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너무 아까운 것이 쓸데없는 것 되게 하자>의 줄거리: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 연합이 일어날 수 있는 마음가짐은 어떤 것일까요? 그냥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하면 되는 것일까요? 내게 지금 가장 아까운 것들이 쓸데없는 것들로 바뀌는 방식으로만 이 연합은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너무 아까운 것이 쓸데없는 것 되게 하자
(요한복음 12:1~1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너무 아까운 것이 쓸데없는 것 되게 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너무 아까운 것이 쓸데없는 것 되게 하자”
내 마음에 너무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을 마음에서 쓸데없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아깝게 여기는 것들을 쓸데없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 채 계속 아깝게만 여기고 있다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정확하게 가늠하고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3차원 세상에서 내게 아까운 것이 남아있는가? 이 아까운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 되게끔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믿음의 상태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난해한 부분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7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장례할 날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난해합니다. 마리아는 이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다 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간직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헬라어 테레세(τηρήσῃ)로서 “지키다”는 뜻의 테레오(τηρέω)의 부정과거형입니다. 이 시제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두 문장으로 나누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라.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였던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의미를 살리자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가만 두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본문은 통상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헌신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이해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이 장면은 마리아의 헌신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헌신을 부각하는 내용입니다. “나를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예수님의 헌신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잘 응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보여줍니다.
한편 오해되는 또 다른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발에 기름을 부은 사건을 당신의 장례할 날을 준비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유대의 장례풍습에서는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장례절차와 예수님의 말씀을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까지 아직 일주일을 남겨두고 계셨습니다. 아직 살아계셨기에 기름을 바르더라도 그 효과는 나타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장례식의 절차를 수행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에야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을 보면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누가복음 23장 55~56절에서도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준비를 했지 실제로 향유를 바른 사람은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께 밤에 찾아와서 거듭남에 대한 대화를 하였던 바리새인이자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9장 39절에서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장례절차가 진행된 것은 죽으신 이후였고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절차에는 전혀 참가한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가 장례할 날을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이제 예수님께서는 일주일 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장례할 날을 준비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마리아의 태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향하여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합당한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는 행동에서 나타난 태도와 심정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께 취해야 될 사람들의 유일한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과 태도가 없다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 덧붙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14장 8절을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7절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또 이어지는 9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할 때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사건을 같이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복음과 연관하여 기억되어야만 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구를 할 때 배트로 공을 쳐서 날아가면 글러브로 받습니다. 복음전파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마치 야구공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던진 야구공을 받기 위해서는 글러브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는 글러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나타난 마리아의 마음가짐입니다.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아니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받을 글러브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받아서 내 것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내게 받아들여집니다.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의 문제가 언제나 같이 이야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마리아가 기름을 부은 사건이 함께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는 기름을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더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마리아의 헌신이 아닌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마리아에게 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가질 수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로 삼백 데나리온의 기름을 한꺼번에 부어버리는 심정이 십자가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질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가룟 유다의 반응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가룟 유다의 반응과 마리아의 태도가 합쳐져서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가 묘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는 향유가 아까워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아까운 것을 한 번에 탕진하는 마음가짐으로만 십자가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따라서 삼백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현재로 환산하면 적게 잡아도 3,000만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부은 향유 한 근은 지금 기준으로는 340g에 해당되는 양입니다. 콜라 한 캔 정도의 소량의 기름이 3,000만 원어치라고 생각해보면 엄청난 가격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도 하고 몸에 부었다고도 하는데 본문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발만 닦기 위해서는 단지 몇 방울만 떨어뜨려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3,000만 원어치의 기름을 한번에 다 붓고는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경악했던 것은 가룟 유다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아까워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과도하게 낭비하고 소비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룟 유다가 숨이 넘어가게 아까워할 정도의 가치를 예수님께 부어버립니다. 여러분께도 그렇게 아까운 대상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게서 없어지면 너무나 상실감이 커서 견딜 수 없는 대상이 아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아까운 것을 마음에서 쓸데없는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기름 한 병이 3,000만 원어치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다 부어버립니다. 