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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명의 떡 예수님 맛을 모르는 이유>의 줄거리:
세상에 있는 맛 중에 최고의 맛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맛입니다. 제아무리 복음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듣기만 하면 정말 지루한 동어 반복입니다. 그러나 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삶의 현장에서 진짜로 먹어보세요. 십자가 예수님 보다 더 맛있는 음식도, 더 듣기 기쁜 소리도 없게 됩니다. 이 예수님 맛을 모르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생명의 떡 예수님 맛을 모르는 이유
(요한복음 6:22~51)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생명의 떡 예수님 맛을 모르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생명의 떡 예수님 맛을 모르는 이유”
마지막 51절의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나의 죽음이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은 생명의 떡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며 영생을 얻게 하는 떡입니다.
이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항상 먹고 싶고 제일 맛있는 것은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가 이와 같으며 저 자신의 체험 또한 같습니다. 이 예수님 맛을 모르면 십자가 복음 말씀은 참으로 지루한 동어반복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 복음 말씀을 듣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먹는다면 예수님처럼 맛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맛을 알게 되면 십자가 복음을 반복해서 듣는 것처럼 달콤한 말씀이 달리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 복음 말씀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지 않는 것이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맛을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 이유가 이어지는 36~37절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올 수 없는 사람들은 오감을 통하여 밀려 들어오는 세상에 파묻혀 있거나 아니면 오감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세상에 빠져들어가 허우적대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맛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44~45절에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셔야만 예수님께로 올 수 있으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하셨고 이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45절에서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46절에서는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듣고 배우는 것은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예수님과 연합하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대하기 이전에 십자가까지 오는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하여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셔야만 예수님께 올 수 있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1절에서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스스로에게 고백하는 것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방식입니다. 먹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엇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혹은 십자가의 예수님께로 오든지 오지 않든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십자가의 예수님에게로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독생자 예수님이 죽으신 자리입니다. 이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를 나의 자리로 삼는 것이 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독생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위치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최종적인 자리는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내가 독생자의 자리에 들어섬으로써 나 역시 아버지의 자녀 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십자가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으시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택함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택한 사람에게 오셔서 속삭이십니다. “너는 십자가의 자리로 들어서라. 내가 너를 자녀로 삼고 싶기 때문에 너를 택했다. 네가 나의 진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자녀인 독생자의 자리로 들어서야 한다.”라고 택한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내 속에서 “십자가로 가라. 나의 독생자인 예수의 자리로 가라.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연합하라. 십자가의 예수를 생명의 떡으로 먹으라.”고 계속해서 속삭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속삭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에 들어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상에 아기들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자기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만약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처음부터 사람 대신 개가 돌보게 되었다면 아기는 개가 엄마인 줄 알 것입니다. 아기가 부모를 인지하는 것은 부모가 끊임없이 엄마이고 아빠임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부모가 엄마 아빠임을 가르쳐주기 전에는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가르쳐주셔야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의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나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46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너희가 하나님을 마주대하여 배움을 받지 않았으나 너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깨닫게 하신다. 그러한 사람만이 내게로 올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너는 나의 자녀다.”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증거는 십자가 예수님께 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리로 마련하신 곳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자리 잡고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자리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리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예수님에게 다가오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여겨 맛있어하고 날마다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여기지 않기에 전혀 맛을 모릅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사람 속에서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는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을 얻은 사람은 십자가만이 자기의 자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만이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자리 잡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을 먹으며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 십자가의 자리를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리로 알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십자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의 자리를 잡으셨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잡은 자리가 임금의 자리이니까 하나님께서 “너도 내 자녀다.”라고 속삭이실 때 우리도 임금의 자리로 들어가고자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으신 자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모든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십자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임금의 자리도 있고 대통령의 자리도 있고 고관대작의 자리도 있습니다. 아빠의 자리도 있고 엄마의 자리도 있고 자녀의 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리도 아닌 십자가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사람은 십자가로 오게 됩니다.
