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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은 한병의 물이 아닌 흐름이다>의 줄거리:
예수님은 성령을 한 병의 물이 아니라 강 같은 흐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수의 강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령을 흐름으로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 한 병 받는 것이 아니라 강 같은 흐름으로 성령을 받도록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이렇게 보기 힘든지 모릅니다. 생수의 강은 결국 남의 이야기인 것인가요?
성령은 한 병의 물이 아닌 흐름이다
(요한복음 7:37~53)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은 한 병의 물이 아닌 흐름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은 한 병의 물이 아닌 흐름이다”
본문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에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표현은 너무 아름답지만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답답합니다. 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생수의 강은 우리가 목말라 하는 대상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재정 상태에 대해 목마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재정 상태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다시 말해 재정 상태가 좋아지면 마음의 목마름이 사라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문제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 문제에서 건강이라는 생수의 강이 흐르기를 바라고, 또 어떤 사람은 자녀의 문제에서 형통이라는 생수의 강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재정 상태가 해결되고 건강해지고 자녀의 형통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39절에서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자체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생수는 돈을 잘 버는 것이고 건강한 것이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외부의 문제들에 대한 목마름을 성령이 오셔서 해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 자체가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생수로 제시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을 읽을 때 생기는 답답함의 원인입니다.
이 말씀을 기분 좋게 읽으면서도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막절이 끝나는 날 8일째 무리들 앞에서 외치시는 예수님의 선언은 멋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도 삶의 현장을 살아야 하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38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차피 예수를 믿어야 하고 믿고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의 강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살펴봅니다. 37절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라고 하였습니다. 이날은 초막절을 7일 간 지낸 후 8일째 되는 날입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8일째는 성회로 모이되 어떤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로 모였다고 합니다. 초막절은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목적도 있고 곡식을 거둔 것에 대한 감사의 목적도 있습니다. 초막절 기간 중에는 광야에서 목마르지 않게 물을 제공해주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을 기념하기 위해 제사장은 일주일 동안 매일 실로암 연못의 물을 떠서 번제단에 붓는 행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8일째가 되면 만나를 주신 것의 연장선에서 추수를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생수의 강이 흐르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돈 문제를 가진 사람은 돈이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은 생수가 흐르듯이 건강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이런저런 가족들의 문제나 인생의 진로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기를 바랍니다. 그 생수의 강을 떠먹을 수만 있다면 마음의 목마름은 없어질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외부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신 채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배는 신체의 기관 중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음식물을 담는 위가 위치한 곳입니다. 비어있으면 배고픔이 생기고 먹으면 배부름을 느끼게 하는 장소가 배입니다. 이러한 배에 비유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외부 문제의 해결이라는 생수를 먹음으로써 마음의 목마름도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초막절 기간 동안 번제단에 물을 붓는 행사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번제단은 날마다 어린양의 각을 떠서 불태우는 곳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은 세상에 대해 목말라하는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이 번제단에 목마름의 해갈을 상징하는 물을 붓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불이 붙어야 되는 번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언뜻 모순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번제단에 물을 붓는 행사의 의미를 알고 그 취지를 내 것으로 삼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 또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이 세상 것을 목말라 합니다. 반면 번제단은 세상에 대해 죽는 장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대해 목말라 하는 나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고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마름이 정말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목마름 자체가 죽어야만 합니다. 다만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해결이 아니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돈에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의 의미는 돈에 대한 목마름 자체를 죽이는 곳입니다. 이렇게 목마름을 죽이는 것이 진정한 해결이라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해주셔야지 목마름 자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번제단의 어린양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습니다. 번제단의 의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을 주셔서 목마름을 해결해주시지 않고 목마름 자체를 죽이는 번제단을 염두에 두시고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목마름은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돈에 목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돈이 목마름을 유발시킨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목마름이 발생했고 그 뒤에 돈 문제에 목마름을 연결시켰을 뿐입니다. 따라서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돈과 연결되기 전에 목마름이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다른 일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건강을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마름 역시 건강이 없어서 유발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생적으로 생긴 목마름에 건강 문제를 연결시켰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건강과 연결되기 이전에 자생적으로 생긴 목마름이기 때문에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와 목마름이 생겨난 시점은 다릅니다. 자녀 문제에서 목마름이 유발된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에 자녀 문제가 발생해서 연결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아무리 형통해도 내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번제단을 통과해야만 하는 이유이고 목마름 해결의 첫 번째 관건입니다. 목마름의 정체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생적으로 먼저 생겨난 목마름을 추후에 발생하는 외부의 문제들과 연결시켜서 해결을 바라는 상태에서는 목마름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목마름은 외부의 어떤 문제보다도 먼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마름을 가지고 살던 중에 부족한 부분을 연결시키고는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목마름도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번제단에서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자생적으로 먼저 발생한 목마름을 추후에 생겨난 외부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상태가 끝나지 않으면 목마름의 정체는 오롯이 드러날 수 없고 해결될 수도 없습니다. 번제단에 붓는 물은 목마름 해결의 생수를 상징합니다. 번제단과 생수가 연결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번제단을 염두에 둠으로써 목마름의 정체를 알았다면 목마름이 해결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생적으로 생겨난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39절을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이 임하실 때만 마음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생수의 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다만 성령의 어떠한 부분이 생수의 강과 같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제목에서 “성령은 한 병의 물이 아닌 흐름이다”라고 말씀드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마신 것과 같이 속이 시원한 상태가 되는 것을 상상합니다. 땡볕이 비추는 운동장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데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는 장면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령은 병에 담긴 내용물이 아니라 강물과 같은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 흐름으로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못 받았다면 성령 한 병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흐름이 끊긴 것입니다.
