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요한복음-2

녹취문: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 안식_태승철 (요한복음 5:9b~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04|조회수5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 안식>의 줄거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다 해도 괜찮은 상태입니다. 복음적인 안식 개념은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내 마음이 하나님과 사이에 아무도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는 관계를 이룬 상태입니다. 이 안식의 내용은 평강과 행복함입니다. 이제 안식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비로소 삶을 시작하면 됩니다.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 안식

(요한복음 5:9b~18)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 안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 안식”

유대인들이 안식일 때문에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논쟁을 일으키는 상황을 성경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안식일과 관련하여 우리 삶에서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고 그릇되고 있는 잘못된 점을 칼로 베어내듯이 지적하고 진리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구절은 17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이 놀랍고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유대종교는 지금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회당이나 우리의 예배당 혹은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은 안식일이나 주일이 아니라 안식 상태입니다. 안식은 안식일이나 주일뿐만 아니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유지되어야 하는 상태입니다. 시간적인 차원에서는 일주일 전체가 안식 상태가 지켜지는 안식일이어야 하고 주일이어야만 합니다. 공간적인 차원에서는 유대종교의 회당이나 개신교의 예배당 혹은 천주교의 성당뿐만 아니라 장소 불문하고 모든 곳에서 안식 상태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안식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안식일 규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미 안식에 이르렀고 안식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이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다 해도 괜찮습니다. 안식 상태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것은 옳고 합당하고 유익하며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로 묻는 과정이 현저하게 줄거나 아예 묻지 않고 행동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믿어지십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식은 모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해도 전혀 죄악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안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행하는 모든 일이 죄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 없이 행동하기 위해서는 안식을 먼저 취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의 내용은 평강과 행복함입니다. 안식 속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평강과 행복함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안식일이 무엇인지 최초의 안식일로 돌아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의 생애 첫 번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담은 첫 사람이기에 아담의 첫 번째 날은 인류의 첫 번째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조의 마지막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7일째 안식일은 아담의 의식이 깨어나 인간으로서 삶을 시작한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아담이 첫 번째로 만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로부터 안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이란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도 개입하거나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갖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 공백은 타락하기 전이나 타락 후에나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공백으로부터 마음의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채움을 위한 욕구이고 갈망입니다. 아담 또한 이런 마음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의 의식이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셨기에 마음의 목마름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안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갈 수 있고 안식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를 삶의 현장에서 최우선의 비중과 존재감으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최우선으로 의식할 때 우리의 마음은 독생자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독생자 안으로 들어간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마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야 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안식입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직접 하나님을 마주하는 안식의 상태였습니다. 안식을 첫 번째 날로 맞이하였고 그 상태를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을 직접 마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되고,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다른 관심사도 끼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담 생애의 첫 번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애의 첫 번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생애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아담의 생애 전체는 안식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 상태의 실제 내용은 평강과 행복함입니다. 이는 곧 평강과 행복함은 수고나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결과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태어난 첫 번째 날에 안식 속에서 평강과 행복함의 상태를 맞이했습니다. 이러한 안식이 주는 평강과 행복함은 죄악이 없는 삶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이 평강과 행복함이라는 토대 위에서 삶은 진행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평강과 행복함이 열심히 산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강과 행복함 속에서 삶이 출발되었기에 아담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중매를 통해서 결혼했던 아담과 하와는 각자가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은 안식의 상태에서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행복하려고 결혼한 것이 아니라 행복했기에 결혼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관계가 평강과 행복함의 안식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관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려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기에 결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안식을 유지하는 상태의 사람들은 행복하니까 직장 생활을 합니다. 행복하려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니까 돈과 관계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취미와 오락조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기뻐하려고 취미와 오락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기쁘기 때문에 취미와 오락도 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무조건 죄악입니다. 삶에서는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어떤 조건을 행복과 연관시키거나 묶는 것은 다 죄악입니다. 행복은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복한 상태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행복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이 행복을 지불할 수 있기 위해서 바로 안식의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의 삶은 행복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니라 행복을 지불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을 얻으려 하는 죄악 된 삶은 수고롭고 고되고 지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이 아담 생애의 첫 번째 날이었다는 것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첫 번째 날인 안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면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을 의식할 때에 나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마주하고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나도 하나님만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마주하게 되면 이로부터 평강과 행복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안식의 상태에서 무엇을 하든 삶의 토대이자 기초가 되어줍니다.

