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신기척이 내겐 위력인가 위협인가?>의 줄거리: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게 놔두셨다가 다시 살리신 표적의 근본 의도입니다. 즉 나사로 사건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있음을 느끼게 하려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도를 본격적으로 적대시하기 시작합니다. 신기척은 받아들이면 위력이고 아니면 위협이기 때문이지요.
신기척이 내겐 위력인가 위협인가?
(요한복음 11:45~57)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신기척이 내겐 위력인가 위협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신기척이 내겐 위력인가 위협인가?”
위력(威力)과 위협(威脅)은 나를 중심으로 볼 때 그 의미가 반대되는 말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표적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의도는 42절의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님과 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연결시키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계심을 느끼라고 나사로의 부활 표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기척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눈과 귀를 포함한 오감으로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 4차원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3차원 세상으로 보내신 기척이 예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안방에서 “에헴”하는 헛기침 소리가 나면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기척을 내신 사건이었습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고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이기로 작정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인간의 오감을 초월한 4차원 세계에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3차원 세상으로 보내신 기척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척을 지우고 없애고 죽이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비유적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중학생 아들이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사이에 몰래 여자 친구를 데려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오시자 놀라서 여자 친구를 자기 방에 숨깁니다. 그런데 방에 있던 여자 친구가 무언가를 떨어뜨려서 소리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더 큰 소리를 내서 여자 친구의 기척을 없애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의식이 여자 친구에게 닿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가 했던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유대 땅에 살고 있는 선민들의 의식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있음에 닿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천봉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진심입니다. 종교는 신의 있음과 좋음을 이론에 가두어두고자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신의 있음과 좋음을 직접 느낄 필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있음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있음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은 3차원에서 오감이 포착하는 어떤 대상보다 더 먼저 4차원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종교가 원하는 것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종교의 존재감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예배당의 조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하나님의 존재감이 아니라 예배당 조직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종교의 존재감이나 예배당 조직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게 되면 종교는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이 종교인들에게는 위협이 됩니다. 의식이 기척을 포착하면 기척을 내는 존재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척을 내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각자의 의식이 도달하면 종교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척을 없애려고 하였다는 것은 참 모순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선민들이 하나님께서 실제로 있다는 느낌을 차단하고자 하였습니다. 선민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절대로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의 있음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베푸는 한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인류역사상 최고의 역설이 벌어지게 됩니다.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예수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탈출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이들은 이 또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 49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제안이 됩니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 과정과 자취가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통로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있음을 느끼는 사람의 의식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4차원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작정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빠져나간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3차원 세상 안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고 성공하고 형통하고 번영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서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부를 수 없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이것을 몰랐기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면 끝날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문제를 해결하여 번영과 성공을 이루고 싶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 싶은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싶다면 3차원 세상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임 당하며 이루신 자취는 세상을 떠나는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따라서 세상을 빠져나가면 3차원의 세상에서 문제가 있음을 느끼던 의식은 이제 4차원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음의 효과입니다.
이 결단은 나의 의식에 걸려드는 3차원의 모든 대상들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대로 3차원의 대상들에게 있음을 느끼고 성공을 이루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3차원 세상을 빠져나가서 4차원 천국에 하나님의 있음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의식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복음의 틀 안에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4차원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 세상에 당신의 있음을 알리기 위해 보내신 기척이셨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공회원들은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큰 위협으로 느낍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것은 이들의 바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 기존의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가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3차원의 세상을 살아갈 때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기존에 살아왔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나사로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사로가 죽기 전의 세상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체제나 질서나 원칙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최우선으로 느끼는 사람 안에서 이것들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인위적 세상의 체계나 질서나 원칙은 실체가 없는 거품이나 허깨비처럼 느껴져서 존속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인간 세상의 신념이나 가치체계의 근간이 됩니다. 그런데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최우선으로 느끼는 사람 안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도 좋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기존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셈입니다.
산헤드린공회가 하나님의 신기척이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한 이유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신기척이 위협이 되는 상황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협을 피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종교인이 됩니다. 예수님이 종교인들의 위협이신 구체적 이유는 예수님을 믿을 때 3차원 세상에서 통용되는 인위적인 모든 권세 혹은 권위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권세나 권위로 번역되는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어 에크(ἐξ)와 “있음, 본질”이라는 뜻의 우시아(ου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우시아(ουσία)는 영어의 be동사 즉 있음을 나타내는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있음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이 권세이고 권위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일 처음 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권세입니다.
