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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개의 눈, 뭉치면 죽고 나뉘면 산다>의 줄거리:
사람에게는 세 개의 눈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는 육체의 눈이 있고 속으로 보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눈은 대부분 육체의 눈이 보고 있는 것이나, 육체의 눈이 볼 수 있는 것들에 의식과 마음의 눈이 뭉쳐서 따라 다닙니다. 이것이 안 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눈이 보는 그 것이 바로 우리에게 신이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눈, 뭉치면 죽고 나뉘면 산다
(요한복음 9:35~41)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 개의 눈, 뭉치면 죽고 나뉘면 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 개의 눈, 뭉치면 죽고 나뉘면 산다”
사람의 인격에는 세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먼저 겉으로 보는 육체의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보는 눈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존재를 의식하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의식에서 일어나는 있음의 느낌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좋음의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육체의 눈은 겉으로 봅니다. 그리고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속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세 개의 눈과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으로 보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겉으로 보는 육체의 눈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육체의 눈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으며 본래 뭉쳐 다녀서도 안 됩니다. 속으로 보는 눈은 겉으로 보는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합니다.
이 자유가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한다는 말은 보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에 상사를 의식합니다. 양가가 인사하는 자리에서 시어머니 될 분을 의식합니다. 이것이 의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의식의 눈은 육체의 눈과는 완전히 다른 대상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을 의식합니다. 지금 같은 현장에 없는 경우에도 의식하는 상대는 육체의 눈으로 보는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의식의 눈이 육체의 눈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가장 좋게 여깁니다. 흔히 말해 돈에 눈을 뜬 상태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만 생기면 명품을 사들입니다. 이 경우는 명품에 눈을 뜬 상태입니다. 도박에 눈을 뜨는 경우처럼 마음의 눈뜸은 나쁜 일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취미활동에 있어서도 낚시에 눈을 떴다는 식으로 말하고는 합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 역시 마음의 눈이 육체의 눈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3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선 3장 17절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씀과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가리키는 심판의 내용은 다릅니다. 3장 17절에서 말하는 심판은 온 인류가 지옥행 사형수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지옥행 사형수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인류가 가진 지옥행 사형수라는 신분이 바뀌고 정죄됨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행 사형수임에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죄에 대한 죗값을 물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옥행 사형수들에게 주어졌던 구원의 기회를 말살하신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39절의 하반부를 보면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는 자들과 보지 못하는 자들을 구분하시는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봄은 당연히 육체의 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을 계기로 본다는 단어를 통해 의식과 마음에 관련된 영적인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사람의 인격에는 세 개의 눈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눈은 이 세상에 있는 물리적인 대상들을 봅니다. 간단히 말해 겉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속으로 보는 두 종류의 눈이 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라는 속으로 보는 시력에 집중하셔서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를 구분하고 계십니다. 겉으로 보는 육체의 시각장애는 삶에 큰 고충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영원한 멸망 혹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합니다.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를 가르는 것은 속으로 보는 의식의 시각과 마음의 시각입니다.
예전에 기독교계에서 유명했던 사진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눈이 내린 땅을 찍었는데 군데군데 눈이 녹은 모습이 마치 예수님의 얼굴 형상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고 금세 예수님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디가 예수님 같은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진 자체에는 별다른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그것이 영원히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반드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속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있습니다. 영생에 관련된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속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을 사느냐 혹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을 사느냐가 결정됩니다. 속으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고치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보던 사람들을 시각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리시겠는 의미가 아닙니다. 봄이란 겉이 아닌 속의 시력입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염두에 둘 때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천국의 있음과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천국의 좋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한다면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돈이 아닌 하나님을 열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의식과 마음의 눈이 뜬 상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열망하지 않고 돈을 열망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식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의 본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의식하거나 있음을 느끼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이 의식의 눈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있음과 천국의 있음을 보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또한 좋음을 확신하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을 보기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의 본래 용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본래 용도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75억 인구 중에서 누구도 스스로 의식의 눈으로 하나님과 천국의 있음을 보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국의 기준에서 볼 때 이러한 사람들은 맹인입니다. 천국의 있음과 좋음도 모르고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도 모르는 눈이 먼 맹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있음을 느끼는 의식의 눈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의 눈의 본래 용도는 하나님과 천국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육체의 눈과는 시선의 방향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눈에 보이는 대상을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도 같이 바라보는 것은 잘못된 상태입니다. 당장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세상이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이는 대상이 의식의 눈과 마음에 눈에도 보인다는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 신격화가 일어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까지 결정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주권자이심을 믿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의식해야 될 대상은 명확합니다. 임금님에게는 신하들이 있습니다. 어전에서 신하들은 임금님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하가 임금님을 수발드는 내시가 잘 생겼다고 내시를 쳐다보고 있었다면 임금님은 무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졌고,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눈으로 임금님을 바라보지 않고도 임금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임금님처럼 의식한다면 반역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육체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도 의식할 수 있고 마음으로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며, 내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며,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의식해야될 첫 번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채워지고자 하는 마음의 열망이 작용하고 있는 동안에 그 열망의 대상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함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하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눈으로 배우자를 마주하는 동안에도 의식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의 눈이 육체의 눈을 따라 배우자를 향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눈이 먼 것입니다. 속으로 보는 눈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배우자로부터 무엇인가 기대를 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고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 마음의 눈이 먼 상태입니다. 