 

삶은 행복함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행복이 없는 상태에서 행복이 있는 상태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행복은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뒤에 이어지는 안식일 논쟁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렇듯 안식이 중요하기에 안식 없이는 생각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고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 상태에 도달했다면 무엇이든지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안식 상태만 유지될 수 있다면 내키는 대로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옳고 정당하고 유익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안식의 진정한 의미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만이 안식일의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러한 규정을 주신 이유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안식의 상태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다른 대상이 끼어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일이 잘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마음의 목마름이 일의 성취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나의 마음 사이에 일의 성취라는 대상이 끼어서 안식이 방해를 받게 된 상태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안식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주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과 관련하여 희한한 말씀을 하십니다.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음을 유지하는 인격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안식 상태였습니다.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이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안식이란 나의 마음과 아버지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그저 몸으로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안식 상태에서는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참으로 놀랍게도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있지 않으므로 아버지와 정식으로 연결이 되면 오히려 쉬지 않고 일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기어를 드라이브로 놓으면 엔진에서 발생되는 동력이 연결된 기어를 통해서 바퀴로 전달됩니다. 엔진이 꺼지지 않는 한 그 힘은 계속해서 바퀴로 전달되어 자동차를 움직입니다. 안식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는 곧 자동차의 엔진과 기어가 연결되듯이 나의 마음과 하나님이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이 이 땅에 살고있는 나에게 빠짐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안식은 연결입니다. 연결을 위해서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어떠한 대상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움직이시고 해나가시는 모든 일들이 땅에 살고 있는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처럼 대단한 일은 또 없습니다. 하나님을 엔진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 살고 있는 나의 몸과 지정의를 바퀴라고 생각한다면 안식 상태는 기어입니다. 안식 상태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의 몸과 지정의가 연결됩니다. 엔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바퀴인 나의 몸과 지정의를 통해서 나타나고 표현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후에 단 한순간도 일을 멈춰보신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에는 쉬지 않으셨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6일간의 창조 후에 7일째에 쉬셨다는 것은 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뒤에 곧바로 창조되어진 것들을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섭리와 주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이 섭리와 주권에 대해서는 잠시도 쉬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함께 안식일을 보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아담은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아담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에 안식을 설정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을 통해 아담의 몸과 지정의라는 바퀴가 하나님이라는 엔진에 연결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아담의 생애는 네 바퀴가 굴러가는 자동차처럼 하나님과 연결된 안식의 상태에서 몸과 지정의가 굴러가면서 삶이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 생애의 첫 번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주신 이유입니다.

사람은 장시간 일을 하면 지치기에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쉼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전적으로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안식 속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만을 마주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마주 대할 때에 평강과 행복함이 생겨납니다. 하나님만을 마주 대할 때에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마음에 의해서 지배되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몸과 지정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한 나도 일할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침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된 안식 상태에서 일을 할 때는 지침이 없습니다. 쉼 속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평강과 행복함과 휴식 속에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자력으로 살아가는 삶은 수고롭고 무겁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 이전의 상태로 복구되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에서 최우선 존재감으로 붙잡고 독생자 가지기를 하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서 하나님만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되면서 이 세상의 삶은 지침도 없고 수고로움도 없고 힘든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엔진에서 발생하는 힘에 연결된 채로 바퀴가 굴러가듯이 삶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바퀴는 아무리 달려도 스스로 힘듦을 느끼지 않습니다. 엔진에서 나오는 힘을 받아서 굴려지는 대로 굴러갑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네 바퀴입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마주 대하는 안식의 상태를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면 삶은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하나님에 의해 연결된 상태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한 나도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안식일이 주제인 맥락에서 보자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평강이 없고 행복하지 않은데 지정의를 움직이고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안식이 깨지는 이유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인가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 외에 무엇인가 담겼고 개입한 것입니다.

다만 마주 대해야 할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고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마음은 목마름이 발생하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 나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확인해보면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에서는 채워지고자 하는 갈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중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하나님만을 마주하고 있는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안식의 상태가 올바르게 되었을 때 평강과 행복함이 증거로 나타납니다. 이 평강과 행복함에 대해서는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깊이 다뤄보도록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마주 대함이 이루어지는 안식 상태에서는 평강과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 상태가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안식에서 출발하지 않은 모든 말과 행동은 다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안식의 상태는 이미 가진 행복을 지불하는 삶입니다. 반대로 말하고 행동함에서 행복이 지불되지 않고 행복을 찾아야만 하는 상태라면 이것이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평강과 행복감을 주는 안식이 더는 깨지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을 마주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독생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 이 세상 그 무엇도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안식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안식 상태에서만 무엇이든지 생각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이 안식의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행복이 지불되는 말이며 행복이 지불되는 행동입니다. 행복이 지불된다는 것은 곧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확증이기에 말과 행동은 올바른 것입니다. 안식 상태에서는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반대로 안식 상태가 아니어서 평강과 행복함이 없다면 한마디를 해도 죄악입니다. 이 평강과 행복감을 얻는 안식 상태는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도 어느 곳에서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독생자 예수님을 최우선적인 존재감으로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 예수님 의식하기를 지속함으로써 안식 상태에 들어가고 행복을 지불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자유롭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안식의 상태를 주셔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처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고백이 나의 삶의 내용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