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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침 바른 증거>의 줄거리:
비위생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침을 발라 놓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자기 소유임을 표시한다는 뜻이지요. 그 유명한 세족식은 섬김의 도를 교훈하고자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에게 침을 바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이름 부르는 사람 중에 가룟 유다들을 골라내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침 바른 증거
(요한복음 13:1~20)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침 바른 증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으로 침 바른 증거”
비위생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만 “침을 발라 놓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임을 표시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싶은 물건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가져다 대고는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침을 바르시면서 “너는 내꺼야.”라고 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 것이 된 사람에게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침을 바르시면서 “너는 내꺼야.”라고 말씀하시는 증거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발을 씻기는 사람의 태도로 대하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1~2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들과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 바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세족식의 마음가짐이 나타나는 반면에, 예수님께서 침을 바르지 않은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3년이나 예수님을 좇았음에도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이처럼 세족식의 마음가짐이 증거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핵심 메시지에 대한 전통적인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를 “세족식을 통해 보이는 섬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이라는 인격적 윤리적 덕목을 교훈하시기 위하여 시청각 교육으로 세족식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세족식 사건의 전개를 살펴보자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은 1절의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은 1절에 기록된 “자기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는 말씀 또한 1절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는 부분의 반복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강조된 뒤에 4절의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라는 세족식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시면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은 남겨지게 됩니다. 세족식은 바로 이렇게 땅에 남겨진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표현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섬김을 가르치기 위한 사건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좋은 4차원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루빨리 떠나고 싶어 하시는 3차원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고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련 없이 떠나시고자 하시는 3차원 세상에 남겨져야 할 제자들을 생각하실 때에 마음이 애틋하셨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세족식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1절의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사람과 예수님을 파는 사람 즉 마귀의 사람이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확인될만한 표시를 남겨두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겨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육체로 함께하지 않을지라도 “너는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두자면 13장의 세족식 사건의 주제는 섬김이 아니라 당신의 사람을 구분하는 표시를 만드신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가룟 유다와 같은 마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의 사람과 마귀의 사람을 구분 짓는 사건이었습니다. 13장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서 가룟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큰 비중을 가지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가룟 유다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지 않은 다른 부분들에서도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13장 전체는 예수님이 침 바른 사람들과 예수님이 침 바르지 않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표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족식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에 모든 사람을 향해 가지시던 마음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던 방식은 예수님의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천국으로 돌아가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은 몸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안 계실 때에는 어떻게 예수님의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발을 씻겨주는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침 발라놓으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지 시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세족식의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침 바른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혹은 예수님이 침을 발랐으되 당시의 제자들처럼 그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단계로 가고있는 중입니다. 이 단계를 가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혀 부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것이라는 표시가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예수님을 파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중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마귀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사람이 아닌 티가 납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계열에 속한 마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세족식 광경을 담고 있는 본문은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때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기에 대해서는 공관복음들과 요한복음의 기록에 차이가 있습니다. 날짜상으로는 하루의 차이가 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으로 유월절 식사가 아닌 하루 앞선 날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도 요한은 유월절의 의미를 붙이는 만찬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이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침 바른 사람에게서 나타나야 할 표시가 왜 세족식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풍습에 따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주인의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종의 일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바로 이 만찬자리에서 제자들끼리 누가 더 큰 자인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풍습에 따르자면 가장 낮은 자가 발을 씻겨줘야 했기에 누가 발을 씻겨야 할지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 사람들의 신발은 샌들과 같은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있었기에 식사자리에서는 발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발을 씻지 않으면 전체적으로 더러움이 가득하게 보이는 형태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발을 씻어야 했고 잔치자리에서는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가장 낮은 직급의 종이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밖에 없었기에 누군가는 발을 씻기는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누구라도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꺼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릴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문제는 제자들 사이에 있었습니다. 발을 씻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제자들 중 가장 낮은 자임을 자처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보며 이제 나라를 식민지로부터 독립시키고 임금이 되실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신 예수님 밑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 위해서 낮은 자를 자처한다면 나중에 벼슬이 분배될 때에 가장 낮은 직급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잔치자리에서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발을 누군가는 씻겨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낮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누가 제일 높은지를 따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망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될 입장에서 이 땅에 남아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 남아야 될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와 표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표시를 주는 것이 예수님께 남은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투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의 뼛속까지 각인될 사건을 남기십니다. 그것이 바로 세족식입니다.
제자들은 서로가 낮아지기 싫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스승의 발을 씻겨드려야 하는 상황도 미룬 채 누가 높은지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제자들로서는 평생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의 풍습에 따라 발을 씻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높아지고자 다투는 가운데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이 기억이 뼛속에 새겨져서 누구를 만나든지 시중을 드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세족식의 마음가짐은 육체적으로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의 사람들이다.”라고 주신 표시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발을 씻겨야 할 사람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되어야 했습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8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8절 하반부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긴 일이 미안하고 당황스럽다면 그 일을 너의 뼛속까지 기억하라. 네가 앞으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나를 본받아 그 사람들의 발을 씻기라.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다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시중을 드는 마음가짐으로 대하라는 것이 세족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좋은 4차원의 천국으로 가시고자 하셨으나 제자들은 3차원의 세상에 남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로 좋은 천국으로 가시는 스승의 입장에서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최고의 것이 바로 발을 씻기는 심정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발을 씻어주는 시중드는 자의 심정이 이 땅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것이 왜 최고로 좋은 천국으로 가신 스승이신 예수님의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앞서 나타난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침 바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람들이듯, 우리 또한 예수님께 침 바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예수님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를 신경 쓰는 동안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돈 문제는 가룟 유다가 받은 은 삼십냥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망각함으로써 예수님을 팔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가지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 가지기도 중단되고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나의 성별이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자아의식보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남자라는 자아의식이 발동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잊어버린다면 예수님을 파는 것입니다. 또 내가 아빠나 남편이라는 자아의식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사라져버렸다면 예수님을 파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우선적으로 유지되면 마리아와 같은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가지면 항상 기뻐하게 되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리아처럼 3차원 세상에서 소중하고 아깝게 여기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침 발라서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듯이, 나도 예수님께 침을 발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내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것으로 가지는 방식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가지면 반드시 3차원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던 것들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 갖기는 나의 자아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의식 속에 갖기 때문에 항상 가질 수 있고, 쉬지 않고 가질 수 있고, 범사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식이 다른 종류의 자아의식에 의해서 대체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만이라도 예수님을 파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이 잦아지게 된다면 결국은 가룟 유다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면 반드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이 세상 것들을 전혀 의미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을 대하면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이 사람에게 시중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침 발라 “너는 내 것이다.”라고 하시는 사람, 또 예수님께 침 발라서 “예수님은 내 것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표시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세족식을 하셨습니다. 이 세족식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시중드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가룟 유다의 계열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 계속 살펴볼 13장에서 가룟 유다는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13장의 주제는 섬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의 증거가 무엇인가가 주제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부속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섬김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내 것으로 가지고 있느냐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세족식에서 나타나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침 바른 사람입니까? 또한 여러분은 예수님께 침 발랐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께 침 발라서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님을 가지신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시중들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이 증거와 표시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곳인 4차원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 축복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시중드는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새로 허락하신 한 해를 예수님께 침 발린 예수님의 사람이자 예수님께 침 발라 예수님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 살며 누구를 만나든 그를 위해 시중드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가진 사람의 표시를 드러내며 사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