배우자를 의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현장을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배우자에게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맹인이 된 상태입니다. 육체적인 시각장애는 행복과 영생과 축복과 은혜에 있어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분들의 삶의 고충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육체의 눈을 따라가는 것이 문제인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오히려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은혜를 위하여 유리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삼아 삶의 구체적 상황을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에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을 본래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대체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매로 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삶에 적용해봅니다. 부부관계에 적용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배우자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가 됩니다. 회사에서 사장님과 마주하는 상황에 적용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사장님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가 됩니다. 이처럼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일상적으로 고정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렇게 눈이 밝아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이전에는 세상에 대해서는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밝히 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탄이 개입하며 “왜 세상에 대해 어두운 상태로 살아가느냐? 세상에 대해 눈 뜨게 해주겠다.”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도박에 눈을 뜨고, 돈에 눈을 뜨듯이 세상에 대해 눈 뜨기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지음 받은 것이기에 세상에 대해 눈을 뜰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의식하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에 대해 마음을 쓰셔야 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의식과 하나님의 마음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언제 어디서나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깨어있고 세상에 대해서는 시각장애인 상태에 있는 것이 합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상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이 없었고 무엇이 있거나 없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그동안 깜깜했던 세상이 밝히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본래 용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세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일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상태가 모든 인류에게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였다면 건강이 안 좋다고 해도 그것을 의식하고 나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의식하고 좋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이 좋다는 확신을 유지할 뿐입니다. 좋음에 대한 확신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돈에 눈이 떴다는 것은 곧 돈이 좋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그렇게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세상에 대해 눈이 밝아졌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전제 하에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천국이 있고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또한 그 천국의 좋음과 하나님의 유일하게 좋으심을 알리셨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보지 못함에 대해서 답답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내가 못 보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좋다고 말씀하시는 천국과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는 상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문제 앞에서는 돈을 의식하게 되고 직장에서는 상사를 의식하게 됩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를 의식의 시각장애인이고 마음의 시각장애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좋음의 확신을 거둘 수가 없어서 자꾸 세상 것을 바라보게 되고, 좋다고 선포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천국과 하나님을 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이와는 반대로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이들은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보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천국과 하나님을 보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에 의식의 눈과 마음이 눈이 따라가는 것을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 개의 눈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은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의 기준이 아주 낮아진 상태였습니다. 남녀관계에서 “눈이 높다” 혹은 “눈이 낮다”는 표현이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경우 스스로 본다고 생각했고 전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75억 명을 대표로 내세운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도록 만들어 놓은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육체의 눈이 보는 것을 의식하고 마음으로 좋다고 확신하며 따라가서 뭉치는 바람에 보는 눈의 수준이 땅바닥에 내쳐질 정도로 낮은 상태였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보아야 될 의식의 눈과 하나님의 좋음을 느껴야 될 마음의 눈으로 돈을 향한다면 눈이 낮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내동댕이친 상태입니다.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육체의 눈과 뭉쳐 다니면 수준이 낮아집니다. 양아치들이 동네를 누비고 다니듯이 세상을 누비고 다니지만 기껏해야 양아치 수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렇게 눈이 낮아지다 못해 땅에 내동댕이친 상태였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이끌려져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수준의 낮은 눈으로 스스로의 삶을 생각하면서 의식하고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이 낮아지고 형편없는 수준의 삶을 사는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을 내동댕이치고 있는 것이 현재 인간이 처해있는 눈먼 상황입니다. 이렇게 눈먼 자들을 눈뜨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받아들여지고 수긍되고, 하나님의 있음이 교리와 이론으로 믿어진다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삶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돈 문제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삶의 현장에서 느껴지지 않고 안보이고 잊히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시각장애인 체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눈을 가린 다음에 지팡이를 하나 주고 일상생활을 해봅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버스도 타보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주문해봅니다. 이렇게 체험하는 동안 교육관이 따라다닙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답답할지 체험을 안 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체험기를 보면 더욱 절절합니다. 눈을 가렸으니 손의 감각과 소리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버스를 타려고 해도 정류장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려고 해도 어디가 카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교육관이 위치를 알려주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분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교리와 이론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육체의 눈이 바라보는 대상이 먼저 보이게 됩니다. 배우자를 앞에 두고, 자녀를 앞에 두고, 다른 일들을 앞에 두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놓치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확신이 흐려져서 자꾸 세상 것을 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유일한 좋음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다면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을 소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 눈먼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이 눈이 멀었고 마음의 눈이 멀어서 여전히 육체의 눈이 보는 것들에 따라다니고 뭉쳐 다니고자 하였습니다. 마치 양아치라도 된 듯이 세 개의 눈이 똘똘 뭉쳐서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태를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아치 같은 상황, 눈이 낮아진 상황을 답답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다 팽개치고 신나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영원히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보지 못하게 끝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에서 천국과 하나님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일어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눈으로 볼 수 있기에 의식하기도 쉽습니다.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은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세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맹인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식과 하나님의 마음이 그 삶을 책임져 가실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눈을 뜨고 세상에 대해 맹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서는 맹인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밝히 뜬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상태를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임으로 봄의 방향이 역전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을 향해 밝히 떠져 있는 속으로 보는 눈이 맹인이 되게 하시고 그동안 천국을 향해 맹인이었던 눈이 밝히 떠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