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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만나도 서로 통하진 않는 사람>의 줄거리:
서로 통하는 점이 있어야 만남과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한 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서로 통합니다. 동병상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서로 통합니다. 관심과 취미가 같아서 서로 통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우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나는 어떤 점에서 서로 통할까요?
예수님 만나도 서로 통하진 않는 사람
(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만나도 서로 통하진 않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만나도 서로 통하진 않는 사람”
예수님을 만났지만 서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났다고 해서 진정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경위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하는 점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그저 만나서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과 만나봐야 통하는 것이 없는데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어딘지를 물어보고 아는 동네라면 그것만으로도 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사자성어가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통한다는 것입니다. 관심과 취미가 같으면 서로 통합니다. 통하는 것이 없으면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통함이 없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은 불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과 진정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남녀노소, 나라와 종족과 문화의 차이, 신분의 차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는 무관합니다. 그야말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만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말을 자주 쓰지만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만났는가에 대해서는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있다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좋습니다. 문제는 만남 이후입니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나게 되었다면 효과는 파격적입니다.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고백했다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만남의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다만 그 만남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아닐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의 만남이 인생에 파격적인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은 파격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예배당을 중심으로 여러 활동을 하고, 삶의 스타일을 변화시켰는데도 전혀 파격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없기에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는 양자 간의 통로입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그것이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로를 통해서 오고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고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게 여겨져 받아들여지는 것이 통함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서로 통하는 바가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은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을 거듭해서 보여줍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결국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통하는 바를 찾지 못했기에 관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요한복음의 의도대로 보자면 이 만남이 전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대다수는 통하는 바를 찾지 못했기에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 사정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예수님과의 사이에 어떤 점이 통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 대답을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당시의 목자가 양을 치던 풍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정한 행위가 목자와 강도를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자는 목자이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대비시키심으로써 참 목자의 정체성을 밝히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목자들은 낮에 양을 데리고 나가 흩어져서 풀을 먹입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양을 한 우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여러 목자의 양들이 같은 우리에서 밤을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지키기 위한 문지기를 따로 세우게 됩니다. 이 문지기는 밤새도록 양떼를 지키다가 아침이 되어 목자들이 오면 우리의 문을 열어줍니다. 이제 우리로 들어간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서 양들을 모읍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모이기 시작하면 목자는 계속 소리를 내며 양들을 몰고 나갑니다.
이러한 비유가 중심이 되어있는 10장 전체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들 중에서 자기의 양으로 구분하여 부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양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의 양 되기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일어나는 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이 예수님의 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과의 관계는 만남 이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양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26~27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는 참 특이한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한 상식과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양들인 사람의 관계는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집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제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대화가 오고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의 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0장 말씀을 보자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상식적 절차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비유된 목자와 양의 관계는 만남을 통해 시작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이미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여러 양들이 섞여있는 가운데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들만이 목자에게로 모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오직 예수님의 양들로 정해진 자들만이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들이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활동을 본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이미 예수님의 양으로 정해진 자들만이 예수님께로 나오고 따르게 됩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큰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역만리 떨어진 외국과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떨어진 천국에서 이 땅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만나신 사람들 중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도록 정해두신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에서 이끌어 가시는 목자라면 목자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들은 양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 양들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를 양들을 정해놓으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들을 이끄실 예수님을 목자로 보내셨습니다. 양과 목자가 이역만리 떨어진 땅에서 서로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양자가 서로 만나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하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낯선 외국에서 말이 통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고향이 한국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잘 통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보내지셨고 세상을 탈출하여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가 하늘이셨기에 예수님과 통하기 위해서는 관심사가 하늘이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과 만나더라도 관계로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 때문에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인 우리가 서로 통하고 만남은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만남은 불발로 끝나고 맙니다. 이러한 만남은 결국 하늘이라는 요소가 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늘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가 나거나 맛을 볼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전혀 포착이 불가능한 하늘을 공통점으로 삼을 수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도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일평생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예수님과 전혀 통하는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통하는 바가 없다면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통하는 바가 없다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에도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통해야 될 내용은 바로 하늘입니다. 하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한순간도 예외 없이 우리의 의식으로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좋음을 느껴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람은 의식으로 포착한 대상 중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 존재감을 의식해야 마음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땅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냄 받으신 분으로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고 다시 세상을 탈출하여 오셨던 하늘로 돌아가시는 것을 과제로 삼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통하는 바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하늘입니다. 하늘에 대한 관심이란 곧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 천국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느낌입니다.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시시각각 하나님과 하늘에 대한 있음과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온전히 하나님과 하늘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말씀을 통해 이론과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유일하게 좋으심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과 통하는 관계가 시작됩니다.
지난 주일에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껴야 할 곳은 세상과 격리된 예배당이나 기도원이 아닙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충만하게 느꼈다면 세상에 나와 살 때도 의식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대상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어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존재감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이론과 생각으로라도 하나님의 있음을 최우선으로 의식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예수님과 통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상 것들의 있음을 우선시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진학 문제, 취직 문제, 승진 문제, 배우자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의식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만났지만 통하는 부분이 없었기에 관계로 발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배우자나 자녀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당장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생각과 이론으로라도 기억하며 십자가를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님과 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통하지 않으면 만남은 불발이 되어버립니다. 통하는 것이 있어야 관계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예수님과의 공통점은 하늘 이외는 없습니다. 다만 이 하늘이라는 공통점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적을 보이셨고 진심을 담아 지혜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적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제가 통하는 것이 없어서 답답함을 크게 느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영락교회 사택에 살던 시절에 산책을 나갔다가 일본인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을 때입니다. 일본인 아주머니를 만난 경험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침에 새벽기도가 끝나고 남산에서 산책하던 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인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는데 이분들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시는데 한국말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일본말을 모릅니다. 그래서 더듬거리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는데 영어도 안 통합니다.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으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다른 의미에서 답답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국어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해서 영어를 알면서도 영어로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합니다. 웬만하면 영어를 알고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던 독일인의 경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알아들으면서도 대답을 안 해주니 무척 답답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타향입니다. 이 타향인 세상에서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관심사는 천국뿐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을 관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보다 천국의 있음이 더 우선적인 의식의 대상이 될 때 예수님과 통할 수 있습니다. 언어에 공통점이 없었기에 일본인 아주머니들과 대화가 통할 수 없었던 것처럼, 세상 것들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공통점이 없기에 전혀 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식하면서도 통할 수 있는 사람은 목자가 아닌 절도며 강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예수님의 양들조차도 절도와 강도들에게 납치되듯이 세상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양들을 부르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놓는다는 말은 강제로 바깥으로 내던진다는 의미입니다. 내던져서라도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가실 때에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변수를 주셔서 강압적으로라도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십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늘의 있음과 좋음,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을 향하여 눈뜨도록 이론과 생각으로라도 십자가를 붙잡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자들은 예수님의 양입니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끼리 통하는 것처럼 예수님과 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어떠하든지 예수님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있음과 좋음 사이에 있더라도 의식과 마음에서는 하늘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첫 번째 대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통할 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목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고 싶으시다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루어진 만남은 불발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늘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입니다. 이것이 이론으로라도 받아들여질 때 세상 것들에 대한 있음과 좋음에 끌려다니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 되고 온전히 예수님과 통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수십 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만났어도 통함이 없었기에 만남은 관계를 이룰 수 없었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주는 파격적 효과들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과의 유일한 공통점인 하늘 아버지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과 불통의 이유가 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극복되게 하셔서 목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통하는 양들로서 삶의 현장에서 인도받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