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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예수님의 승리인 하나님의 영광 써먹기_태승철 (요한복음 12:12~3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1.01|조회수10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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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의 승리인 하나님의 영광 써먹기>의 줄거리:

종려주일의 기원이 된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승리를 알리는 개선 행렬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승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각자의 일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를 실제로 내 일상에서 좀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인 하나님의 영광 써먹기

(요한복음 12:12~3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의 승리인 하나님의 영광 써먹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승리인 하나님의 영광 써먹기”

본문은 크게 두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종려주일의 기원이 된 호산나 찬송이 들리는 예루살렘 입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 사건 이후의 24~33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볼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승리하셨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신 개선행렬이었습니다. 다만 그 승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승리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승리를 일상에서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개선행렬을 이끄시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승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때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전쟁과 승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셨고 사망을 무찌르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가 구체적으로 내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까? 2021년 12월 31일을 살고 계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승리가 어떤 여파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승리가 여러분의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무엇과 전쟁을 하셨고 어떻게 승리하셨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으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대우해드리고자 한다면 이 승리를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써먹는다는 표현에서 나쁜 어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승리를 써먹어야만 합니다. 써먹을 수 없다면 예수님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신 승리를 내동댕이치는 것이고 폐기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써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전쟁에서 이기시는 것이 승리의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은 존재감을 느끼는 곳입니다. 이 의식에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4차원 세계에 계시는 실재 하나님이 1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좋음을 느끼고 그것을 끌어당겨 채우고자 합니다.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을 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우선적으로 느끼고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은 분으로 모셔 들이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많은 구절이 있겠습니다만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섬김이 바로 영광과 연관이 있습니다. 섬김은 의식으로는 존재감을 첫 번째로 의식하고 마음으로는 그 존재감을 가지기 위하여 욕구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물을 말씀하셨듯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에 대해 섬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돈의 존재감을 제일 우선적으로 의식합니다. 그리고 돈을 유일한 좋은 것으로 여겨서 가지려고 애씁니다. 의식과 마음에서 1등 하는 자리가 영광이고 그에 대해 나타나는 태도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섬김을 놓고 하나님과 재물이 전쟁을 치르는 형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은 의식과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든지 재물이라는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의 기원이 된 예루살렘 입성에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온 천하에 왕이심을 선언한 사건이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서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던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이 예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를 부르는 개선행렬을 이끄신 것은 승리를 선언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승리를 선언하신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에는 마리아가 4,000만 원어치에 해당하는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의 친분이 두터웠으나 오빠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 부활한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 완전히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당시에 향유는 여인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던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는 향유를 지닐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간단히 말해 마리아는 예수님이 좋았고 예수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향유라는 세상의 가치는 더 이상 마음에서 가질 수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서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승리의 내용입니다.

이 승리는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그전까지 마음에서 소중하고 아깝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치르시는 전쟁이고 이루시는 승리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1등으로 붙잡게 되는 상태를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고 마리아에게서 확인되는 예수님의 전쟁과 승리의 내용입니다.

한편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것도 아닌 4,000만 원어치의 향유를 아까워합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향유에 지셨고 1등을 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서 1등이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닌 돈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의 전쟁이 치러지지 않았고 승리 또한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였기에 예수님께서 치르시는 전쟁이 마음에서 치러질 수 있었고 승리 또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승리가 이루어지자 나타난 일은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향유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향유가 차지하고 있던 아까움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마음에서 1등을 하시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리는 한 사람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화로운 조명이 비춰지는 상황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승리입니다. 이렇게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이 되어서 “하나님이 있으시구나!”라고 느끼고, 또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이 1등이 되어서 “하나님만 가져야겠다!”라고 느끼게 되면 후속적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이 승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면 3차원에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이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는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 안에서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시작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나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때 나와 관계된 만사가 제자리를 찾고 모든 일에서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돈 문제가 1등인 상태입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이 예수님을 모셔 들이게 되었습니다. 의식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에서는 예수님이 전쟁을 치르십니다. 마치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백신이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내 마음에서 전쟁을 치르시고 승리하십니다. 돈이 1등인 상태에서 돈이 쓸데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시고 하나님이 1등인 상태를 만들어 내십니다. 하나님이 1등이 되시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승리를 써먹는 것입니다. 의식에서 하나님의 있음이 1등으로 느껴지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이 1등으로 느껴지게 되면 삶의 모든 문제들 또한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또한 전혀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 직접 경험해보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깜깜하게만 느껴지고 모든 길이 막혀서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이 치르신 전쟁의 결과이자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는 승리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3차원의 세상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던 모든 대상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1등이 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주력하면 기존의 깜깜했던 상황,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길이 또렷하게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문제가 되었던 모든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승리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예수님의 승리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의식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려고 욕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문제의 길이 보이고 모든 문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일상적으로 써먹는 삶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에 3차원 세상의 것들을 의식과 마음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시면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을 하는 영광을 받고 계셨고 이 상태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본문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던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떨어져야만 싹이 나고 자라서 수백 수천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식과 마음에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로 사셨던 유일한 인간이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땅에 떨어진 밀알이 되셨습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3차원의 세상이 쓸데없는 예수님의 전쟁의 승리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을 하시는 영광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좋음을 추구할 때에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그 이름을 가리키는 실재를 추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를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이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밀알이 죽는 비유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구절이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에베소서를 보면 영적인 우주관은 3차원의 세상이 있고 4차원의 천국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3차원과 4차원 중간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간을 공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만 마음과 의식은 항상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중은 3차원이나 4차원을 향하여 가도록 준비된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을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판을 받게 될 세상의 임금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를 이기심이고 정복하심입니다.

