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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_태승철 (요한복음 11: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2.23|조회수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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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의 줄거리:

우리 하늘 아버지의 있으심은 이론이나 교리를 따른 지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뭇잎 움직임이 바람의 기척이듯이 그렇게 기척으로 있으심을 의식하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기척을 통해서 하나님 있으심을 느끼며 의식해야 빛 가운데 다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는 오직 어둠 속에 갇히고 그래서 늘 넘어지게 됩니다.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

(요한복음 11:1~16)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

제목은 인기척보다 신기척에 더 예민한 반응이 곧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기척은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있음을 알게 해주는 소리나 냄새 등의 여러 가지 표시들입니다. 예를 들어 인적이 끊긴 늦은 시간에 어두운 밤 골목길을 걸어서 귀가중인 아가씨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밤 그 자체만으로도 두렵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는데 집에 도착하려면 10분 가까이 걸어야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전신에 소름이 돋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인기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척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있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의 살아있으심은 이론과 교리 속에서 고백이라는 형태로만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인기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기척으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두운 밤 귀갓길에 인기척을 느끼면 겁이 납니다. 돌아보면 따라오는 사람을 자극할까봐 뒤를 돌아보지도 못합니다. 소름이 돋는 상태로 종종걸음을 하는 의식 상태는 그만큼 상대의 기척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강한 기척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에 대해서 백날 천날 말로만 믿는다고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흔들림을 보면 바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늦은 밤 귀갓길에서 아가씨가 느끼는 인기척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기척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은 기척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지 이론과 교리적 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본문은 신기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기척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심이 되는 말씀은 5~10절까지의 문단입니다. 먼저 9~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가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유대 땅을 벗어난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 땅으로 다시 들어가신다니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빛 안에서 다니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4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황은 사람의 의식에서 1등을 하시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하나님만이 보이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화로운 광채를 받으시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1등으로 의식되고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면 넘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기억을 따라서 유대 땅으로 들어가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한 것이지만 어둠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의식이 하나님을 1등으로 느끼는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는 절대로 넘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고 판단해서 안전을 기하더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의식에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천국과 하나님의 살아있음이 의식에서 1등으로 환하게 비춰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화로운 광채를 받으시며 우리의 의식의 무대에서 1등으로 등장해 계시는 상태에서 당면하는 문제나 상황에 대해 대처하고 말하고 행동함에는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의 의식과 마음에서 일등은 누구입니까? 영화로운 광채가 하나님께 비추고, 의식으로 하나님을 환하게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과 판단을 해도 옳습니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옳습니다. 의식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종합하여 결론을 내려도 무조건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이글이글 타오르는 상태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상태가 아니면 무슨 생각이나 판단을 해도 다 쓸데없고 잘못된 것이고 오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병든 나사로를 만나러 가다가 잡혀서 다 죽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기억과 경험을 기준에 놓고 본다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두지 못하는 것이기에 옳지 않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잡혀 죽더라도 그것은 올바름이기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올바름 안에 살고 싶다면 항상 빛 가운데 거해야 하고, 빛 가운데 거하고 싶다면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신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1등으로 영광을 받으시려면 먼저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기척을 느끼면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하게 되고 그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은 이론과 교리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밤늦게 귀갓길에 오른 아가씨의 예를 들었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소름이 돋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신기척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신기척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신기척을 느꼈으면 그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레이스(φιλεῖς)는 친구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φιλέω)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과 나사로가 우정이 깊은 친구처럼 서로 좋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5절을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온 사랑은 3절에서 나온 사랑과 의미가 다릅니다. 5절에서 언급된 사랑은 아가파오(αγαπαω)로서 신성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하는 아가페(ἀγάπη)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우정으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신으로서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필레오와 아가페의 차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사이에 지극히 좋아함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언제나 잊히지 않는 관심의 대상으로 좋아하고 기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기척에 반응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는다면 신기척에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뒤따라오는 사람의 인기척에 대한 반응은 소름이 돋으며 두려움으로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신기척에 대한 반응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항상 기억의 첫 번째 대상으로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신기척이신 예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가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한 마디로 병들어 죽게 된 나사로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죽게 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좋아하는 자에게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합동작전으로 이루시는 일은 바로 죽음입니다.

