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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참 좋음’이 내게 위험천만인 이유_태승철 (요한복음 10:11~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2.13|조회수5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 좋음'이 내게 위험천만인 이유>의 줄거리:

참 좋음이 내게 가장 위험합니다. 참 좋음을 가지면 극도로 이타적인 성향을 띠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모습이 보이는데도 이기적이기만 하고 이타성이 안 보인다면 분명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참 좋음이 아니고 가짜 좋음입니다. 참 좋음을 가지면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이타적으로 되려고 하기에 자기 보존에는 가짜 좋음이 제격이지요.

 

‘참 좋음’이 내게 위험천만인 이유

(요한복음 10:11~21)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참 좋음’이 내게 위험천만인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참 좋음’이 내게 위험천만인 이유”

안전하기로는 참 좋음보다 가짜 좋음이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참 좋음을 가지면 위험천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힘이 생깁니다.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참 좋음을 가지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마음이 참 좋음으로 채워지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참 좋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나타나는 기운이 있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나타나고 밥을 먹으면 밥 기운이 나타나듯이 참 좋음에서는 이타적인 성향이라는 기운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굉장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기쁨, 즐거움, 행복, 만족, 감사 등의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이타적인 성향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가진 것이 진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이타적 성향이 나타나는데 위험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좋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극단적 이타심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좋음의 기운이기에 정말 가져도 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에 하나님께 좋은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진짜 좋은 것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진짜 좋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벌자, 하나님 부자가 되자, 하나님과 친해지자는 이야기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반복하여 해왔습니다. 그런데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을 실제로 가지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고, 하나님과 친해졌을 때 생기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때에는 이타적 성향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면 될수록 이타적 성향은 극단적으로 표출됩니다. 극단적 이타심은 자기 목숨을 이용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려는 성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린 참 좋음이 내게 위험한 이유입니다. 다만 이타적 성향은 그저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극단적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극단적 자유를 누리기에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자면 나를 보존한다는 목적에서는 진짜 좋음보다는 가짜 좋음이 훨씬 안전하고 유리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타적 성향을 갖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가짜 좋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 좋음에서 비롯되는 이타적 성향 또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가짜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예수님께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버리는 일은 선함이라는 특성을 띠게 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함이란 진짜 좋음을 가진 상태입니다. 진짜 좋음을 가져서 선하게 되면 목숨을 버리는 이타적 성향까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함을 의미하는 헬라어 칼로스(καλός)는 선하다는 뜻 외에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좋음이라는 뜻에서 사용된 용례가 더 많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선함이란 타인을 위하여 의로운 호의를 갖는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의로움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상태가 의로움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함이란 타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보시기에 올바른 호의를 갖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상대에 대한 호의는 마냥 옳은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내 딴에는 올바르게 여겨지는 일일지라도 타인에게 있어서는 옳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호의가 진심이지만 선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올바름이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기준으로 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올바름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타인에 대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올바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올바르지 않은 호의는 설령 진심일지라도 선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올바르지 않은 호의는 오지랖일 뿐입니다.