공중에 있는 사람의 의식과 마음은 본래대로라면 위에 있는 4차원을 향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의식으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좋음을 느낄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며 하나님만을 마음속에 모셔 들이기 위해 욕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에서 몸이 움직일 때는 진리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건강 문제든 돈 문제든 가족 문제든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공중에 있는 의식과 마음이 4차원의 하나님을 향한다면 3차원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빛 아래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활동이 대표적으로 나타난 장면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입니다.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음으로써 나타난 결과가 인간의 의식과 마음이 위의 4차원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향하는 대신 아래의 3차원의 세상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원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공중에 있는 의식과 마음이 오직 3차원 아래를 향하도록 체질이 된 상태가 원죄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있음과 좋음이 적용되도록 도저히 바뀌어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귀의 완전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향유를 아깝고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육체로 만나는 3차원의 세상 것들에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체질이고 원죄가 되어서 도저히 4차원 세계를 향하여 의식과 마음을 바꿀 수 없기에, 4차원에 계시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의식과 마음의 방향이 아래의 3차원 세상으로만 향하기에 그 의식과 마음의 시선 앞에 나타나시기 위해 4차원 하늘이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예수님을 포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식과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속하여 붙잡으면 예수님은 마치 백신처럼 우리 안에서 전쟁을 치르십니다. 그동안 소중하고 아깝게만 여겨지던 3차원 세상의 것들이 전부 쓸데없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3차원을 향하여 붙박이처럼 고정되었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31절의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위의 4차원을 향하지 못하고 아래의 3차원을 향하는 것이 체질로 굳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래로만 향하는 의식과 마음의 시선 앞에 나타나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마음의 시선이 따라가야 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꼭 붙잡으면 예수님이 치르시는 전쟁을 통해 내 마음에서 이상한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3차원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마음에서 점점 쓸데없는 것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1등을 하는 영광의 상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 전쟁을 치르셨습니다. 십자가 전쟁을 나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나를 향하여 예수님이 싸우실 수 있게 해드려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이 하는 일과 사명이 이와 같습니다. 3차원 세상에서 여러분이 잘살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세상에서 여러분이 아까워하는 모든 것들이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전쟁을 치르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십자가 복음방송과 더불어 한 해를 보내셨습니다. 그 증거는 3차원 세상에 대해 아까워하는 마음이 죽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절반이 죽었든 1/3이 죽었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삶을 사셨다면 예수님이 치르신 전쟁을 통하여 이 세상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쓸데없는 것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2022년에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던 것과 같습니다. 마리아는 가지고 있던 값진 향유를 전혀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소중하고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하루빨리 쓸데없는 것들로 바뀌는 예수님의 전쟁의 승리가 정점을 찍는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에서 모든 것이 밝히 보이는 가운데 제자리를 잡아가는 2022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21년을 십자가 붙잡고 사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와 더불어 한해를 살게 하시고 또 십자가와 더불어 살아갈 한해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치르신 주님의 전쟁을 내 안으로 끊임없이 받아들이게 하시고 주님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래에서 2022년이 진행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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