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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생 좋아하고 멸망 싫어함도 실력이다>의 줄거리:
왜 영생이 좋지도 않고 멸망이 싫지도 않을까요? 물론 좋아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영생이 좋다면 더는 좋은 다른 것을 찾고 바라게 되지를 않지요. 멸망이 진짜 싫다면 그렇게 멸망 받을 상황을 삶에서 지속할 수가 없지요. 왜 그럴까요? 아직도 그리스도 믿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생 좋아하고 멸망 싫어함도 실력이다
(요한복음 10:22~29)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생 좋아하고 멸망 싫어함도 실력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생 좋아하고 멸망 싫어함도 실력이다”
영생을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멸망을 싫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것에 실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영생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멸망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론적 차원에서 영생을 좋아하고 멸망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론적 수긍을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론적 수긍은 인격적 고백이 아닙니다. 영생의 좋음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 알고 있다면 일상의 삶에서 영생의 좋음이 반영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월급이 올라서 좋아하는 사람은 얼굴과 생각과 말과 태도에 그 좋음이 반영됩니다. 영생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영생의 좋음을 체감한다면 일상의 삶에서 반영되어야 합니다. 영생의 좋음이 반영되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멸망을 싫어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에 대한 싫음이 이론적 수긍이 아닌 인격적 고백으로 나타난다면 삶에서 멸망하는 일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멸망을 싫어하고 이에 대해 수긍하지만 실제로는 멸망이 어느 정도로 무서운지는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좋음이 반영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법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영생이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이론적으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상에 갇혀있는 중입니다. 그랬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4차원 천국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오직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되는 상태가 영생입니다. 그리고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만을 느끼는 영생의 상태에서는 삶에도 영생이 반영되게 됩니다. 배우자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심지어 거울로 몸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영생을 얻은 사람이고 영생이 삶에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돈 문제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낄 수 있다면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어떻게 되더라도 3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4차원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진다면 삶에 영생이 반영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멸망을 무섭고 지긋지긋하게 여길 수 없다면 정말로 영생을 좋아하고 멸망을 싫어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여기서 멸망은 영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은 한 번 태어난 뒤로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은 특정한 장소에서 나의 있음이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특정한 장소는 바로 4차원의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멸망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75억 인류 대부분은 천국에서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 멸망의 상태입니다. 단지 3차원에 갇혀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육체가 죽기 전에 영생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여지는 있습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4차원의 천국을 느끼지 못한 채 3차원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격의 핵심인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천국에서 그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 멸망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을 강조하고 반복하심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실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계시던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께서는 평화시장에서 의류도매로 새벽장사를 하셨습니다. 평생을 꼭두새벽에 나가 일하신 끝에 큰돈을 버셨고 평창동에 대궐 같은 저택을 지으셨습니다. 자녀들도 해외유학까지 다녀와서 사회적으로도 자리를 잡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말기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목사님을 따라 심방을 다녀온 후 목사님께서 집사님이 울고불고 통곡하시던 모습을 사무실 직원들에게 전하자 다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평생 휴가 한번 없이 애쓰던 모습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녀들도 잘 키워놓고 좋은 집 지어 놓고 살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좋음의 상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말기 암 진단은 그 좋음의 상태로부터 소멸되어야 한다는 통보였습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사실 앞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멸망의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멸망은 비로소 싫고 두려운 일이 됩니다. 멸망을 이야기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계셨던 분으로서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상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주할 멸망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천국의 좋음을 아시는 분으로서 멸망을 이야기하셨고 그 끔찍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서 죽기를 자처하셨습니다.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싫은 상황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멸망이 아닌 영전이고 개선이고 해방이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없어지는 것 또한 단순한 이동이고 변화일 뿐이지 멸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멸망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멸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감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익히 알고 계시는 빛의 세계이고 영의 세계인 4차원의 천국을 염두에 두시고 멸망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4차원 천국의 좋음을 알고 계셨기에 그 천국에서 소멸되는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3차원 공간으로부터만 소멸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천국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주시려는 영생의 좋음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천국에서 내 존재가 지금 소멸되어 있는 상태가 무서운 줄 알아야합니다. 그럴 때 영생 얻었음을 느끼고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멸망이 천국에서 존재가 소멸되는 것임도 몰랐기에 멸망을 무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천국의 좋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곳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변화이고 이동이듯이 사람들은 천국을 그런 정도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대해 이론으로는 좋다고 알고 있지만 실감해본 적이 없었기에 멸망을 싫어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좋음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셔서 천국에서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의 체험으로 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빛이 예수님을 투과해서 나타나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집니다. 마가복음 9장 5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말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좋게 여겼던 베드로가 무엇을 무서워하였던 것일까요? 진짜 좋음을 알았기에 그 좋음으로부터 자신이 소멸되는 것을 무서워하였던 것입니다.