호의가 오지랖이 되는 경우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호의만 있고 선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닌 오지랖입니다. 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만 나타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올바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올바름을 따라 타인에 대한 올바른 호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함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올바른 호의를 타인에게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목자로서 예수님의 선하심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양들에 대해 올바른 호의를 갖고 계십니다. 양들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진짜 좋음이 되시는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곧 양들에게 좋음이 되는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좋음을 가지고 계시기에 좋은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마음 채움을 위해 좋은 것이 필요할 때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충분한 좋음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일체 되셨던 예수님의 유일한 좋음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좋음을 양들에게도 주시고자 하시기에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갖고 계신 진짜 좋음을 양들에게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양들에게도 진짜 좋음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함이 목숨을 버림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왜 목숨을 버려야 좋음을 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좋음의 특성은 이타심 즉 타인지향성입니다. 그렇기에 안전을 위해서는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좋은 것으로 마음이 채워진 사람은 극단적인 타인지향성을 갖게 됩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선함이란 진짜 좋음을 가진 상태이며 진짜 좋음을 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선한 선생은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선한 아내는 남편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선한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이렇듯 진짜 좋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목숨조차 남을 위해 쓰고자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목숨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진짜 좋음을 갖는 것입니다. 진짜 좋음을 가질 때에 목숨까지 버리는 이타심을 감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시작하면서 진짜 좋은 것은 함부로 가질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반면에 가짜 좋음을 가질 때에 일어나는 일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일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이기적이 됩니다. 이기적이 되는 이유는 세상 것을 향한 목마름은 더 커지지만 목숨을 위해서는 안전한 상태가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돈이 정말 좋은 것이라면 돈을 많이 가진 재벌 회장들의 마음은 항시 행복과 만족과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또한 좋음의 특성은 반드시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이타적 성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가 양들에게 좋음을 나눠주고자 하셨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돈이 진짜 좋은 것이라면 재벌 회장들은 기쁘고 만족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삶을 살고, 또한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못해 안달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심지어 돈을 나눠주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고자 할 것입니다. 돈이 진짜 좋음이라면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한편 이렇게 보자면 선함에는 모순이 존재하게 됩니다. 진짜 좋음을 가질 때에는 그로부터 나타나는 기운이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돌듯이 진짜 좋음을 가지면 이타적 성향이라는 기운이 나타나게 됩니다.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음의 대상이 돈이라면 나눠줄수록 나의 몫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돈이 없어지면 좋음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기에 나눠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모순이 생기기에 돈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이 진짜 좋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갖고 계셨습니다. 진짜 좋음에서는 이타적 성향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 선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호의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남에게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갖고 계셨기에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눌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욕심쟁이라서 하나님을 주시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목숨까지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주실 때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좋으심은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승천하게 하셔서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것이 좋음의 특성이기에 세상 것을 좋아하는 죄인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면 이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돌듯이, 진짜 좋음을 가지면 진짜 좋음의 기운으로 이타심이 나타납니다. 이타적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이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종교 안에서 횡횡하는 대표적인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나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많이 도울 수도 있으며 봉사하고 충성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생각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 말에 “아멘!”을 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하나님이 아닌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이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해 줍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돈을 많이 벌고 가진 사람은 있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좋음으로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셔서 돈을 많이 두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을 진짜 좋음으로 생각하는 중에 바라는 대로 돈을 많이 벌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 두 경우는 같을 수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절대로 이타적 마음의 성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돈을 쓸 수 없습니다. 예배당에 헌금 많이 하겠다는 약속대로 실제로 헌금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가지면 가질수록 기쁨을 느낍니다. 자기 계좌에 돈이 쌓이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를 위해 돈을 써서 좋은 물건들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돈이 부족합니다. 재벌들도 돈이 부족합니다. 몇 조의 개인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에는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예배당에 나온다고 해서 절대로 하나님 일에 돈을 많이 쓰고자 하지 않습니다. 타인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기부를 한다고 해도 장사를 위한 기부입니다. 기부한 만큼 유형무형의 대가가 올 것을 기대하고 사용하는 돈입니다. 재벌이 문화 사업을 할 때는 명목상 사회공헌을 내걸지만 결국 기업의 이미지 확보를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 이미지가 높아지는 만큼 매출상승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서도 이타적으로 쓰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제로 부자가 헌금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부자의 헌금은 십중팔구는 체면치레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헌금도 대가를 바라는 장사가 됩니다. 반대로 돈이 없어서 돈으로는 기뻐하려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헌금을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 기부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을 넣는 과부와 부자들의 헌금을 비교하시면서 마가복음 12장 43절에서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나님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많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웃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종교 안에서는 여전히 이 거짓말이 통하고 있습니다.

