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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이유와 내용_태승철 (요한복음 8: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24|조회수8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이유와 내용>의 줄거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 내용을 말로 하셨다면, 그 사람들을 정죄하고 고발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 하시는 대신에 땅바닥에 쓰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여인의 음행이 문제인 상황에서 영적인 음행에 관한 것이었고요.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이유와 내용

(요한복음 8:1~11)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이유와 내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이유와 내용”

본문의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참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뒤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고 왜 쓰셨는가에 대해서 많은 추측을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에 바로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가에 대한 힌트가 있습니다. 본문은 앞장의 53절에 연결돼있는 내용입니다. 앞서 37~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같은 날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 목마름의 선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목마름의 선언과 음행 중에 붙잡힌 여인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목마름이라는 주제를 연장시켜서 음행 중에 붙잡힌 여인의 사건을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고 왜 쓰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것은 계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동안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내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 말씀하셨고 무한히 용서할 것을 말씀하셨으며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사형집행권은 오직 로마당국에만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돌로 쳐 죽이라 하신다면 로마에 대한 도전이었고 살인교사죄를 물을 수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죽이지 말라 하시면 그것은 모세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사특한 의도는 예수님께 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관점 자체가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이 사태가 궁금하여 몰려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점으로 이 상황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점에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음행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쓰신 것도 음행과 관계된 내용일 것입니다. 우리는 머리를 너무 많이 쓰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이 명료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음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보다는 7절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과도한 추측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다 적으셨고 가책을 느낀 사람들은 떠나갔다는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다만 목마름의 문제와 연결되어서 음행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서 음행에 관련된 내용을 쓰셨으리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또 자기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으시고 땅에 손가락으로 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심에 가책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을 말로 하셨다면 그것은 정죄가 되고 고발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방어기제가 있기 때문에 자기를 방어하려는 의식에서 반발하고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싸움이 생겼다면 예수님이 전하시고자 하신 진리는 가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죄하거나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멸망하기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미 충분히 고발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정죄하시거나 고발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낄만한 내용을 말 대신 땅에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스스로 가책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적중해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스스로를 돌아볼 계기로 삼아 그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왜 땅에 쓰셨는가를 알았으니 무엇을 쓰셨는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민의 역사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져있었고 유대인들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거나 앗수르에 의해 망하는 등의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께 범죄 한 결과라는 것을 배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타락과 부패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영적인 간음입니다. 선민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좋아해야 할 마음으로 다른 대상을 좋아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창녀 고멜과 결혼한 것은 신실한 남편이신 하나님과 창녀와 같은 선민의 관계를 비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다만 꼭 이러한 비유가 아니더라도 모든 선지자들은 선민의 영적인 간음을 질책하였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영적 간음과 목마름을 연결시킨 예언을 찾아보자면 예레미야서 2장 13절이 대표적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고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스스로 다른 웅덩이를 파서 물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알 숭배나 아세라 숭배와 같은 우상 숭배로 나타났습니다.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이 영적 간음을 행하는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목마름의 이야기가 본문의 영적 간음과 연결되면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목마름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때문에 생긴 목마름으로 다른 대상을 열망하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음행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가 있습니다. 선민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좋아서 숭배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쉽게 말해 선민들이 바랐던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고 하는 일마다 잘되어서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재물을 좋아하고 이 세상의 형통과 번영에 목말라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상태를 영적인 음행이라 고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영적인 음행에 대한 내용을 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 사건 현장에서 영적인 음행을 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음행의 현장에서 한 여인을 잡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음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영적인 음행에 대한 내막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체적 음행은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영적인 음행이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문안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영적인 간음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열매였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족과 직장과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것이 영적인 간음을 행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계명에서 금지하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음,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말, 탐심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현장에서 영적인 간음을 행하는 것을 기본바탕으로 하고 있는 범죄들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는 잡혀온 여인이나 잡아온 사람들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벼운 죄인이거나 죄가 없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일깨워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말로 하신다면 그들을 정죄하시고 고발하시는 것이 되기에 자기방어를 하려고 하는 본능이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고 진리는 왜곡되고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시고 땅에 손가락으로 음행의 문제에 대하여 쓰셨습니다. 