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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세상에 빠지면 천국에서 빠진다_태승철 (요한복음 6:16~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11|조회수7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 빠지면 천국에서 빠진다>의 줄거리:

'빠지다'는 말은 빠져나오는 것과 빠져들어가는 것을 동시에 일컫습니다. 뒷골목 갱단에서 빠지기가 어렵고 사채 빚더미에서 빠지기가 어렵고 마약과 도박 술 담배 등 모든 중독에서 빠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빠지기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빠지고 천국에 빠지게 하시려고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상에 빠지면 천국에서 빠진다

(요한복음 6: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 빠지면 천국에서 빠진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 빠지면 천국에서 빠진다”

“빠지다”라는 단어에는 “빠져나오기”와 “빠져들어가기”의 뜻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나 있던 것이 없어지는 상태를 빠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장을 보러 갔는데 열무 사는 것을 빠뜨렸다.” 혹은 “도시락에 고기반찬이 빠져있다.”와 같은 표현을 쓸 때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한편 “웅덩이에 빠지다, 곤경에 빠지다, 유혹에 빠지다, 혼수상태에 빠지다”와 같은 표현을 쓸 때는 빠져들어가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상에 빠져들어가기”나 “천국에서 빠져나오기”라는 표현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천국은 살아있는 동안에 반드시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세상에 빠져있으면서 동시에 천국에 머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빠져들어가면 천국에서는 빠져나오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에 빠져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결코 둘을 병행할 수 없기에 양자택일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적이 아닌 표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는 떡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6장 전체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주제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도 떡에 관한 사건이었고 6장 나머지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이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과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6장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증거로 바다 위를 걷는 기적의 사건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얻는 방법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떡으로 먹는 것이고, 영생을 얻은 증거는 마음이 세상에 빠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표적이라 말씀하시는 의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은 겉으로 드러난 기이한 현상입니다. 한편 표적은 영적인 사실을 전하기 위해 드러난 기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적에 영적인 사실이 담기게 되면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에 담긴 영적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 각자가 자기에게 할당된 임금이신 예수님을 1인분 도시락처럼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유월절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하셨다는 기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대로 예수님께서 선민의 임금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임금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상의 임금들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들의 삶을 다스려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혜택을 먹고 누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제시하신 임금의 의미는 이와는 다릅니다. 각자가 1인분의 떡을 먹었듯이 각자가 임금이신 예수님 자신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비중과 존재감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있던 시절에 임금님을 마주하게 된다면 의식이 집중해야 될 대상은 임금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나의 임금으로 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임금이시기에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다스림으로 인해 주어지는 혜택이 아닙니다. 임금이시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의식하되 생명의 떡으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오천 명 각자가 1인분의 도시락을 받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여겨 최우선시하되 예수님을 내게 할당된 1인분의 도시락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임금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통해 제시되는 내용입니다. 세상에 빠져들어가면 하늘에서는 빠져나오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빠지지 않을 때 천국에서 나의 존재는 확인이 됩니다. 반면 세상에 빠진다면 천국에서 나의 존재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유월절의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을 하던 애굽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바로 이 세상의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도 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바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빠지지 않고 수면 위를 걸으십니다. 바다를 떠나지 않으나 바다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임금으로 여겨 최우선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임금이신 예수님을 내게 할당된 도시락으로 여겨서 먹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이 세상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의 수면 위를 걸으며 사는 인격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뒷골목 갱단에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사채를 쓴 사람은 빚더미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도박 등의 중독에 빠진 사람은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들은 어렵기는 해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예 빠져나오기가 불가능한 곳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세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빠져나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가장 쉬운 일로 만들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먹을 떡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든 채소를 먹든 곡식을 먹든 죽은 것을 먹습니다. 몸에 흡수되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생명의 떡으로 1인용 도시락이 되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예수님은 내가 최우선으로 의식해야만 하는 임금이십니다. 가장 우선적인 존재감의 대상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임금으로 의식하고 양식으로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먹는 것이 이 세상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출애굽이 세상에서의 탈출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죄란 계명과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근원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죄란 바로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태입니다. 죄가 이러하기에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살지만 빠지지 않고 수면 위를 걸으며 삽니다.

출애굽은 헬라어로 탈출이라는 뜻의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별세 즉 세상에 대한 탈출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출애굽 때에 아홉 가지 재앙이 일어났지만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초태생이 죽는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난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풀려나게 됩니다. 이 초태생이 죽는 재앙이 일어나는 중에 선민들이 한 일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서야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사건을 유월절과 연관을 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 고기를 먹고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어야 세상을 탈출할 수 있습니다.

 