가짜 좋음은 가지면 가질수록 이기적인 기운이 강해질 뿐입니다. 가짜 좋음이 가짜인 이유는 실제로 가져도 기대한 만큼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조급함이 생기고 더 많이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가져보지만 그래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반복될 뿐입니다. 재벌들이 몇 조씩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자들의 모든 기부나 헌신은 다 장삿속입니다. 기부나 헌신이라는 방편을 통해 사용된 돈이 결국 더 커져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투자할 뿐입니다. 예배당에서도 헌금을 투자로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돈 좋아하는 자신을 고꾸라뜨리고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좋아하는 나를 자꾸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구원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12~13절에서 삯꾼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가짜 좋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음 안에 진짜 좋음이 없는 삯꾼입니다. 진짜 좋음이 없기 때문에 좋음을 찾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양을 이용하여 좋음을 찾으려고 합니다. 삯꾼이 양들에게 붙어서 얻으려고 하는 좋음은 삯입니다. 월급이고 임금입니다. 그런데 이리가 다가올 때는 좋음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은 더 이상 좋음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양을 필요 없다고 여겨서 버리는 삯꾼의 마음은 이기적입니다. 가짜 좋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절대적 이기심입니다. 자기를 보존하기에 급급해서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이기심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심은 큰 차원에서 보자면 이타심보다 더 큰 위험입니다. 천국에 마음이 올라가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구원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가지는 방법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자이고 세상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우선해서 느껴야 할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있는 분이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십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늘에서 존재가 확인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가짜 좋음을 추구하느라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의식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존재가 확인될 수 없는 것은 죽음의 상태입니다.

15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아시고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는 것은 결합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안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로서 삯꾼과는 다르게 진짜 좋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좋음을 양들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좋음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결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짜 좋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짜 좋음을 받기 위해서는 가짜 좋음을 좋아하던 상태가 죽어야만 합니다. 가짜 좋음을 추구하는 상태가 죽어야 진짜 좋음을 갖고 계신 예수님과 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죽음의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삯꾼은 진짜 좋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좋음을 찾느라 양에게 온 자가 삯꾼입니다. 다만 양과 목자의 관계에서만 삯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진짜 좋음이 없는 상태에서 배우자를 대면할 때에 서로에게 삯꾼이 됩니다. 배우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삯꾼의 상태입니다. 받으려 하는 종의 삶을 사는 삯꾼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좋음을 가진 부모는 진짜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이타적 성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좋음을 갖지 못해서 마음이 채워지지 못한 부모는 자녀로부터 떨어지는 콩고물로 마음을 채우려는 삯꾼이 됩니다.

이 삯꾼들은 궁극적으로는 버리는 자들입니다. 배우자도 마음에서 버리고 자녀도 마음에서 버리게 됩니다. 삯꾼 부모는 자녀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기대하지만 그것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합니다. 혈연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녀를 곁에 두기는 하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해버립니다. 사랑은 자기 속에 진짜 좋은 것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좋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눠주고자 하는 이타적 마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녀를 통해서 떨어지는 콩고물만을 기대하고 있으나 자녀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에 끝내는 자녀를 버리게 됩니다. 기대도 하지 않고 이타심도 갖지 않는 무관심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갖지 못한 모든 부모는 결국 자녀를 버리게 됩니다. 자녀를 애지중지하는 부모가 많은 것 같아도 마음을 채우고자 콩고물을 기다리는 삯꾼으로서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뿐입니다. 진짜 좋음을 가질 수 없다면 진짜 부모다울 수도 없습니다. 진짜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가 가진 진짜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이타심을 보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진짜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배우자를 향하여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짜 좋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짜 좋음을 가지지 못했는데 이타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부 삯꾼이 될 뿐입니다.

삯꾼과 연관 지어서 설교를 하는 입장에서도 자가진단을 해볼 수 있습니다. 돈 문제나 건강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돈 많이 벌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라고 상황에 맞추는 설교를 한다면 완전한 삯꾼입니다. 성도들의 형편에 맞추어진 설교는 호의적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설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필요한 것을 설교로 맞추어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타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좋음을 가진 설교자가 이타적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설교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예수님을 죽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완전히 거부할 가능성까지 생각할 때 이타적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 또한 이러한 이타적 관점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비단 설교자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부부관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배우자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합니다. 이때 배우자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자의 반응에 상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진정으로 선하고 이타적이셨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호의적 반응을 기대하고서는 절대 선할 수도 없고 이타적일 수도 없습니다. 진짜 좋음을 가졌다면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올바르다고 여기시는 대로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어갈 뿐입니다.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을 기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나눠주신 진짜 좋음을 따라 살아가는 양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신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십자가의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여 예수님의 선함을 고스란히 받아 누리게 하시고 그 선함 속에 있는 좋음으로 가득차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극단적 이타심으로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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