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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살찌듯 은혜찌고 진리의 술에 취하자>의 줄거리:
공생애 첫 번째 표적으로 혼인 잔칫집에서 정결 예식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참으로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정결 예식은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를 상징합니다. 이제 몸의 겉을 물로 씻는 율법의 시대에서 몸 안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진리에 취하는 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살찌듯 은혜찌고 진리의 술에 취하자
(요한복음 2:1~12)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살찌듯 은혜찌고 진리의 술에 취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살찌듯 은혜찌고 진리의 술에 취하자”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공생애의 첫 번째 표적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대화를 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다른 대화들에서도 논리적 흐름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 혼인잔치는 사도 요한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라 추측됩니다.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만 이 혼인잔치의 신랑이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서로 자매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배대의 아들인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이종사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마리아가 결혼식 잔칫집에서 주최측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남이었다면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최 측인 살로메의 언니였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나타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투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자여”라고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γυνή)는 당시 왕후를 지칭하거나 아내를 존중해서 부를 때 여성들을 향한 극존칭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첫 번째로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이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극대화시킨 정중한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정서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부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은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가 또한 특이합니다. 5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의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요구를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때”를 언급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에서 “내 때”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여기서 “내 때”란 십자가 사건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의 마지막 귀착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즉, 공생애의 시작은 십자가 사건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적인 삶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적 어법입니다. 목적지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여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여정은 공생애의 여정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류구원을 위한 계획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입장을 띄고 십자가라는 종착지를 향하여 가고있는 중이기 때문에 어머니조차 사적으로 대하지 않고 “귀나이”라는 헬라어 극존칭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이제 공적인 활동 중이시기 때문에 비록 어머니라 하여도 사적인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5절을 보면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은 얼핏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을 마주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예수께 가서 이 상황을 알리고 해결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다 받아들이고 계신 분이시기에 마리아가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마리아가 포도주의 문제를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온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단순히 잔칫집에서 사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도 지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물로 포도주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제가 일으키는 표적은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사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잘 알았기에 즉시 하인들에게 예수님께 순종할 것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는 인류구원을 위한 공생애 사역 속에 포함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이 사적인 부탁에 의한 능력 사용이 아닌 공적인 사건임을 구태여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결혼식의 신랑은 사도 요한이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사도 요한은 본서의 저자로써 자신과 관계된 사건에 담긴 의미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주인에게도 손님에게도 음식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집의 잔치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절대 사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공적인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취지가 들어있는 공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공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주인은 신랑과 신부와 그 부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어떤 면이 우리에게 해당된다는 것일까요? 잔칫집에서는 음식이 베풀어집니다. 내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축하를 위해 선물이나 축의금을 지참합니다만 그것이 밥값은 아닙니다. 결혼잔치의 음식은 기쁨으로 거저 베풀어지는 것이고, 선물이나 축의금 또한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잔칫집의 특징은 내가 준비하고 값을 치르지 않은 음식들을 공짜로 먹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제시되는 것이 바로 포도주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1장 17절을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전면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물은 여섯 개의 돌항아리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들은 정결예식을 위한 물을 담아두던 항아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결예식이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으로 가정에서 생활을 할 때에 외출했다 들어와서 손을 씻고 발을 씻어서 밖에서 있었던 나쁜 기운들을 씻어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 또한 이에 포함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정결의식을 철저히 지켰기에 부지런히 손을 씻는 자라고 언급되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 정결의식은 단순히 손과 발을 씻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실 때 마태복음 23장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27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규정대로 몸을 움직이며 행동하는 것은 겉을 깨끗하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삶 전체가 정결예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항아리에 준비된 물로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은 그동안 선민들이 지켜왔던 율법의 전체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를 깨끗함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깨끗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죽어라 열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달라진 것은 이 율법의 지켜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잔칫집에서 음식을 먹듯이 율법이 자연스럽게 지켜지며, 진리의 포도주에 취하는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율법이 존재합니다. 꼭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지침들이 존재합니다. 하다못해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에게 “배부르게 살려면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해야 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조차 일종의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율법으로 작용하는 것들은 대개 “이렇게 되려면 이렇게 하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고 사람들의 삶이란 율법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정결예식을 위해 준비했던 물이 마실 수 있는 포도주로 변하였듯이 삶은 변하게 됩니다. 잔칫집에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살찌고 하나님의 생각에 취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 은혜와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은혜는 삶의 환경에 주어지고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내 인격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니거나,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되어서 살이 찌는 것처럼 은혜는 인격 안으로 들어와서 인격을 살찌우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은혜찌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의 인격이 말라붙은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은 무엇으로든 살찌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은혜로 살찔 수 없다면 죄로 살찌게 됩니다.
인격이 은혜찌는 사람이 되는 것에 돈이나 건강이나 배움의 유무나 형통은 상관이 없습니다. 은혜는 인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고 인격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인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기에 어떤 환경적 문제가 있더라도 받을 수 있고 받은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은혜찐 인격의 대표적 예시가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육체는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인격은 은혜의 정점에 달해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몸으로 만나는 환경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찌듯이 인격이 은혜찌는 것입니다. 살은 몸과 분리될 수 없듯이 은혜는 인격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몸에 살이 찌듯이 은혜는 인격 내부로 들어와서 은혜찐 사람을 만듭니다.
