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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_태승철 (요한복음 6: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10|조회수9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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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의 줄거리: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국민 한 명당 대통령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인 셈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임금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그 임금을 그 백성이 양식으로 먹습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배당된 임금을 날마다 먹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세상 바다 수면 위를 걷습니다.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

(요한복음 6:1~15)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

본문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의 의도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에 나오는 구절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구절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48절에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고 51절에서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에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이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들을 먹이신 오병이어 기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연결 구조는 앞서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뒤따라 나오는 안식일 논쟁과 연결이 되었던 바와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만 요한복음에만 특별히 나타나는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4절을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와 관련하여 유월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으시고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를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떡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으로 비유하신 것, 요한이 굳이 유월절을 강조한 것,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으나 예수님께서 거절하시고 홀로 산으로 들어가신 것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될 사실들입니다.

 

먼저 요한이 유월절을 오병이어 사건에 연결시킨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 명절이 가까웠다는 기록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유월절 명절을 예루살렘에 가서 지키는 것이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규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20세 이상 남자들은 몇 백만 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비해 예루살렘이 실제로 수용할 수 있었던 인원은 기껏해야 8만에서 12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기록을 보면 250만 명까지 모였다고 하는데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모일 수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20세 이상의 남자 전부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편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현장은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있는 벳새다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장면을 기록함에 있어서 굳이 유월절을 연결시킨 이유는 장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벳새다에서 유월절과 관련되어 진행할 수 있는 행사는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기적을 베푸실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유월절 행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이 굳이 유월절을 강조한 것은 출애굽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고 출애굽이 일어나게 됩니다. 유월절은 각 집집마다 일 년 된 어린 숫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사건입니다. 애굽 땅에 주의 사자가 임하여 모든 가정의 사람이든 짐승이든 첫 번째 태어난 것들을 죽이는 역사가 진행될 때에 일 년 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이신 사건입니다. 출애굽 때에 주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는 동안에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출애굽 사건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특별히 유월절과 연관시키면서 사람들이 먹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부각시킵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인 역사를 통하여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나머지를 열두 바구니에 걷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이 다른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조상들이 유월절에 어린양을 먹고 출애굽을 하였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각 사람이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한편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한 채 먹음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실지 아셨지만 먹음의 문제를 강조하시기 위해 빌립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이에 대한 빌립의 대답이 나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15만 원이라고 해보자면 이백 데나리온은 3,0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에는 그런 돈이 없었습니다. 결국 빌립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큰 무리 전체를 먹일 수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드레가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받아서 가지고 나옵니다. 참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질문하심으로써 큰 무리를 도저히 먹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를 통해서는 한 아이가 지참한 도시락을 가져다 내놓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이천 명은 되는 엄청난 무리였습니다. 그에 비해 주어진 것은 아이의 1인분 도시락이라는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31절 이후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만나를 언급하십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해서 광야에 나갔을 때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가 내려오는 경험을 합니다. 출애굽을 했던 250만 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의 만나가 한꺼번에 하늘에서 내려왔던 것입니다. 다만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인 무리를 먹일 수 있는 식량이 하늘에서 내려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1인분 도시락에서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두 사건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광야의 만나가 250만 명분의 만나가 한 솥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1인분의 도시락이 오천 개의 도시락으로 늘어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군중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임금 삼으면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의 식민지에서 나라가 독립하고 모두가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제목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백성 한 명당 임금 한 명이 배당되는 나라”를 바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수많은 백성과 한 명의 임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임금은 권력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며 백성은 그 혜택을 누립니다. 다만 이러한 관계에서 백성은 임금을 직접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임금의 통치가 잘 이루어질 때 주어지는 혜택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방식의 임금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곧 선민의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은 나의 왕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예수님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진 대상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나 회장님도 예수님보다 낮은 자입니다. 다만 이토록 높으신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방식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250만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임금 되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의 왕이십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예수님보다 더 높은 권세의 존재는 없고 더 큰 존재감의 대상은 없습니다. 교수라고 해도 총장님보다 예수님이 더 높아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가장 높으신 분으로 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 누구보다도 높으신 예수님이 나에게 임금 되는 방식은 나 한 사람을 위한 임금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온 것과 31절 이후에 나오는 만나 사건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은 무리의 왕이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구도 안에서 왕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왕이 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진 250만 명 분량의 만나가 아닌 안드레가 가져온 1인분의 도시락이 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1인분의 도시락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도시락입니다. 나에게도 1인분이고 옆 사람에게도 1인분입니다. 예수님은 임금이 되시되 각 사람에게 임금이 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리들의 임금, 백성들의 임금, 단체의 임금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하는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배당에 가면 목사님은 설교를 하고 교인들은 듣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관계에서 우리의 임금이 되고자 하시지 않습니다. 안드레가 가져온 1인용 도시락이 오천 개의 도시락으로 늘어난 것처럼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주어질 임금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단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상대하는 사람은 오천 명을 놓고 있어도 오천 명 각자와 오천 개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오천 명의 무리와 한 사람 지도자로 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바랐던 로마 식민지에서의 독립이라든지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이 잘살게 되는 것과 같은 바람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끌려질 것입니다.