향유에 대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아까워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아깝게 여기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도 된 것처럼 다 버리는 일은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까워하는 것을 마음에서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장례할 날을 준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합당한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아까운 것을 쓸데없는 것처럼 버리면서까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아깝게 여기는 것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3차원의 세상을 잃어버리는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임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3차원 세상 안에서 내 마음에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3차원 세상에 대해서 죽는다고 해도 세상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 있는 것들 중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헌신 즉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무효가 되지 않고 효과를 내며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복음의 힘, 복음의 능력은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방법은 지금 내게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없어지거나 사라지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가룟 유다의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까운 것에 대한 죽음 없이 예수님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까워하는 것들에 대해 죽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아까운 것에 대해 죽을 수 있을까요? 마리아는 지금 3,000만 원어치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5절에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깝게 여기는 대상을 버리기는 고사하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깝게 여겨지는 것을 버린다는 것은 마음에서 쓸데없는 것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게 아깝게 여겨지는 것을 실제로 버리는 것은 주제 넘은 일입니다. 돈이나 재산을 팔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아까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들어 죽여서 번제로 바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급파하시면서 만류하시며 12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외는 하나님이 없으면 못 견딜 정도로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상태입니다. 결국 십자가 사건은 3차원 세상에 적용하던 아까워하는 마음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3차원 세상에서 아까워하던 것들은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쓸데없는 것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쓸데없다는 것은 나에게 쓸데없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나 여러분에게 쓸 데 있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수중에 없지만 내 수중에 있는 아까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쓸데없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 본문에서 마리아가 보여준 마음가짐입니다. 향유를 부어버리듯이 아까워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의식으로 있음을 느낍니다. 어떤 대상을 의식함으로써 나의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좋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는 대상으로부터 채워지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에서 아깝게 여기던 것을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이 아까운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연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 시라도 천국의 있음을 망각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고, 하나님의 있음을 단 한순간이라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언급하며 6절에서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버리다시피 예수님께 부어버리는 것을 보고 아까워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3차원 세상 안에 있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도둑의 마음입니다. 본래 이 세상은 우리가 아까워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나 아내 사라나 독자 이삭까지도 아까워할 대상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아까워하며 살아가지만 이것은 도둑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3차원 세상에 있는 것들을 도둑질하는 나는 죽어야만 합니다. 향유를 아까워한 가룟 유다의 마음은 도둑놈의 심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까워했다면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자기의 몸을 아까워한다면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향유도 독자도 몸도 아까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아니고 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내게 쓸데가 있고 필요한 것은 의식에서 있음을 느끼고 마음에서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외의 3차원 세상에서는 쓸데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 쓸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쓸데가 있으셔서 잠깐 두고 계실 뿐입니다. 이것을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아까워한다면 도둑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속에 있는 도둑이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몸이 아깝다면 도둑입니다. 몸이 아까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에서 몸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가 아까워하는 대상들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몸이나 돈과 재산 그리고 가족들이 아깝다면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아까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쓸데가 있으셔서 잠깐 두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아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아까워하는 모든 것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것들은 내게서 아무 쓸데 없는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내게 쓸데 있는 것으로 느끼며 아까워한다면 하나님의 본래 계획대로 쓰실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동안 간직해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가만 두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왜 그것을 아까워하도록 놓아두셨을까요?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지기 위하여 부어버리기 위한 대상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듯이 여러분이 아깝게 여기는 대상들을 십자가의 예수님께 부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아깝게 여기며 간직했던 모든 것들을 들추고 찾아내서 십자가에 부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게서 떠나보내고 쓸데없는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천국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것을 철저하게 수행해나가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듯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더 이상 내게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 예수님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4차원에 예비 된 모든 축복도 내 것으로 가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 버린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기도하실 때마다 십자가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이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 내 마음이 아깝게 여길 대상이 아무것도 없도록 십자가에서 죽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주기도문의 나머지 부분 또한 오늘 본문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찾고 의식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모든 관계와 대상들을 아버지가 쓰심으로써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게 해주옵소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보여준 태도처럼 여러분께서 견딜 수 없이 아깝게 여기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오늘 죽었다 해도 내일도 그것이 곁에 있는 한 또다시 죽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마음에서 독자 이삭을 죽였다고 해서 이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이면 또 눈에 보일 것이기에 내일도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게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내게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 또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위해 헌신하신 예수님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무효로 돌리지 않고 온전히 나의 예수님으로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그로부터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도둑의 마음이 죽고 아버지께 돌려짐으로써 아버지께서 쓰시는 내용들이 되게끔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충실히 해나가기 위해서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고 바로 그것들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