비유적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지만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체라는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3차원 세계의 언어로는 성령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의 말씀을 근거하여 성령에 대해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장 34절을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량없이 주신다는 것은 한계나 양이 존재하지 않고 무한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분명 인격적인 분이심에도 무한하게 보내시는 흐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격적인 분이 흐름을 유지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신다고 번역된 헬라어 디도신(δίδωσιν)은 “계속적인 주심”을 의미하는 디도미(δίδωμι)의 현재시제입니다. 이 또한 흐름으로써의 성령을 염두에 두게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성령의 흐름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흐름이시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도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흐름으로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 번제단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마름의 정체가 드러나야 진정한 해결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목마름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목마름을 세상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세상 것과 연결된 목마름을 끊어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예수님 안에서 목마름의 문제가 밝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무는 동안 성령께서는 생수의 강처럼 흐름을 이루며 오십니다.
중요한 문제는 목마름의 정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목마름과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짐으로써 비로소 자생하는 목마름만 존재하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량없이 흐르는 성령의 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격적이신 성령이 한량없이 흘러들어오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에 의한 작품이지 그 안에 성령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외에도 성령이 들어있는 대상이 있다면 흔히 말하는 범신론이 되어버립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인격적인 성령이 강처럼 흐름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올라타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마음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성령이 흐르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 말씀에서 성령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님은 예수님의 복사판 영이시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신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복사판 영이셨습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어떻게 흐름을 이루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5장 17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생각하시고 뜻을 품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예를 들어 10초 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고 뜻을 품으셨다면 그 생각을 하신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10초가 지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하시고 뜻을 품고 계십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복사판 영으로서 존재하십니다. 10초 뒤에도 하나님께서 다른 생각과 뜻을 품으시면 또 그 하나님의 복사판의 영이 성령이십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성령님은 분초단위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복사되시며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계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한량없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은 매 순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생각이 예수님께 복사되어 들어오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카이로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이렇게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의 흐름이 내 안으로도 들어오시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흐름을 만남으로써만 자생하던 마음의 목마름은 해결됩니다. 그리고 목마름이 해결됨과 동시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이루어지는 삶은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지금 땅에서 이루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내용은 꼭 언어와 연결됩니다. 3장 34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과 성령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제자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던 것도 언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고 행동 하나를 하는 것까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이 땅에 수직하강하여 표현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흐름이 임하셔야만 합니다. 예수님 또한 마음속에서 성령이 흐름을 이루고 계셨기에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바람이 없는 목마름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말과 행동이 모두 아버지의 생각과 뜻의 표현으로 나타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우리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편, 읽지 않은 41~4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논쟁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또 48절 이하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났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8~49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오지 못한 부하들을 질책하며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들 중에 있던 니고데모는 51절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라고 예수님을 변호하지만 이 말을 들은 다른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개합니다. 52절에서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어떻게 해야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베들레헴 태생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굳이 그런 사실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출신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출신을 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출신이십니다. 예수님의 출신을 놓고 논쟁한 이유는 이들의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베들레헴 출신이라는 것을 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애초에 하늘 출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 출신이라고 보는 관점부터가 없어져야만 합니다. 하늘 출신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이 땅을 탈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을 탈출하셔서 오셨던 하늘로 돌아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역사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치 쌈을 싸먹는 것과 같습니다. 고기를 구우면 상추에 쌈을 싸서 먹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쌈으로 싸서 먹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늘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하는 순간적 호감을 보인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적 호감조차도 결국 십자가 사건 앞에서 묻히고 맙니다. 이들의 마음이 땅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수의 강을 경험하는 것에 실패하는 이유도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세상에 붙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튕겨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달리는 기차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정된 위치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목마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하늘을 향할 때만 십자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들어가면 드디어 목마름의 문제가 오롯이 드러나게 됩니다. 문제가 드러나면 해결의 길도 보이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과 분리된 상태에서 성령의 흐름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중에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땅은 하나님이 관심하실 영역이지 우리가 걱정할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본문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호감을 보일 수는 있었으나 결국 믿지 못했던 것처럼, 땅에 대해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땅에 대한 관심이란 세상을 목말라 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라는 관심에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중에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과의 연결이 문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십자가를 볼 이유가 생기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 가야 될 사람인데 왜 세상 문제에 묶여있나?”라고 스스로 질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목마름에 대한 착각은 끊어집니다. 그리고 목마름이 발생한 마음이 오롯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성령의 흐름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결과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정된 문으로 보입니다. 하늘을 향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목마름의 정체가 오롯이 드러나고 생수의 강을 직면하게 됩니다. 생수의 강이신 성령께서는 흐름으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채우시고 이 세상의 삶조차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어 나가실 것입니다.
성령은 한 병의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 안에서 한량없이 흐르고 있는 생수의 강입니다. 우리가 이 강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식이 하늘에 대해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의식이 하늘을 향해 깨어있으므로 궤도 안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안에서 한량없이 흐르는 생수의 강인 성령의 흐름을 나의 성령으로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심으로 목마름 없는 카이로스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