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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오감과 마음 사이를 십자가로 끊어라_태승철 (요한복음 5:19~2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06|조회수8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감과 마음 사이를 십자가로 끊어라>의 줄거리: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렇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감과 마음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의식을 통해서 마음 까지 들어와 닿게 됨으로써 좋음과 싫음의 반응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과정이 누락 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감과 마음 사이를 십자가로 끊어라

(요한복음 5:19~29)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감과 마음 사이를 십자가로 끊어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감과 마음 사이를 십자가로 끊어라”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안식을 그저 일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던 유대종교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회사에서 부장님이 퇴근하지 않기에 과장인 나도 퇴근할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장님의 일과 과장인 나의 일이 별도의 것으로 따로 있는데 내 일은 끝났어도 부장님이 퇴근하지 않기에 나 역시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부장님과 퇴근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 계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연결이 안식의 핵심 내용입니다. 따라서 연결이 핵심인 안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아버지께서 움직이실 때는 예수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입니다. 연결이 곧 안식이기에 하나님께서 계속 일하시는 한 계속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안식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주신 근본적 이유는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 보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일에 대한 관심이 끼어들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연결은 불가능하기에 일단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연결에 있습니다. 연결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움직이시는 한 나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안식의 속성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에는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25절에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서 “죽은 자들”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천국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천국에 없다면 곧 죽은 자이고 멸망한 자입니다. 반대로 산 자는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재벌회장, 변호사, 대학총장과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에서 잘났어도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해 하늘에서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면 다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존재가 확인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이고 안식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흔히 몸이 죽으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안식은 살아있을 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마음을 천국으로 보내어 하나님과 연결되고 천국에서 존재가 확인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에서 존재가 확인될 수 없다면 그것이 진짜 죽은 자입니다. 안식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도 반드시 안식을 이루어 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에 도달한 사람들의 우선적 특징은 예수님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안식은 “뭐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통해 제시되는 안식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마음대로 다해도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안식은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고 연결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연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으로 옮겨오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참 역설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러한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는 삶을 살려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를 거쳐야만 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태를 거칠 때에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단순히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지니는 특성상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일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본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8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안식의 상태에서는 본다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다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의 내용이 드러납니다. 또한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안식의 상태에서는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이 보이지 않고 하늘만 보이게 됩니다. 반면에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하늘은 보이지 않고 세상만 보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상태의 특징은 세상이 안 보이고 하나님만 보입니다. 반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의 특징은 세상만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만 보는 상태일 때에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다 합니다. 세상을 보고 판단해서 반응하고 대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는 일마다 다 틀립니다. 반대로 안식에 들어가면 세상은 보이지 않고 하늘만 보입니다. 그런데 하늘만 보면서 세상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는데 하는 일마다 다 맞습니다. 이것이 안식의 특별함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창조 때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를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눈으로 보는 것들에 대해 마음에서 좋고 싫음의 느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본래 아담이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만 보시는 영역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무언가를 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담은 대상은 의식을 통하여 마음에 전달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는 좋고 싫음의 느낌이 생겨나게 되고 반응하게 됩니다. 이 과정 전체가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의식과 마음까지 동원될 때에 본다는 과정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보는 것들을 육체의 눈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보는 내용들이 의식을 통해 좋고 싫음을 느끼는 마음까지 전달되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보는 과정 전체가 완성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실제 삶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는 나무를 보면서 의식과 마음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향합니다. 나무는 눈에 담기지만 일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마음의 좋고 싫음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담는다고 보는 게 아닙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다는 표현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삶을 눈에 담을 수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의식과 마음이 눈으로 담은 것에 연결되는 봄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봄의 과정이 온전히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을 온전히 보고 계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특성이 바로 인간의 삶의 상황을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특성은 자기의 삶을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식과 마음으로 보아야 할 대상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마음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서 일어나야 될 일을 생각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나에게 지시하십니다. 이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보고있는 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 대해 적중하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직접 삶을 눈에 담고 의식을 통해 마음까지 도달하게 해서 좋고 싫음을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무조건 오류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눈이 밝아지게 된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봄의 과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담기만 했던 일들이 의식을 통하여 마음에 전달되고 좋고 싫음을 느끼게 되면서 봄의 과정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실 때에 타락한 인류와는 다른 봄의 과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 봄의 과정을 완성시키며 살아갈 때 예수님은 보고 들으며 담으시는 상태와 의식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써 잃었던 안식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세상에 대해서 보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대상들과 만나셨습니다. 