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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진리가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의식상태_태승철 (요한복음 8:33~5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1.29|조회수9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리가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의식상태>의 줄거리:

오래 살수록 손해라는 미친 느낌이 예수님 십자가 복음과 천국의 실제에 대한 참 믿음의 자기 증거입니다. 이런 느낌이 있으십니까? 이런 느낌을 내 믿음이 목표로 삼아본 적조차 없었으니 말할 것도 없겠지요. 지금 당장은 거리가 느껴지고 미친 것 같고, 좋게 보아 너무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이상한 느낌이 실제로 나의 일상이어야 합니다.

 

진리가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의식상태

(요한복음 8:33~59)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진리가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의식상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진리가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의식상태”

본문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31~32절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진리와 자유”라는 주제어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지난 시간에 이어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보자면 “오래 살수록 손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의 말씀이 미친 소리로 들린다면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반대되는 의식상태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살수록 손해인 것이 왜 진리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한 말씀을 점점 더 심화시켜 나가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천하에 상종할 수 없는 두 가지 인간의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이고 두 번째는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물론 유대인들도 필요한 물건을 구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을 상대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로 이방인들과는 개인적 대화나 식사자리를 갖지도 않았고 결혼을 하는 등의 교제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제의 금지는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귀신들린 사람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인식이 고정적으로 박혀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고 그 내용을 심화시켜 가실수록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으되 짐승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개로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교제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씀하시고 강조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상종할 수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앞선 7장 31절을 보면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리를 심화시켜 말씀하시자 이들은 금세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상종 못 할 부류로 취급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이러한 의식상태를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예수님을 비난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공경이라는 표현에서 이사야 29장 13절이 떠오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마음의 공백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마음으로 좋아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들이었습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리와 이론만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나 이론에 대한 공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 품으로 뛰어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마음으로 좋아하여 뛰어드는 대상은 세상 것들이면서 입으로만 생각으로만 하나님에 대해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신 공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공경이란 마음의 공백에서 발생하는 목마름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마음이 하나님 품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동안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공경이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공경이 이루어지는 의식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진리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미친 소리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심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욱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말씀을 일부러 그러시는 것처럼 해나가십니다.

 

51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해서 너희가 개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귀신들린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너희에게 미친 소리로 들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의식이 지킬 수 있다면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런 말을 듣자 유대인들은 더욱 분노합니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일상적으로 가지고 살던 생각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받아들이기는커녕 상종할 수 없다고 여겨 배척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입장이 달랐습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천국의 입장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은 천국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듣는 이들의 마음도 천국을 향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랬다면 “맞습니다! 타당합니다! 옳으십니다!”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천국을 향하지 않았고 여전히 세상의 입장에 서있기를 고집하였습니다.