대통령에게도 하나님께서 “너는 내 자녀다.”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 사람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있지만 자기 자리를 대통령의 자리가 아닌 십자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똑같은 대통령이더라도 십자가를 자기 자리로 아는 사람이 있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이 “너는 내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가에 달렸습니다. 또 나는 자녀를 둔 부모일 수 있습니다. 부모라는 의식은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너는 내 자녀다.”라고 마음에 속삭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속삭이신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계속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면 이상하게 십자가로 끌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좋은 것이 전혀 없는 곳인데도 십자가로 끌립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겉으로 보기에 제일 하찮고 낮은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이 자리가 좋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꿀처럼 달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아무나 의식으로 붙잡고 생활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시지 않고 이끌어주시지 않는다면 십자가로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자녀다.”라고 가르쳐주시는 사람만이 십자가가 내 자리라는 것이 보입니다. 세상에 수천 수백만의 신분이 있고 자리가 있지만 오직 십자가만이 나에게 주어진 신분이고 나의 자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이 세상에 대하여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직도 피조의 세계에서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 많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의 체질 때문에 자꾸 마음은 세상에 반응하고자 합니다. 세상이 밀려 들어올 때마다 반응하며 좋고 싫음을 따집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은 세상에 파묻히게 됩니다. 또 자발적으로 세상이 좋아서 세상에 빠져 살고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 속의 죄의 체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세상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을 좋아해서 세상에 빠지려고 하는 마음을 붙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 자리뿐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을 의식으로 붙잡을 때 마음이 세상에 파묻히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세상에 뛰어 들어가 빠지려는 것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의 자리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해두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더는 세상에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자마자 나의 신분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됩니다. 자녀가 있다고 해서 엄마나 아빠인 것이 아니고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과장이나 부장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리이기에 이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십자가에 들어선 사람들의 생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신분과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내게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내게 두신 신분과 자리를 발화점으로 해서 요원의 불길처럼 관계들을 타고 번져나가게 됩니다.
나는 남편이지만 남편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주어진 하나님 자녀의 유일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보다 남편이라는 신분을 앞세우고 싶다면 하나님 자녀의 자리는 내놓아야 합니다. 한 아이의 아빠라는 신분을 앞세우고 싶고, 한 회사의 사장이라는 신분을 앞세우고 싶다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은 내놓아야만 합니다. 회사에서 나의 자리가 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서는 사장이라는 자리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리 중에 선택해야만 합니다. 회사에서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싶다면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회사에서 사장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확장하시기 위한 발화점이 됩니다. 내가 사장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내게 주신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의 출발점으로 내게 두신 자리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나의 자리로 삼을 때만 영생은 주어집니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에 의해 한 번 태어난 뒤로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영생과 영멸은 천국의 입장에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영생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 몸이 죽은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산다는 말을 달리 첨가해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생이나 영멸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주어지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존재가 천국에서 확인되지 않으면 영생이 아닌 영멸의 상태입니다. 이는 마치 회사나 대학에 지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면 그 회사나 대학의 영역에서는 나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이라는 국한된 장소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영원한 멸망인 영멸입니다. 반대로 천국에서 내 존재가 확인되는 상태가 영원한 생명인 영생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먹으면 나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 모두가 나의 존재를 천국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영생을 얻게 되면 인생도 얻게 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 주권의 발화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과 인생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9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먹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신 이유는 일과 가정을 돌보고 직장 생활을 하라 하심이 아닙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나를 살려두셨지 결코 내가 계획하고 원하는 내 일을 하라고 살려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먹기입니다. 내 일을 하려 할 때 인생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떡 먹기처럼 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왼쪽 다리를 바닥에 대고 비스듬히 누워서 떡을 먹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일은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원하는 일을 해나가는 것은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지옥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의 삶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승진하기를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직장생활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 직장에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어서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떡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누워서 떡 먹기로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의 신분에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됩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 어디서든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원하고 자녀의 유일한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일을 하면 나의 신분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은 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됩니다.
내가 행해야 될 하나님의 일은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셔야 될 일은 나의 신분에 주어진 모든 책임과 의무를 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워서 떡 먹기는 우리 인생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이십니다. 그 떡을 언제 어디서나 먹어야 하고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너는 내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없이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유일하게 할당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는 중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제일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좋은 맛을 얼마든지 먹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가르쳐주시지 않는 사람은 무슨 수로도 십자가를 먹어야 될 떡으로 알 수 없고 다가가야 할 유일한 자리로도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자리로 여길 수 있고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써 바라볼 수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너는 내 자녀다.”라고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속삭임이 없다면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있음은 아버지의 속삭임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간절한 속삭임을 따라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알게 하시고 그 떡 맛에 취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