“꿈이라면 깨지 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이 너무 좋을 때, 로또에 당첨된 것이 너무 좋을 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음이 느껴질 때 무서움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좋음을 느낌과 동시에 세상에서는 느낀 적이 없었던 무서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좋음은 3차원인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좋음의 특징은 이 세상 좋음을 완전히 망각시키는 것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영생의 상태에서는 세상의 좋음을 완전히 망각하게 됩니다. 천국의 좋음과 세상의 좋음을 비교조차 할 수 없기에 세상은 잊히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면 “천국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데 그동안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살았는가? 수제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앞세워 3차원의 세상 안에서 이루어질 일들만 좋아하였으니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하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면 세상의 좋음을 좋아했던 것이 배설물을 좋아했던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다행히도 천국의 좋음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의 좋음과 비교했을 때에 배설물과 같은 세상 것을 좋아했던 자기를 부끄러워하지도 못할 정도로 세상은 까맣게 잊히게 됩니다. 그런 상태의 영생을 받은 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삶에는 영생의 모습이 반영됩니다. 삶에 영생이 반영되지 않는다면 영생의 좋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부터 지옥으로 가는 모든 영혼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천국으로부터 소멸되어 멸망의 상태로 들어가는 영혼들의 눈에는 천국의 좋음이 보입니다. 살아서 보이지 않던 천국의 좋음이 죽어서 지옥에 가서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좋은 천국으로부터 자신이 소멸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평창동에 대궐 같은 집을 지으셨던 집사님께서는 말기 암 진단에 마음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3차원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좋음의 상황으로부터 소멸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천국의 좋음을 볼 수 있었다면 3차원의 세상에서 느꼈던 좋음의 상황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 세상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에 천국에 올라간 사람이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천국의 좋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 땅의 것들을 좋다고 여겨서 갖고 싶어 했던 그 모습이 정말로 배설물에 침 흘리는 것과 다름없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자녀들이 형통하고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함포고복 하는 세월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상태일지라도 천국의 좋음에 비하면 깡그리 망각돼 버릴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천국의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본문 22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수전절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수전절은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왕이 이스라엘을 정복해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할 때에 유다 마카비가 주동이 되어서 전쟁을 일으키고 성전을 회복하여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렇듯 적의 손으로부터 성전을 회복한 역사를 기념하는 수전절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도록 약속되었던 그리스도가 맞는지 밝혀 달라고 종용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로부터 성전을 회복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로마 식민지의 조국을 회복시키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는 인물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의혹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들어올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이 당신에게 달라붙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드러내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5~2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이 이제까지 말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말과 행동으로 증언해도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목자와 양의 관계를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양과 목자의 관계가 아니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랐던 그리스도는 목자가 아닌 해결사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상 안에서 우리가 바라고 있는 목표를 향하여 앞서가시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3차원의 세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3차원의 세상에서 빠져나가 4차원의 천국으로 각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오셨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를 기준에 놓으면 내가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지 아닌지를 정확히 측정해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3차원의 세상 안에서 도달하고 싶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목자이고 나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를 앞설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푸른 초장을 목표이자 바람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양이 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양들만이 그리스도를 목자로 믿을 수 있습니다. 양들은 3차원의 세상에서 자기의 목표를 갖지 않습니다. 목표를 정하는 것은 목자의 일입니다. 양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목자입니다. 우리도 목자이신 예수님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의식 안에서 붙잡고, 양의 문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바란다면 이미 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둔 양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예수님만 보느라고 다른 것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돈 좀 벌었으면 좋겠다, 건강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생겼다면 이미 양이 아닙니다. 그런 바람을 가진 나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 속에서 발전과 개선을 이루게 하시고 꿈꾸게 하고 비전을 성취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4차원의 세계로 끌고 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4차원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얻는 길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고 있는 삶에서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3차원의 세계에 대해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3차원의 세계에 대해 어떤 바람과 목표도 갖지 않는 자가 되었다는 자아의식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목표로 할 때에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4차원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잊지 않고 자아의식으로 흡수하는 상황을 목표로 삼을 때에 천국의 좋음이 이론이 아닌 실제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좋음이 크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의식과 마음이 3차원의 세상에 갇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고 공생애의 예수님이 내 속에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좋음을 아는 사람은 천국에서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압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공생애 때의 예수님을 대신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자로서 천국의 좋음을 염두에 둘 때 가장 무서운 일은 천국에서 의식과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입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3차원의 세계에 갇혀있는 상태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영원히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의 좋음을 보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천국에서 내가 소멸되었다는 상황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지옥에 따로 불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49절에서 지옥에 대해 묘사하시기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불로 소금을 치는 기구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좋음을 보되 그 좋음으로부터 자신이 소멸되었음을 느끼는 것이 불로써 소금을 치는 것과 같은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좋음을 알면 알수록 멸망의 무서움을 알게 됩니다. 멸망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은 공생애 때의 예수님처럼 아버지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영생의 좋음이 삶에 반영됩니다. 영생의 좋음을 알기에 멸망의 무서움도 아는 자들로서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을 전달할 수 있는 제이, 제삼의 예수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3차원의 공간인 세상에서 가져야 할 목표는 오직 하나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기어코 잊지 않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하시고 영생의 좋음을 알게 하시며 멸망의 무서움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이웃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