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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_태승철 (요한복음 7:1~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18|조회수8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의 줄거리: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지상의 삶에 조금도 내가 바라는 대로 도움을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오직 내 마음을 끌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연쇄 과정을 따라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는 과제는 어떻게 지상의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가 하는 겁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

(요한복음 7:1~9)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고 예수님께서는 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두 내용에 유의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문법적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생이면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인데 어떻게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산다는 것일까요?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것은 모순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모순되어 보이는 복음의 내용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앞서 갈릴리에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갔다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바라던 그리스도이심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예수님의 목표가 그들의 바람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변화나 도움을 주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철저한 탈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으로 당신께서 최고로 좋다고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길을 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어떤 도움도 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떠나간 제자들과 똑같은 마음가짐을 예수님의 형제들도 갖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을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이들도 있었다고 표현한 것에서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들도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과 같은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 많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갈릴리 촌구석에 머물러 있음을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이들이 마리아의 배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직계 형제들조차도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밀착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에 “저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5절에서 이러한 모습을 두고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과 형제들이 믿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를 정의하면서 “자기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채움 거리로 주시는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최고로 좋은 대상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좋아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상 또한 하나님 아버지 한 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 삶에 대한 혜택이나 도움은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그리스도이셨기에 많은 제자들이 떠났고 형제들까지도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할 일은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육체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에서 마음이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바로 “어떻게 마음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마음 없이 사는 인생의 비결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간을 살아야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마음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시간을 잘 이해하고 시간을 잘 살게 되면 분명히 내 몸으로 이 세상을 살지만 하나님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전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내가 사는 내 인생에 대해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어주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내 인생은 없어집니다. 다만 여전히 살아있는 몸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은 때와 시간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때”는 시간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는 일과 연관해서 아직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이후의 10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 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막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 일과 연관해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 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구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 내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지만 내 마음을 둘 수 없다면 그것은 내 인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 몸으로 살고 있기에 내 인생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아무리 살아봐야 좋음도 싫음도 느끼지 못하기에 내 인생이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은 ‘때’ 즉, 시간에 달려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때’ 즉, 시간과 관련하여 세 가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세 가지 때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사는 법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ός)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기회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카이로스라는 신은 앞머리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뒷머리는 민머리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묘사는 기회의 특징에 기인합니다. 카이로스는 앞에서 다가올 때는 머리카락을 붙잡을 수 있지만 지나가고 나면 민머리이기 때문에 잡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회란 때를 맞춰 잡아야지 때를 놓치면 잡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의미에서 해석하자면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수직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타이밍을 말합니다.

한편 사도 요한이 사용하는 또 다른 시간의 표현으로써 크로노스(χρόνος)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달력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춘하추동이 변하고 일 년 열두 달이 지나가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차이를 천국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카이로스는 수직의 시간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계획이나 뜻이 수직 하강하여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이 땅에 개입하시는 시간입니다. 한편 크로노스는 달력의 시간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크로노스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5장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래되었다는 부분에서 사용된 시간의 개념이 크로노스입니다. 카이로스가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는 수직의 시간이라면, 크로노스는 사람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평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기록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간의 표현으로써 호라(ὥρα)가 있습니다. 호라가 사용된 대표적 용례는 앞서 보았던 2장 4절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때는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라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미래에 계획된 사건이 일어나는 특정한 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본문 6절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는 말씀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수직의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너희들의 수직의 시간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사람들은 오직 카이로스 수직의 시간으로 삶이 채워져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초막절이 다가온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초막절을 지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형제들은 초막절에는 사람이 많이 몰리니 그곳에서 표적을 행하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아직 하늘로부터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받지 못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유대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관습이고 풍습으로써의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별생각 없이 이러한 규정과 관습을 따라 초막절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 우선되어야 할 것은 유대사회의 규정이 아닌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시였습니다.