나는 무리로써 예수님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우리 가정, 우리 단체에 속한 입장에서 예수님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임금 아래에는 군중이나 단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1인용 도시락으로 주어진 임금이십니다. 250만 명 분량의 만나가 한꺼번에 주어져서 그 속에서 내 몫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주어진 1인용 도시락이십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예수님 먹는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이어지는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임금으로 소개를 하고 있고 그렇게 주어지는 임금을 모든 사람이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옆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이 먹어야 될 1인분의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250만 명 분량은 무리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무리로써 관계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앞선 말씀에서 강조되었던 것이 “안식에 들어가기”였다면 오늘 본문에서 유월절과 연관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강조되는 것은 “세상에서 나오기”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와 세상에서 나오기는 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강조점을 달리하여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안식일과 연관하여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안식에 들어가기”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유월절과 연관된 오병이어의 기적은 “세상에서 나오기”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님을 임금으로 섬길 때 가능합니다. 다만 이 섬김은 무리가 아닌 나의 예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먹기 위해서는 절대로 옆 사람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입장에서는 단체도 없고 무리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오직 나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도시락이십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 힘이 생기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면 세상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서 나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식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오기는 오직 임금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임금은 내게 가장 높은 분이시고 가장 존재감이 큰 분입니다. 이처럼 임금이신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의식해야 될 대상입니다. 세상의 임금은 모든 신하들 위에 있기에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임금이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앞에 계십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계시는 임금이시고 나의 1인분 도시락이십니다.

 

예수님은 임금이십니다. 내가 직접 마주해야 될 나의 임금이십니다. 임금이시기에 예수님보다 먼저 의식해야 될 존재감의 대상은 없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의식하는 존재감의 임금이신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알고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먹는 방식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를 제일 먼저 의식하고 있다면 돈이 임금입니다. 자녀 문제를 제일 먼저 의식하고 있다면 자녀가 임금이고, 건강 문제를 제일 먼저 의식하고 있다면 건강이 임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임금이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는 방식은 나 개인에게 제일 높은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최고가 되십니다.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주어진 사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존재감의 크기가 다른 대상들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자 한다면 그 모든 대상들보다 예수님을 먼저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십자가 예수님을 먹을 때에 예수님은 나의 임금이 되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식하고 임금으로 섬기던 나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부인할 때에 예수님은 나의 임금이 되어주십니다.

이전 설교에서 안식일과 38년 된 병자를 연관하여 생각하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이 마음에 와닿는 상황까지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 부인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만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임금님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하여 그 임금님을 먹을 때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오는 유월절의 탈출 사건은 불가능하고 안식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의도에서 유월절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결시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한 아이의 1인분 도시락을 받아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리의 지도자로 오신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먹어야 할 나만의 도시락이시지만 모든 사람을 다 먹이고도 남으실 도시락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신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각자가 예수님과 직접 연결된 사람들 전체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계시고 교회라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 의식으로 제일 먼저 붙잡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으로 임금 된 예수님을 먹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오직 높은 분은 임금이신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임금이신 예수님과 직접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권면을 듣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조직과 체계를 만든 것처럼 교회는 조직일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의한 혜택을 누리려는 무리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직접 먹는 각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임금이 잘 다스려서 나타나는 혜택 속에 살려고 해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저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 조건을 좋게 해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건강하게 오래 살고, 돈을 잘 벌고, 형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먹는 사람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는 각 사람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을 직접 내 임금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교인이 백만 명이 있다면 예수님은 백만 명 각자에게 임금이 되어주십니다. 여기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은 임금의 통치력에 의한 혜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임금이신 예수님을 바라고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의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탈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임금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혜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신 예수님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임금을 가지고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 각자를 먹이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각자의 임금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세계 속에서의 혜택을 바라지 않게 하시고, 직접 삼위일체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날마다 먹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먹은 힘으로 이 세상을 탈출하는 진정한 영적 유월절이 이루어져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기다리시고 예비하신 안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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