은혜는 내 마음이 채워질 수 있는 좋음이고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격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들은 좋음과 싫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잔칫집에서 음식을 먹듯이 마음이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은혜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를 잔칫집에서 음식 먹듯이 먹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먹음으로써 인격이 은혜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통통하게 살찐 사람이 됩니다.
모세가 정해 준 율법을 지키려 했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인격 외부에 은혜를 쌓아주신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지키면 이런저런 복을 주겠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저 율법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선민들이 율법을 받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들의 인격 내부에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와 반대 현상이 계속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시대의 선민들은 예수님만이 빛이신 상태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들이 빛이었습니다. 배우자가 빛이고 자녀가 빛이고 재정상태가 빛이고 건강이 빛이었습니다. 내 의식이 지금 이 순간 첫 번째로 바라보고 붙잡는 대상이 빛입니다. 예수님이 빛이 아닌 상태에서는 온갖 것들이 다 내 안에서 빛으로 등장합니다. 그러한 대상들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너의 자리에 두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십자가의 네 가지 포인트에 역행하는 상태입니다. 가시면류관이 없어진 상태에서 스스로의 삶을 생각하고,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좋아해서 마음의 살로 만들고, 배에 창이 찔리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 것을 마음대로 욕구하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히지 않은 상태에서 직접 손대며 살아갑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 바깥에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상태의 특징은 내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고 기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잘못된 믿음을 보시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너희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원칙만 잘 따르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해볼 테면 해보라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인격의 내부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진정으로 좋으신 하나님은 없고 세상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격 외부에 율법으로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인 율법은 결코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인격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좋은 분으로 믿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만을 먹기 시작하고, 하나님만을 관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은혜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각인 율법은 인격 외부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 내부에 전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주를 마실 때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기능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일부러 술주정하지는 않습니다. 술기운에 의해서 술주정이 나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먹어서 은혜찐 인격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밖에서 물로 씻는 것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 마시는 포도주와 같이 됩니다. 율법 시대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행위를 깨끗하게 씻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마실 수 있는 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먹은 상태가 되어서 포도주의 기운에 취하듯이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밖에 제시된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와는 다르게 입을 열어 말을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나옵니다. 행동을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담깁니다. 포도주를 마신 자의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듯이 퍼져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포도주처럼 내 안에 들어온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내가 있을 때 내게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밖에 제시된 것을 따라서 애써서 힘들여 지켜나가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을 인격이 마셔버림으로써 포도주의 기운이 퍼지듯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상태가 진리의 상태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면 예수님을 유일한 빛으로 보게 됩니다. 나의 의식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며 네 가지 포인트를 따라 나를 규정하기를 지속할 때에 잔칫집에 참여하여 베풀어진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을 은혜로 먹게 됩니다. 이제까지 인격이 죄찐 사람이었다면 인격이 은혜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마시듯 하나님의 생각을 마시게 됩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하고 감정이 움직이고 의지가 발동될 때마다 하나님의 생각의 기운이 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어제 십자가온라인교회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생각대로만 살기 때문에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에 취하고 장악되었기에 평강이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영접한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잔치에 참여하여 무한리필되는 산해진미를 먹는 것과 같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먹는 은혜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찐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포도주로 마시면서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생각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정에 문제가 있든 없든 그것은 은혜도 아니고 저주도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아니며 잘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상황들에 대해서 술 취한 사람에게서 술기운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생각에 취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고 뜻할 때 진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생각에 취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게 되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이 벌렸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잘된 것도 아닙니다. 나의 인격 바깥에서 일어나는 이 세상의 일들은 좋음과 싫음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은 중립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갈 뿐입니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갈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해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생각을 해도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될 것이고, 감정을 표현해도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될 것이며, 의지가 발동되어도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될 것입니다.
어제 시편 23편 5절을 말씀드렸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만 영접하면 원수의 목전에서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아무 상관이 없는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잔칫집에서 베풀어지는 음식을 먹으며 살찌듯 은혜찔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은혜찐 자들로써 하나님의 생각을 포도주로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밖에 제시된 율법이나 세상의 원칙들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려면 이렇게 해라, 주식 투자는 이렇게 해라, 건강하려면 무엇을 먹어라.”고 하는 세상의 원칙들은 젖혀두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포도주처럼 마셔서 하나님 생각의 술기운이 나를 지배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인으로 사시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 다 같이 자유함의 주인공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유일한 빛으로, 유일한 너의 자리에 영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잔칫집에 참여하여 끊임없이 제공되는 산해진미를 먹듯이 하늘에 계신 유일한 좋음 되시는 아버지를 먹어 은혜찐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포도주인 하나님의 생각을 마셔 하나님 생각에 취하게 하심으로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든 하나님의 생각만 나타나는 진리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