수직의 시간 카이로스는 사건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아직 없었던 일이나 상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건이 터지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크게는 사회적 관심을 일으키는 일들로부터 작게는 나의 말이나 행동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은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아갑니다. 언제나 지금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지시가 나를 통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말과 행동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지만 나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내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지시가 사건이 되는 것으로 삶이 채워져 나갑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고, 행동을 해도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 사람의 인생은 카이로스 즉 수직의 시간을 통하여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뜻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제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초막절을 지키고자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카이로스로 채워져야 될 인생의 시간들이 이미 준비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에 대해 아무 재량권이 없으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형제들은 말과 행동에 자기재량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직의 시간으로 채워져야 될 인생이 이미 자기의 재량권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과 행동을 사건으로 삼아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차이점을 드러내시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자기로부터 나오고 자기 안에서 정해진 뜻을 이루면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타락한 카이로스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하신 이유는 악함이란 바로 카이로스로 채워져야 될 인생의 내용들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스의 때는 지금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카이로스로 채워져야 될 인생의 시간들을 자기의 재량권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스스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로부터 나오는 사건들로 인생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함의 내용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은 족보 없는 말이고 행동일 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더 이상 스스로는 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카이스로의 때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께로 갔으니 인생에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다만 몸이 남아있기에 인생을 살긴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못 살게 된 상태에서 삶이 진행되는 방법이 바로 수직의 시간을 따라 인생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하고 행동 하나 하는 것을 내 뜻대로 하지 않습니다. 전부 수직의 시간을 따라서 위에서 결정된 하나님의 뜻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사건이 되고 성취가 되는 인생을 살아야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없는 사람은 족보 없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삽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결정한 적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해나갑니다. 이것은 곧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고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인생에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기는 살아야 하지만 마음이 없으니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으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도 관여하지 않기에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는 것이 이미 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 것들을 얻겠다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죄악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인간이니까 당연히 하는 것이라 여기며 살지만 실제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족보 없이 나와서는 안 되는 죄악일 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늘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말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 인생은 시간을 사는 것인데 이 시간은 수직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 즉 수평의 시간선상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미래는 앞이 아닌 위를 바라볼 때 만날 수 있습니다. 미래를 계획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미래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아래로 내려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통로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은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내려오는 통로입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붙잡고 있을 때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내려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고 있는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건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래란 땅에서 흐르는 수평의 시간에서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은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과정 끝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계획의 순서에 있는 미래의 일들이 그리스도의 보좌 우편 자리로 점점 다가와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 내려와 나에게서 실현됩니다. 이것이 위에서 내려오는 미래입니다.

이처럼 지상에서 앞을 볼 때 미래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위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미래에 있던 사건들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미래에 있던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때를 호라(ὥρα)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미래의 사건들 즉 호라의 시간들이 천국에 있는 예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옮겨옵니다. 그리고 승천, 부활, 십자가의 단계를 거꾸로 통하여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내게로 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노후 문제가 걱정됩니다. 이 경우에 노후 문제는 수평의 시간에서 앞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런데 노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마음은 위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나의 노후에 대한 계획도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일들이 땅에서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습니다. 내가 그 일들을 정확하게 카이로스의 때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앞을 보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위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의 계획에서 앞에 있던 일들이 카이로스 수직의 시간의 때가 되면 내려와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미래입니다. 우리의 모든 미래는 하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로스라고 하는 지금 이 시간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와 이루어지는 그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의 문제를 두고 카이로스를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규정된 법칙이나 관습대로 행동을 해나갑니다. 그럴 때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필요가 없고 찾을 필요도 없기에 하나님과 끊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8시까지 출근이 규정인 직장인이 있다면 이 규정을 따라 출근하여 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과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8시까지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는 규정에 대해서도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상태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출근 지시가 있습니다.

초막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형제들이 땅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각에 의해서 채워진 변질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살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의 규정을 따르신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 주어지는 지시를 따르고자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러나 형제들과 대화하실 때는 아직 카이로스에 대한 지시를 받지 못하셨기에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게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마음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좋음은 하늘에 닿아있는 상태에서 인생을 사는 방법은 카이로스 수직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것이 분명하다면 “더 이상 세상을 살 수 없다.”라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의식이 분명하고 또렷할수록 인생의 모든 시간들은 카이로스 수직의 시간으로 채워져 나가게 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겉으로는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살기는 수직의 시간을 통하여 사건들을 채워나감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오는 족보가 뚜렷한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 탈출이 명확해짐으로써 마음 없이 사는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인생으로 살기 위하여 내 인생의 모든 말과 행동이라는 사건들을 수직의 시간으로 채워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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