예를 들어 한 회사가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 권세는 제일 처음부터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창립자인 사장님입니다. 처음부터 있는 창립자이기에 회사 안에서는 최고의 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학문 세계의 권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이론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그 학문에 대한 권위가 됩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들이 헬라 철학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으로부터 자기의 사상을 끌어낼 때 이 철학자에게도 권위가 붙게 됩니다. 가부장제도 아래에서는 가장과 맏아들에게 권위가 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는 첫째 있음이 왕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전용기를 에어포스원(Air Force One)이라고 합니다. 공군 안에 수많은 비행기가 있지만 그중에서 첫 번째 비행기라는 뜻입니다. 공무원 세계에서는 첫째 있음이 대통령이기에 권세가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에서는 산헤드린공회가 처음 기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 사회에 대한 모든 권세가 산헤드린공회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4차원 천국에 계신 하나님이 3차원 세상 안으로 기척을 내셨습니다. “너희가 3차원에 있기에 오감으로 포착할 수 없지만 나는 있다.”라고 기척을 내시기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의 사정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처음 있음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삼라만상과 인간세상 안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이기에 처음 있음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 회사의 사장, 각종 기관의 총장이나 원장, 학문의 대가, 전문가, 대통령이나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게 된 자들입니다. 사람의 권세는 인간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인위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위적 가치관은 하나님의 있음이 알려지자마자 임시 권세이고 가짜 권세로 드러나는 허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알려지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만 통할 수 있는 허세로써의 권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3차원 인간세상에서 권세와 권위를 느끼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권세의 출처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권세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전에는 서울대 졸업장이 권세였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상관없이 블라인드 면접을 통해 질문에 슬기롭게 전문적인 대답을 하는지를 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상은 이런 식의 권세로 똘똘 뭉쳐있고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면 이 모든 권세들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뜻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을 지배하던 권세와 권위의 체계가 죽어 없어진다는 것이고 깨져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의 기척으로 느끼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스승이신 예수님이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혀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되자 두려워서 모두 도망칩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따라 의식이 4차원의 하나님의 있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예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이 섰던 그 자리에 서게 되었으나 이들에게서 산헤드린공회의 권세는 없어졌습니다. 산헤드린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면 산헤드린공회의 권세는 없어질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느끼는 상태는 3차원 세상에서 오감으로 포착되는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 안에서는 세상의 모든 권세가 깨지게 됩니다. 왕이나 대통령 혹은 정부기관의 권세조차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나의 육체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권세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뀌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직접 느끼는 사람은 내가 권세를 띠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차원 세상에서 오감이 느끼는 어떤 대상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의식하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문제든 무섭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 문제를 무섭게 여기는 이유는 돈의 권위를 인정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돈의 있음으로부터 나오는 효과들을 권위로 느끼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돈도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돈 문제는 물론이고 사람과 상황과 문제도 무섭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4차원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렇기에 3차원의 세상에서는 그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교인들은 3차원 세상에서 종교의 존재감을 앞세워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에게는 각자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이 가장 큰 위협이 됩니다. 예수님은 각자를 왕이 되게 하는 위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북과의 전쟁을 무섭게 여기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무섭게 여기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무섭게 여겨지는 이유는 3차원의 삶의 형편을 하나님의 있음보다 먼저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권세가 없는 상태입니다. 진짜 있음으로부터 의식과 마음이 비롯되지 않았기에 겁에 질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붙잡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이 보이고 들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먼저 의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는 곧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을 탈출하여 빠져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의식과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의 있음을 제일 먼저 느끼는 사람들은 원치 않아도 왕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민망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은 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릴 때도 민망하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회사에 가면 과장일 뿐입니다. 위로는 부장님도 있고 전무님도 있고 사장님도 있는데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을까요? 과장으로 있으면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의식과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4차원에 머물며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유일한 있음으로부터 비롯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사에서 이 사람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은 없게 됩니다. 과장이지만 가장 큰 권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장님과 전무님과 부장님이라는 권세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실체가 없는 권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사장님과 전무님과 부장님을 대해야 할까요? 봐주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이고, 사장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위적인 권세를 포용하는 것입니다. 설령 노예일지라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낀다면 왕입니다. 그럼에도 노예로서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인이라는 세상의 권세를 봐주고 포용하며 배려하고 아량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요셉과 바로 왕과의 관계입니다. 요셉의 의식은 하나님의 있음에 머물러 있었으나 바로는 왕이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애굽의 왕은 바로였으나 실질적인 내용에서는 요셉의 통치 아래에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믿어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 있습니다. 낮은 계층에 있을 수 있습니다. 별볼일 없는 신분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왕입니다. 진짜 있음이고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 세상이 끼어들 존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과 관계되는 영역에서는 여러분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모든 권위들은 여러분이 봐줘야 할 대상이고 배려해야 될 대상이며 포용해야 될 대상입니다. 왕으로서 그들을 포용하는 위력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에서 나타납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제일 먼저 붙잡게 되면 세상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왕입니다. 이제부터 왕으로서 세상이 만들어낸 권세와 권위들을 봐주고 배려하고 포용하고 어루만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기척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 예수님을 붙잡기만 하면 우리의 삶과 관계된 영역에서 민망해서 할 수 없을 것 같은 왕이 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놓으셨으니 언제 어디서나 인간세상이 만들어낸 윗사람들을 봐주며 배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문제들이 갖고 있는 권세들을 향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나가는 터전으로 삼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