 천국의 문을 열고 이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해당되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에서 나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성도이고 교인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말씀의 취지를 따라서 제대로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명사진이 바로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봐야할 부분은 귀에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많이 들어왔던 내용입니다. 12절의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하나님의 자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를 영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이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6~8절에서는 먼저 세례 요한의 증언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언급됩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은 빛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빛에 대한 증언은 반어법적으로 세상은 어둠 속에 처해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어둠 속에서도 철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성인이라고 일컫는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가르쳤던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또한 결국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철학자든 과학자든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올바름과 타당함으로써의 빛을 전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을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대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지구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럴싸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있었으나 결국은 다 어둠 속에 있었을 뿐입니다.
한편 이어지는 9절을 보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어휘가 “각 사람”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은 종교나 단체가 아닌 각 사람에게 비추는 개인적인 구원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은 부부동반으로 비취지 않습니다. 가족 단위로도 비취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개인적으로만 예수님이라는 빛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빛은 올바르고 타당함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안에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만이 내가 지금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결국은 죽은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야 할지를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계시기에 각 개인이 마주하는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서 빛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빛은 곧 진리로서의 밝음입니다. 진리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보편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올바르고 합당한 답입니다. 이것을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신 인격적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생각에는 나에 대한 생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75억 명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아들 예수님께서 다 받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심으로 자녀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속에 들어가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혈통은 선민으로서 아브라함의 가문을 의미하고, 육정은 부부관계를 통해 태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육정으로는 아버지 이새와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뜻이 언급됩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를 떠올려보면 지도교수님을 아버지(Doktorvater)라고까지 부릅니다.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 장인과 도제의 관계, 종교의식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 등이 모두 사람의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말씀에 비유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이시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이 표현된 말씀이시고 성령님께서는 그 생각과 말씀에 담긴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시각각 당면하는 모든 문제들 앞에서 내가 해야 될 생각, 내가 해야 될 말, 내가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모든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님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 빛보다 어둠에 익숙해서 틀리고 부패하고 더러워진 죄에 찌든 장아찌와 같은 체질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가 빛이시고 영이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천지개벽보다 더 심한 격변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영접하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영접하기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친자확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친자확인의 방법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십자가 오버래핑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되기 위하여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일시가 곧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일치되어 포개지는 오버래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될 네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포인트가 맞추어지는 정확한 오버래핑이 지속되면 은혜 위의 은혜의 삶,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은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온몸은 채찍에 맞아 살이 다 찢어졌습니다. 두 번째 머리에는 손가락처럼 두꺼운 가시가 박혀있는 면류관을 쓰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배를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이 네 가지 포인트에 정확히 오버래핑함으로 예수님과의 동일시는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네 가지 포인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온몸이 채찍에 맞아 살이 다 찢어졌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온몸의 살이 다 찢어져야 했던 이유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으로 좋아할 때 그것들은 마음의 살이 됩니다. 마음의 살이 되었다는 증거는 내게 주어진 것 중에 없어지거나 망가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나타납니다.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애인과의 결별이나 아끼는 외제차가 찌그러지는 것까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그것들이 나의 마음의 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을 담아야 할 곳인데 이렇듯 세상의 가치가 유착되어서 살이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마음에 유착된 살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몸이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져야 했던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 세상에 주어져 있는 것들이라면 가족이나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계좌의 돈이나 물건 혹은 지위나 사회적 신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고백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손가락처럼 두꺼운 가시가 박혀있는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 두꺼운 가시면류관은 점점 더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립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광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머리를 굴리고 머리를 쓰는 것은 전혀 불필요하고, 전혀 부당하고, 완전한 손해이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기 때문에 미친 짓이고 광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머리는 작동하여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한 그릇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가시면류관을 쓰신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꼼짝 못 하게 되어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일에 직접 손대고 발을 들여놓고 관여하는 모습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던 것입니다. 경찰이 범인을 향해 “손들고 꼼짝 마!”라고 외치는 것은 손을 듦으로써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 박혀서 꼼짝 못 하는 상태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손대려는 일, 발을 들여놓으려는 영역, 추진하려는 일들에 대해서 손 떼고 발을 빼야 합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손대고 발로 뛰려는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 손의 장갑이고 하나님 발의 신발일 뿐입니다. 내가 손대서는 안 되고 내가 뛰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손을 대고 뛰어보려는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오버래핑해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손을 대고 발을 들여놓고 관여하면서 스스로 추진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일 수도 없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배를 창에 찔리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에서 옆구리 즉 배 부분은 채움과 욕구의 장소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 소원을 갖습니다.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래를 향하여 소원과 소망과 바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배를 창에 찔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바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라는 수평면상에서 어떤 소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의 수직상승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유일한 좋음이 되시고 유일한 보물이 되시며 유일한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세상에 대한 소원이나 바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소원이나 바람이 순간순간 생겨날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세상에서 크고 작은 소원을 갖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배를 창에 찔리셨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어 오버래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정확하게 포개질 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수평면상에서의 삼각관계 즉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삼각형의 한 꼭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관계의 모습이 역삼각형의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를 오버래핑하는 것은 예수님께 포개고 겹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사각형을 이루게 됩니다.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면체가 됩니다. 사면체가 되면서 이 세상에서는 없어지신 예수님의 몸 대신에 삶의 영역에서 내 몸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역사면체의 모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 몸이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땅에 내려오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서 오버래핑하여 포개짐으로써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사각형의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나의 몸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공생애 때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나갑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십자가의 예수님께 네 가지 포인트에 맞추어서 오버래핑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계신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을 장갑삼아 움직이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오셔서 움직여나가실 것입니다. 내 삶의 영역에 대해서는 우리 몸이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전 인류를 위한 사역을 행하셨지만, 우리의 몸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몸을 대신할 수 있으면 됩니다. 십자가 오버래핑과 본문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저녁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더욱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십자가 오버래핑을 통하여 역사면체의 모습을 가지고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가 예수님의 육신의 자리에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말하고 듣는 내용들이 실로 어마어마함에도 불구하고 쉽게도 말하고 쉽게도 듣고 있습니다. 말하고 듣는 말씀들의 진면목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게 하시고 천지개벽과도 같은 일들의 감동이 느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