죽음이란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에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이것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금년에 50만 명이 수능시험을 보았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중에 3,000명 정도가 중앙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앙대에 합격한 학생이 3,000명이라는 것은 그 외의 나머지 학생들은 중앙대 안에서 존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 중앙대에 합격한 학생 외에는 중앙대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음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천국을 기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진리의 말씀은 그 기준이 언제나 천국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국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준으로 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소리이지만 천국에 기준을 둔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천국에서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되리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가 있고 애인, 친구, 동료, 동창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천국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인지 생각해봅니다. 이들의 마음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로부터 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로 확인이 되고 있는 상태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마음은 의식이 향하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이들이 무엇을 의식하고 있는지를 보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존재가 확인된 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몇 사람이나 천국에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들의 소식이 매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언급되는 정치인들이 있으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앵커들이 있습니다. 후보들과 정치인들과 앵커들의 마음이 천국에서 존재가 확인되는 사람들일까요? 여러분께서도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는 시도를 해보실 수 있습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좀 더 확장해서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성인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듯이, 천국의 기준에서 육체가 죽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단계가 진행되는 것이고 통과의례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듯이 시간과 공간의 3차원 세계를 졸업하고 4차원의 세계로 진학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졸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4차원이라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을 두려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몸 자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마음이 천국으로 올라가서 존재를 알리고 머무는 사람들에게 육체의 죽음은 전혀 두렵게 느낄 일이 아닙니다. 죽음이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상실감 때문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린다는 느낌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 공백은 목마름이 쉬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을 채우기에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찾고자 합니다. 이것이 죽음이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와 연관됩니다. 사람은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좋은 것들이 없는 상태가 두려운 것이고 이것이 지나치면 허무함이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육체의 죽음이 큰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바탕에는 상실감이 있습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만나는 것들만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이라고 믿기에 육체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죽음으로써 마음을 채우지 못하게 됨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세상 것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상실감이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배우자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자가 죽는 것도 두렵고 내가 죽는 것도 두렵습니다.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으면 더는 배우자와 만날 수 없고 마음을 채울 수도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의 경우 배우자를 잃는 것이 슬프긴 하여도 두렵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과정을 통하여 이미 배우자가 마음의 채움 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마음의 채움 거리로 믿어지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없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상실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오감을 통해 세상을 접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몸이 죽으면 마음을 채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전부 세상에 있다고 믿기에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미쳤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내용이란 사람의 마음에서 유일하게 최고로 좋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좋으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진리는 두 번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결합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령님과의 인격적 연합을 포함한 세 번의 결합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굳이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면 성령은 선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결합이 이루어지면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지정의와 몸은 성령님과 결합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성령님의 장갑이 되어서 말하고 행동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으면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의식이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존재를 알리게 됩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신입생으로 존재가 증명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면 천국의 신입생으로 존재가 증명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의 말씀과 행동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한분만이 좋다는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육체의 죽음은 더 이상 상실의 계기가 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을 때에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육체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하게 좋으심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낸 사람은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이기에 육체의 죽음에 대해 상실감 또한 느끼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에는 육체가 죽지 않고 이 땅에 있는 것이 상실감의 원인이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미친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인이고 정상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의식상태에서는 오래 사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모두 몸으로 만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것들을 놔두고 죽을 수는 없으니 오래 사는 것을 좋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오래 살수록 손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을 때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 아버지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죽은 이후에는 마음이 온전히 하늘로 올라가기에 믿음이라는 과정도 필요 없습니다.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때에 믿음은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천국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직접 하나님을 갖는 것이 더 좋은 일임을 깨달았기에 오히려 오래 사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외면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취급하였듯이 예수님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와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불렀던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대놓고 개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고 귀신들렸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심 “저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오래 살수록 손해다.”라는 의도의 고백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1장 21~23절을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이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차선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몸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으레 오래 살면서 형통하다가 죽어서도 천국 가는 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진리를 아는 사람의 생각일 수 없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갖는 것이 최선이기에 당장이라도 몸을 벗어버리고 하늘로 가는 것이야말로 최선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살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제시됩니다. 23~24절을 보면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오래 사는 것은 손해라고 여겼던 바울이 육체의 삶을 이어가야 했던 이유는 바로 복음을 전해야 될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진리의 의식 상태를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진리의 말씀을 이어받고 적용하여서 육체의 죽음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육체가 오래 살면 살수록 손해라는 진리적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지키다”로 번역된 헬라어 테레오(τηρέω)는 “준수하다”라는 뜻 외에 “감시하여 보존하다, 구류하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의 준수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기 위하여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존하여야만 합니다. 보초가 한눈팔지 않고 망을 보고 감시하듯이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붙잡고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이 보존하고 지키고 붙잡고 있으면 영원히 천국에서 그 존재가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육체의 죽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보존할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3절에서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증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신 증인이십니다. 인류가 보지 못했던 천국을 보고 듣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좋으시고 그 아버지의 좋으심으로 가득 찬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이라는 것을 증언하셨습니다. 증언은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현장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에 대해 증언하셨는데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소리를 들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 재현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과 천국의 좋음에 마음이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 하지 말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뛰어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뛰어드는 길로 제시하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연합함으로써 하늘의 좋음에 대해 뛰어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이고 의식이 보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는 마음의 채움거리가 없으며 하늘에만 좋음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고 의식이 망을 보듯이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건 아니다. 오직 좋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라고 예수님께서 증언하셨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께 뛰어들기입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좋음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마음은 세상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에 머물게 되면 육체로 만나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좋음을 느낄 필요가 없어집니다. 육체가 죽어도 아무런 상실감이 주어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육체의 죽음은 과정이자 단계의 변화일 뿐입니다.

내게 가족과 이웃들이 있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살아있었던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빠져있는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나의 육체가 존재합니다. 나의 육체에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임하면서 해야 될 말과 행동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지금도 나를 살려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웃 사랑입니다. 나는 지금 하늘로 가는 것이 제일 좋기에 오래 사는 것이 손해입니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이유는 이웃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들에게서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먼저 죽든지 상관없이 영원한 하늘에서 영원히 같이 삽시다.”라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조금 더 빨리 가거나 조금 더 남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내가 먼저 죽든 배우자가 먼저 죽든 그 마음도 하늘에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먼저 하늘에 올라간 사람으로서 나를 살려두신 이유는 이웃 사랑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곧바로 “하늘로 가자”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마음을 하늘로 이끄는 방식은 지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천국을 곧바로 전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관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하면서 카이로스의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말과 행동을 해나가면 됩니다. 죽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아직도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오래 사는 만큼 손해 보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는 의식상태가 우리에게는 일상의 의식상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우리 앞에 펼쳐놓으신 진리의 말씀이 증언임을 알았습니다. 이 증언이 재현하는 천국의 좋음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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