이처럼 나사로를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많은 사람 중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특별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에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있음에 대한 기척이셨습니다. 그러한 나사로의 죽음은 나사로의 의식과 마음의 무대에 끊임없이 1등으로 다가오는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을 죽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있음과 좋음에 반응하고 있는 나사로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합동작전으로 죽이시고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의식과 마음이 항상 1등 자리를 내어주던 나사로를 죽이고 의식 활동과 마음의 흡입 활동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랬다가 다시 살리시면서 예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보게 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나사로의 의식과 마음의 무대에서 하나님이 1등하는 사람이 되도록 다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잊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과 관계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척은 느끼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 또한 상상이고 망상이고 환상이고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잊고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살아있다는 기척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 있다!”라는 기척을 드러내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외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망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론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기척을 통해 들어가야만 합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문을 열고 나가서 확인하게 됩니다. 기척이 없으면 실제 존재와의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내 생각으로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좋아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좋아함의 특징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두 번 언급됩니다. 인간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는 우정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사로와의 관계는 신성을 주고 싶어 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두 사랑에서 공통된 것은 잊지 못함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언제나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신기척에 대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잊지 않음은 하나님의 있음에 직접적으로 닿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잊지 않는 자들을 십자가에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6절을 보면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도마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전후맥락을 모른 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다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60여년이 지난 주후 90년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도마의 말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있음의 기척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살아있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예수님을 좋아함으로써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면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합동하셔서 나사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죽게 만드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기척으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드러나시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의 무대에서 1등을 하시는 영광의 상태가 되십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좋아하신다면 하나님의 기척에 반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척에 반응하여 예수님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는 합동하여 죽음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나사로가 죽도록 이틀 동안 기다리셨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 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때에 기척으로만 느껴지던 하나님께서는 전면적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영화로운 광채를 받으시는 상태가 되었다면 영생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신이 된 상태입니다. 내가 있기 위하여 하나님의 있음이 발판이 됩니다. 유일하게 있으신 하나님의 신성이 나 있기 위한 발판으로 내 인격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의 신성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신성이 내 인격 안으로 들어오면서 신이 되고 영생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본문에서 빛을 언급하셨던 것처럼 지정의와 말과 행동이 밝은 빛 속에서 움직여지고 오류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신기척이신 예수님을 좋아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귀갓길의 아가씨가 인기척에 소름끼침을 느끼듯이 그렇게 하나님 살아있음의 기척이 되시는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좋아함으로부터 이러한 일들이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8장과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이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척이십니다. 기척에 반응해서 하나님의 있음에 반응하면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물리학적으로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 시간이 멈춰버립니다. 비유적으로 대입하자면 빛 안에 머물 때 시간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이루어지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빛의 속도로 머물 때 의식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3차원 세계에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의식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면서 몸으로는 3차원의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신기척이신 예수님을 좋아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삶과 대비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던 유대인들입니다. 돌로 치려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없어지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 예수님이 사라진 상태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는 상태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기척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함은 늘 기억 속에 예수님이 머물러 계신 상태입니다. 기억 속에서 예수님이 사라지고 관심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제거하고자 했던 유대인들과 같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십자가 생활화 또한 예수님을 좋아함으로부터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야 십자가를 향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던 도마의 이야기가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을 좋아했고 예수님도 그러한 나사로를 좋아하셨습니다. 나사로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좋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좋아하시겠다고 손 벌리고 오시는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고 기억 속에서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앞으로 오실 분으로 기대 속에서 만났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오신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 속에서는 예수님을 오신 분으로 기억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돌로 치고자 했던 유대인들과는 반대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좋아하고 항상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합동하셔서 우리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끄셨던 나사로를 살리셨듯이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우리를 다시 살려내실 것입니다. 그럴 때 기척으로만 느끼던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체이신 하나님의 신성이 우리의 인격 속으로 스며들어 오실 것입니다. 신기척이신 예수님을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잊지 않고 좋아함으로써 빛에 거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귀갓길 아가씨가 인기척으로 소름끼침을 느끼듯 신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실감하며 좋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어지는 은혜의 과정을 내 것으로 만드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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