잡혀온 사람이나 잡아온 사람이나 똑같은 처지에 있는 영적인 음행에 대해 쓰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마음의 찔림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애초에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답을 재촉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스스로 돌아보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죄인을 돌로 치는 일에 앞장 설 자격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해보라.”는 뜻입니다. “죄 없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마르테토스(ἀναμάρτητος)는 부정의 접두사 안(ἀν)과 표적에서 빗나감을 의미하는 하마르타노(ἁμαρτάνω)가 합쳐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간음에 대한 내용을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영적인 간음은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마음의 목마름을 다른 대상을 찾아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빗나감이고 죄입니다. 즉, 직역하자면 “너희 중에 빗나가지 않은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고, 풀어보자면 “너희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다른 것으로 마음의 기쁨을 삼으려는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육체의 음행을 저지른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곧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영적인 음행을 저지른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음행은 영적인 음행을 저질러서 생긴 결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잡혀온 여인이나 잡아온 사람들이나 똑같이 빗나간 영적인 음행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인과 같이 육체의 범죄를 행하지 않았을지라도 말과 행동조차 영적인 음행에 빠져있는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나오는 것들입니다. 설령 그것이 일상적인 말과 행동일지라도 영적인 음행에서 나오고 있는 것인 한 여인의 범죄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혀서 쓰십니다. 처음에는 영적인 음행 자체에 대해 쓰셨고 두 번째는 구체적으로 영적인 음행의 대상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지에 대해 쓰셨을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의 음행은 영적인 음행을 바탕으로 나타난 결과였지만 부모나 처자를 좋아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도 모두 다 영적인 음행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 모범 시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육체적으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똑같습니다. 근면하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좋아하는 모범 시민이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나 모두가 다 영적으로 간음하고 있는 바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모범 시민보다 더 죄인이 아니며, 모범 시민이 여인보다 더 의인도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죄를 목마름과 연결시킴으로써 죄가 곧 영적인 음행이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배신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목마름으로 다른 대상을 찾는 것이 죄입니다. 목마름을 다른 대상에게서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인 음행은 율법과 계명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적인 법에서 어긋나는 행동의 바탕이기도 합니다. 행여 법적으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영적인 음행의 상태는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죄로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모든 말과 행동이 여인의 죄와 똑같은 범죄가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 사건의 결론이 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범죄를 조장하시거나 격려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사람을 정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공통적 인격의 바탕인 영적 간음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로 정죄하지 않으셨듯이 이 여인 또한 말로 정죄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도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행동을 했든지 그 행동으로 인하여 새삼스럽게 죄인으로 정죄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척도를 따라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발버둥 치거나 남을 죄인으로 정죄를 해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을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라면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고 정죄한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모범 시민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과 종교인들, 이와는 반대로 조폭이나 마피아나 모든 종류의 흉악범들은 현저하게 구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양측 모두가 하나의 바탕을 공유하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생긴 마음의 목마름을 다른 대상으로 채우려는 영적 음행을 하는 중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영적 음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바탕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율법과 계명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지라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음행의 열매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악 된 인격의 바탕을 간과하신 것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 “그래도 좋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음행의 인격적 바탕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의 죗값을 예수님께서는 물먹는 하마처럼 흡수하셨습니다. 이 세상 인간의 모든 죄를 다 흡수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마음의 목마름을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에게 향하려고 하는 바탕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바탕이 죽지 않으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쉬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잠깐이라도 십자가를 놓치면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목마름은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는 상황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쉬지 않고 십자가를 보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목마름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열망하는 상태가 될 때 모든 말과 행동에서 범죄의 열매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방향을 우리의 목마름으로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열망의 속도가 더해짐으로써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속도를 따라잡아야 합니다. 기필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룸으로써 영적 음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범죄의 열매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시며 이러한 진실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의식이 어떤 상황이나 장소나 사건 앞에서도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께만 집중될 수 있게 은혜 위에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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