베드로를 만나셨고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고 가룟 유다를 만나셨습니다. 또한 풍랑을 만나셨고 오병이어의 현장에 계셨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눈에 담고 귀에 담으셨지만 의식의 통로를 통해 마음에 전달되지 않았기에 스스로 좋고 나쁨의 판단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두고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마주하고 계십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눈에 담지만 의식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마음에 받아들이십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마주하신 베드로를 보시며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베드로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며 하시는 생각과 몸짓을 그대로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시므로 틀림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음에도 하시는 모든 일이 올바르고 진리일 수 있었습니다. 이 오감 전체에 이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안식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타락은 눈에 담기는 것들을 의식이 마음까지 전달해서 이 세상이 마음과 닿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의식과 마음이 분리되어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오감에 담기는 것들을 마음으로도 느끼며 좋고 싫음에 반응하고 판단을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끌려다니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르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이 세상을 담습니다. 타락한 상태에서는 의식이 깨어있으면서 눈으로 담은 세상을 마음으로 전달해줍니다. 그리고 마음은 좋고 싫음을 느끼며 반응합니다. 이것이 죄이고 모든 말과 행동이 오류로 나타나는 안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쉼이 없습니다. 오감에 담긴 대상들이 의식을 통해 마음에 전달되고 그것에 반응하며 사는 한 주어진 상황이 좋든 싫든 쉼이 없고 안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감이 세상을 담을 때에 마음과 오감 사이의 의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눈에 담기고 귀에 담기는 세상의 내용들은 마음에 전달되지 않고 끊어집니다. 세상이 끊어져야 안식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식 속에서 굳건하게 붙박이가 될수록 육체의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세상의 내용물들이 마음에 닿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똑같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오감과 마음이 끊어져 분리된 상태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데리고 올라가시고 나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내게서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내용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오감으로 세상을 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오감의 내용이 의식을 통해 마음에 전달되는 것을 십자가로 끊어내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감에는 끊임없이 세상이 담기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의식이 세상을 그대로 마음에 전달한다면 마음은 세상에 반응하느라 지치고 힘들고 괴롭습니다. 삶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으로 십자가로 붙잡으면 세상과 마음은 끊어집니다. 예수님처럼 오감과 마음의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으셨기에 이것을 하실 수 있었지만 타락한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함으로써만 오감과 마음을 분리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타락의 상태에서 오감은 세상이 마음에 들어오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닿게 된 마음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고 반응하는 동안 안식은 사라지게 됩니다. 즉, 오감은 마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주는 원인 제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의식에서 굳건하게 자리 잡고 오감과 마음이 끊어지게 되면 오감은 본연의 기능을 되찾게 됩니다. 십자가 안쪽에서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이 연결되어 안식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건너편에 있는 세상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몸으로 만나는 세상을 보시면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움직임은 그대로 나의 몸과 지정의에 나타나게 됩니다. 오감의 본연의 기능은 세상을 받아들여서 마음에 전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이 발사될 과녁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오감을 통해 세상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감을 통해 포착한 대상으로 하나님의 뜻이 발사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안식 속에 들어간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오감과 마음 사이를 이어주는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은 십자가 안쪽에서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도 괜찮은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계속해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관계하는 세상을 보고 계시기에 나는 세상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안 된다는 분들은 바로 이 단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의 내용들을 일단 눈에 담고 그것이 의식을 통해 마음까지 전달이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세상을 보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중에 십자가를 붙잡고 죽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에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십자가 생활화란 의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인데 이미 세상을 본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하니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는 이미 세상에 대한 느낌과 반응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오감에 담기는 세상을 마음과 분리시키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정석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이미 세상이 들어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에는 하나님만 닿아야 할 곳인데 세상이 닿게 되어서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청결이 유지될 수 없기에 하나님과 연결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통째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를 통하여 회복이 된 후에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생활화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하고 삶의 현장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붙잡는 과정이 동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에 정작 십자가를 잊고 세상으로 나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기분만 가지고 문 열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이 또 의식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아무리 기도 시간에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고 오감과 마음 사이를 가로막아야 합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놓친다면 오감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반드시 마음에 전달되고 안식은 깨지게 됩니다. 안식이 깨지면 평강과 행복함은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도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의식으로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감에 담기는 세상의 내용물이 마음에 전달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만 이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움직임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기에 하나도 틀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 어디서든지 이 단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오감과 마음을 끊어내고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으로 반응하는 봄의 완성 단계가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좋고 나쁨의 판단이 생기지 않기에 스스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시며 해야 할 말과 행동을 전달해주십니다. 그로부터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만 예수님이 누리시는 안식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 수 없다면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나타나는 상태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십자가를 단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감을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세상이 마음에 닿지 않기 위해서 의식으로 십자가 붙잡기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 안쪽에서는 마음의 안식이 이루어지고 십자가 건너편의 몸에서는 아버지의 행하심이 나타나는 완성된 안식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할 은혜를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와 연결되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나타날 수 있다는 안식의 최고 경지는 십자가를 잊지 않고 붙잡음으로써 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이 복음의 약속을 굳게 붙잡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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