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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잘 믿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의 줄거리:
예수님 잘 믿으면 영생과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사통팔달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보여주듯이 예수님 믿기가 어려운 이유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밖에서 오셨고 세상 밖으로 나간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죽어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세상을 떠났기에 나도 그래야 하는 점이 믿음의 최대 난제입니다.
예수 잘 믿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요한복음 13:21~30)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잘 믿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잘 믿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본문에서는 가룟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21절에 예수님이 괴로워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은 곧 사탄의 기쁨이 됩니다. 본문에서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개입하는 상황이 언급되는 것은 사탄 마귀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중에 예수님을 팔 사람이 있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6장 70절에서도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은 이제야 충격을 받았고 그중에 베드로가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여 예수님을 팔 자가 누구인지를 묻게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어주는 자라고 말씀하신 후에 가룟 유다에게 떡을 떼어주십니다. 이 장면이 이상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잔칫상에서 귀빈이 떡을 떼어 과일 소스 등을 발라서 건네주는 일은 특별한 우정의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풍습이 있었기 때문인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바로 이렇게 제자들이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연시하며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처음이라서 한 번 실수는 용서해주겠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도 아닙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2절을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고, 27절에서도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사탄의 개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인격은 사탄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 친화적 인격 상태가 예수님께 큰 괴로움인 이유는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만 본문의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도망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지는 않았더라도 가룟 유다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나머지 열한 제자가 영적으로 구분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은 이들에게 차별점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지명하시는 것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귀빈이 떡을 떼어 주는 것이 우정을 표시하는 관례나 풍습임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직전에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가룟 유다를 대할 때 어떠한 차이점도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는 있었습니다. 이 차이점 때문에 가룟 유다는 열한 제자와는 다른 배신자가 됩니다.
이 차이점은 중요합니다. 이 차이점 때문에 열한 제자는 비록 십자가 사건 앞에서 도망하였으나 훗날 사도가 되었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멸망의 자녀가 되고 맙니다. 이 차이로부터 “예수 잘 믿기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가 드러납니다.
열한 제자들은 가룟 유다와 똑같이 이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던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세상 영광이 자기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사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인 갈릴리의 어부였고 세리였을 뿐입니다. 이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독립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형통과 번영을 꿈꿀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로마와 성전에 동시에 세금을 내야했던 이중과세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정으로 별볼일 없는 소위 하부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이 기쁨이었던 이유는 당시의 사회구조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일단 유명한 랍비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불러줄 랍비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초라한 모습으로 유명하지도 않았지만 이들에게는 불림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습니다. 생애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제자로 불러주심을 고맙게 여겨 제자로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가 되고 난 뒤에 보니 예수님은 보통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능하시다는 말을 붙여도 될 정도의 능력을 갖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기초해서 세상의 영광을 꿈꾸게 됩니다. 이 점이 무척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꿈꾸었던 세상의 영광은 오로지 예수님께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우리”를 이루게 된 뒤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열한 제자의 공통된 상태였다면 이와 차별화되는 가룟 유다의 상태란 어떠한 것일까요? 가룟 유다는 세상 영광을 꿈꾸고 좇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른 제자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다르게 열혈당원이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헌신하고 있었고 필요한 계획이 있다면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만나서 “우리”라는 관계를 형성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대한 꿈과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열혈당원이었다는 사실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가 가진 세상에 대한 목적의식은 견고하였기에 결코 허물어지거나 양보될 수 없었습니다. 소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가 이루는 모든 만남은 목적성취에 종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에 대해서도 가장 명확하고 명석하게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다른 열한 제자들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들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을 불렀고 왕으로 등극하시는 대관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가룟 유다는 이 상황이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님을 파악합니다. 자신이 따르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실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윗 왕의 전성기를 이루겠다는 꿈도 꾸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의 용도가 제로 상태임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가룟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을 때 가룟 유다는 발끈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에서는 향유가 쓸데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마음에서는 향유는 값진 것이었고 예수님은 쓸데없는 분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식과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꽂혀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당시의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날 분이셨고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난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는 반드시 세상 탈출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예수 믿으세요.”라고 합니다만 이런 전도는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을 믿어야 삽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떠난 예수님입니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상태는 세상을 빠져나가신 후에 세상에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 밖에서 세상에 머물던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완전히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예수님께서 살아서 세상을 등지고 떠나셨다는 점입니다. 살아서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과 “우리”가 될 수 있어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처럼 몸이 죽어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라면 예수 믿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몸이 죽어서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중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몸이 살아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예수님을 편하게 믿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을 떠난”이라는 수식어를 빼버립니다.