앞서서 안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의 상태에서는 하나님만을 바라고 열망하게 됩니다. 반면에 마음이 이 세상에 생매장될 때에 안식은 깨어집니다. 마음이 세상에 생매장되어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기에 하늘은 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천국과 하나님은 비현실적인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은 오감으로 세상에 있는 것을 포착합니다. 가족, 재물, 건강, 회사 등 오감이 포착하는 동안에 의식은 오감으로 포착한 내용을 마음으로 전달해줍니다. 이제 마음에 세상 것이 와 닿으면 좋고 싫음의 느낌이 생기고 반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이 깨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고 세상에 묻힌 모습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묻힌 상태는 세상의 바다에 빠진 상태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오감과 의식의 단계를 통해 마음으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옵니다. 세상에 빠진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 쪽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식과 연관해서 나눈 내용은 오감에 포착된 세상이 의식을 통해 마음에 전달된다는 방향성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과 유월절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게 되면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오감이 세상을 포착하고, 의식이 그 세상을 마음에 전달하고, 마음이 세상에 묻혀버립니다. 이것이 안식이 깨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와 연관해서 마음이 세상의 바다에 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서는 이 방향이 반대입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안식이 의식을 통해 오감 쪽으로 나갑니다. 이러한 경우에 오감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맨홀 뚜껑과도 같습니다. 마음이 의식을 통해 세상의 맨홀인 오감의 구멍을 통하여 세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은 안식의 과정을 거꾸로 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우리의 마음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에 파묻혀서 올라올 줄을 모릅니다. 마음의 발목을 세상이 붙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파묻힌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와서 보시니 하늘로 올라가야 될 사람들의 마음이 전부 세상으로 내리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마가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자에게서 군대 귀신을 내쫓으셨던 사건과 닮았습니다. 그러자 군대 귀신은 이천 마리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언덕을 내리달아 갈릴리 바다로 빠져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갈릴리 바다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 될 인격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마음이 오감으로 포착한 세상을 의식하는 동안 세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돼지 떼가 내리달리듯이 세상을 향해 내리달아 빠져서 허우적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빠지게 되면 천국에서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천국에 살아있는 자로 인을 칠 텐데,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빠져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니 천국에서는 죽은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빠진다는 말이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관되어 이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진 상태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인 예수님을 의식이 먹음으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오감으로 접한 세상을 의식이 마음에 전달하면 마음은 세상으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가 생겼다고 해보겠습니다. 오감이 포착한 돈 문제를 의식이 마음으로 전달합니다. 그러면 돼지 떼가 언덕으로 내리달리는 것처럼 마음은 돈 문제를 향해 내리달리게 됩니다. 돈 문제를 보고 있는 오감의 맨홀 뚜껑을 뚫고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빠진 상태에서는 돈 문제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방법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상식선에서는 이렇게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세상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디자인하신 인간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걷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에는 천국에서는 죽은 자로 여겨질 뿐이지 결코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은 분으로 먹으면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임금이신 예수님을 항상 최우선 존재감의 대상으로 여기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우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임금보다 먼저 의식해야 되는 대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예수님을 먹으면 마음에는 하늘기운이 들어옵니다. 마음에 하늘기운이 들어오면 세상에 가라앉지 않게 됩니다. 마치 바람이 가득 찬 비치볼은 풍랑이 불어도 바다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을 의식이 먹으면 마음 안으로 하늘기운이 들어와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삶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생기고 건강 문제가 생기고 가족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온갖 문제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파도가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셨습니다. 의식이 예수님의 죽음을 계속 먹으면 마음에는 하늘기운이 들어옵니다. 마음에 바람이 가득 찬 비치볼이 되어서 어떤 문제의 파도가 밀려와도 빠지지 않습니다. 문제의 파도에 빠져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파도 위를 넘나들며 걸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에 담긴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나에게 할당된 임금으로 여기고 개인 도시락으로 여겨서 계속 먹을 때에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사람이 바다 위를 걷는 것도 처음 보았으며 심지어 풍랑이 크게 일고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크게 치고 있었으니 예수님은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 위를 걸어오셔야 했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으며 이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자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져보신 분들은 그 두려움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로 마음이 세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져들어가면 천국에서는 빠져나가게 됩니다. 천국에서 내 존재가 빠져나가게 되면 천국에서 결정된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도 하나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문제는 천국에서 결정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 빠져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빠지지 않을 때만 천국에서 이루기로 결정하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의 파도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이 있기에 그 뜻이 내려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문제에 파도에 빠져들면 하나님의 뜻은 내려올 수 없습니다. 오감이 포착한 것을 의식이 마음에 전달합니다. 그러면 하늘로 올라가야 할 마음은 돼지 떼가 언덕으로 내리달리듯이 오감이 포착하는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사람은 스스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여기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마음이 세상에 빠져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방법을 동원하지만 그것은 삶이 아니라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허우적대는 동안에 천국에서 나의 마음은 확인될 수 없기에 죽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하듯 마음이 세상에 빠지는 것을 무섭게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에서 생겨난 문제를 오감으로 접하고 의식으로 받아들여 마음에서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최우선으로 의식해야 할 대상은 임금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떡이자 양식이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먹을 때에 일렁이는 세상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삶은 중단되고 바다 수면을 걸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문제들에는 모두 하늘에서 정해진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을 때에 세상이라는 바다의 수면 위에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빠지는 것은 돼지 떼 이천 마리가 언덕을 내리달아 갈릴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갈릴리 바다를 걸으셨지만 제자들은 똑같은 갈릴리 바다에서 몸이 빠져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몸이 빠져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마음이 세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갈릴리 바다는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의 모든 일입니다. 배우자가 갈릴리 바다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갈릴리 바다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크고 작은 모든 대상이 나의 마음을 돼지 떼처럼 내리달려 빠지게 하는 바다이고 호수가 될 수 있습니다.

북구의 노르웨이나 스웨덴이나 핀란드에 가면 호수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방에 나의 마음을 빠지게 하는 위험한 호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마음은 가파른 언덕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듯이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호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재산이, 건강이, 회사의 일들이, 여러분의 마음이 빠져 죽을 수 있는 호수입니다. 나의 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세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떤 존재보다 우선시 돼야만 하는 임금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개인용 도시락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언제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하늘기운으로 마음을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먹은 마음은 절대로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영생 얻은 자의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셨는데 우리는 세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천국에서 죽은 자로 여김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개인 도시락이시고 임금이신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하늘기운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을 떠나지 않고도 세상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심으로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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