교인들에게 세상적인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예수님의 능력을 끌어들여 목적과 목표를 이루라고 충고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임한 저주를 몫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 계열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오며 압도적으로 득세하고 있습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가 돼야 할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난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예수쟁이들은 가룟 유다들입니다.
예수 잘 믿기의 어려운 점은 세상을 떠난 예수님과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가지게 된 신분의식을 목욕하듯이 씻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식 하나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께서는 십자가 생활화의 어려운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을 떠난 예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이 하루에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씩 세상을 떠나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밟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밟아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반복하면서 실제로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예수 믿기에 실패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붙박이가 되어버린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을 팔거나 이용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 곁에 있었고 예수님께 용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버릴 관계를 유지하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3차원의 이 세상 떠나기를 주저해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연쇄과정을 기억함으로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의식과 마음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모든 상황에서 떠나고 모든 사건에서 떠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떠나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날수록 천국은 점차적으로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이 절실한 현실로 느껴진다면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에 깊이 잠겨서 무방비로 끌려다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천국은 비현실이 됩니다. 천국이 까마득한 전설처럼 느껴진다면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반복될 때에 천국은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절실해집니다. 이 세상 어떤 상황보다도 천국이 더 절실한 현실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죽기 전에 천국이 가장 우선적인 현실이 되는 것이 바로 천국에 간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은 지금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상황보다도 천국이 현실로 느껴진다면 의식과 마음이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하늘이 열렸습니다. 천국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떠난 예수님과 “우리”가 되는 과정을 날마다 반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삶은 이름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알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많은 분들이 실패합니다. 예수님께서 괴로워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예수님과 “우리”가 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우리”가 된 뒤에 예수님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세상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세상 영광을 이룰 기반이 무너지자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먼저 있었던 것은 세상 영광을 바라는 목적의식이 아닌 예수님과 “우리” 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죄적 체질로 인한 세상 사랑이 좌절되는 순간 흔들렸지만 예수님과 “우리”가 되었던 상태는 무너지지 않았기에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지금 세상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예수님과 “우리”로 묶인 상태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 문제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 것을 바랄 자격도 없고 잘 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세상일이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라는 상태라면 적어도 열한 제자와 같은 입장입니다. 빨리 십자가를 붙잡고 수습하여 세상을 떠나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대한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분명하다면 스스로에 대해 “나는 가룟 유다 계열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고 진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이루겠다.” 혹은 “어디에 도달하겠다.”와 같은 세상적인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은 십자가 자아의식과 천적관계입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으로 세상에 대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면 가룟 유다 계열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열두 제자가 예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귀신을 쫓는 역사를 일으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 또한 이들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0절에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으로 기뻐한다면 가룟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하에 세상에 대한 목적의식과 목표의식을 갖는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산다면 가룟 유다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늘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세상을 떠난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세상 떠남에는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떠난 자리에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 도달하면서 이 세상일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세상을 떠나면 의식과 마음이 영생을 얻습니다. 내 의식과 마음이 떠난 자리에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 임하며 삶이 이루어집니다. 죄의 체질 때문에 이것을 해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은 자꾸만 나의 의식과 마음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실제로 나의 의식과 마음이 세상의 문제를 등 뒤로 돌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과 마음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붙들리거나 붙박이가 되어버린다면 가룟 유다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세상 떠나는 일을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 구체적으로 반복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내심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의식과 마음은 영생을 누리고, 나의 의식과 마음이 없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식과 마음이 내려와서 삶이 이루어져 갑니다. 이 체험에 실패하지 않고 성공함으로써 십자가 생활화로 주어지는 다중적인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죄악 된 체질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떠난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