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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불행 실패 탈진을 근절하는 새 계명_태승철 (요한복음 13:31~3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1.10|조회수8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행 실패 탈진을 근절하는 새 계명>의 줄거리:

예수님의 제자 된 표시를 서로 사랑함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삶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불행도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없는 모든 성공이 실패고 이런 사랑이 없는 모든 행복이 단순한 환각일 뿐입니다. 사랑 없이 성공을 추구하고 환각 상태의 행복을 열망하면서 사람은 지치고 탈진하게 됩니다.

 

불행 실패 탈진을 근절하는 새 계명

(요한복음 13:31~38)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불행 실패 탈진을 근절하는 새 계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불행 실패 탈진을 근절하는 새 계명”

올 한 해는 불행하지 않고 실패가 없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하지 않고 실패가 없으며 탈진이 없는 삶은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새 계명 하나면 됩니다. 우리가 새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불행이 근절됩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지치고 탈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심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의 문자들을 붙잡고 기억하며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계명과 율법이 없어도 새 계명 하나면 됩니다. 다만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과 계명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약에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율법과 계명들에 담겨있는 정신과 취지가 있습니다. 이 정신과 취지가 새 계명 속에서 다 이루어지기 때문에 새 계명 하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은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다 성취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해보자면 새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과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정말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싶다면 문자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과 계명 속에 문자적으로 들어있는 모든 취지는 지켜집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새 계명 하나를 지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자 그대로를 지키는 것이 아닌 정신과 취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정신과 취지는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통해 성취되었기에 우리는 문자적으로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대신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새 계명을 지킬 때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지치거나 탈진하지 않습니다.

단,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새 계명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제자들이 새 계명을 지키는 조건과 시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시는 연쇄과정이 성취된 후에야 지켜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시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은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삶에 적용해 나갈 때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남자다 혹은 여자다, 내가 남편이다 아빠다 등의 이러한 자아의식은 세상에 속한 자아의식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속한 자아의식으로는 새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 것 같이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정말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일한 자아의식이 될 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내가 자녀의 아빠이고, 배우자의 남편이고, 직장에 나가면 직원이라는 세상에서의 자아의식을 가지고는 절대로 새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태의 삶은 불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계명은 반드시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십자가 자아의식을 통해서만 지켜집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새 계명입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유지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하나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나의 존재감을 느껴야 할 대상이 세상에 없는 상태입니다. 대통령 앞에 있을지라도 대통령이 나의 존재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그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껴야 할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나의 길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건강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있음을 느낄 필요도 없고 좋음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은 남편으로 살던 대로, 아빠로 살던 대로, 회사의 직원으로 살던 대로 유지하며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 종교인들조차 새 계명을 아예 젖혀둔 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세상이 준 자아의식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새 계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없다면 새 계명은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계명이 지켜질 수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나 아내로, 아빠나 엄마로, 회사의 직원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모든 삶에 불행과 실패와 지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새 계명의 특성은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율법조항들을 기억하고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전제로 주신 것입니다. 새 계명은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방향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포함됩니다. 죽었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사람으로부터 기쁨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구약의 율법과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기억하며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의식과 마음이 주님 안에서 하늘에 닿아있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있는 상태이기에 지금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해야 될 말과 행동이 따끈따끈하게 아버지로부터 직접 내려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아내를 대하고 있습니다. 이때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면 율법과 계명을 따라서 기억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아내로부터 있음을 느낄 필요도 없고 좋음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아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특수한 상황에 맞추어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될지를 다 내려 보내주십니다. 따라서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로서의 율법이나 계명을 다 기억하거나 붙잡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방향성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 구체적 내용들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미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세상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한 다 떨쳐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진다면 타인을 위한다는 방향성만을 가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하느냐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뜻을 보내주셔서 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착각하여 주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나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들은 이러한 상태를 진단하는 청진기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들의 문자를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단이지 사랑의 구체적 내용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내가 처한 상황을 주도하시고 이끌어 가심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될지 그때그때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새 계명의 특징입니다.

 

사랑에는 구체적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사랑할 것인가, 무엇을 줄 것인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사랑의 구체적 내용을 특정할 수 없고 한정 지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와 장애인을 고치셨고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죄인과 매국노와 창녀 등의 사회적 하층민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기득권층과 최고 권력자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인 언사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층민들과 함께 지내시다 공개적으로 왕이심을 선언하시는 대관식을 하시는가 하면 채찍을 들고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엎는 과격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이시기도 하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는 평화의 왕과 채찍을 들어 성전을 엎어버리는 혁명가의 모습은 정반대이지만 이러한 모습이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으셨고 대제사장에게 창녀가 더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모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들을 미워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도 사랑하셨고 대제사장도 사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창녀나 죄인과 세리를 대할 때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하층민을 대할 때도 병자와 장애인을 대할 때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방향성은 정해져 있었지만 사랑을 통해 주신 내용물은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와서 따르겠다고 할 때는 재산을 다 팔고 따르라며 뿌리치십니다. 서기관이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할 때도 뿌리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사랑의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보자면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누구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맞추어서 행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 거리로 좋음을 발견하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면 이 세상을 살 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방향이 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대해 죽었으므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방향성을 취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방향성이 정해지면 하나님의 뜻은 마치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것처럼 내려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분명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라는 방향성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성이 고정되면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자꾸 묻는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은 밝혀져 있기에 돈 문제, 건강 문제, 이웃과의 문제, 가족과의 문제 등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들 앞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꾸 딴 소리 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돈 문제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미래에 대해 확실한 보장을 달라며 졸라대는 것은 신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어떤 과제,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분명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향성이 정해지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사람과 일과 과제와 대상과 환경 안에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려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더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니 너희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 사람을 향하여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받아서 주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 36~38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 예고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에 대해 깜짝 놀라며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에 대해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부인은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라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믿으셨을 것입니다. 다만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따르고자 한 예수님은 이 세상 안에서 왕이 되시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시고 다윗의 전성기를 회복시키는 거사를 이루실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면 베드로는 자기 말대로 예수님을 따르다 죽을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일은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베드로는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방식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재판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실 예수님과 얽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 세상을 떠나는 예수님과 얽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부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에게만 새 계명은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알아보는 표식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은 절대로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사람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한 번도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 세상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르시기 위하여 추진하고 성취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생각은 예수 믿기를 제일 어렵게 만드는 난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세상을 탈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떠난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게 됩니다. 의식은 지극한 존재감을 느끼고 마음은 지극한 좋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오직 하나의 원리로 새 계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새 계명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하겠다는 하나의 방향성입니다. 그때그때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물 흐르듯이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면 당장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의 모든 행위가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이 제일 쉽고 제일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부담이 아닙니다. 사랑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타인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삶입니다. 부부관계가 불행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부모자식관계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세상 살기는 이보다 쉬울 수 없습니다. 남에게 주기만 하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고 지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셔서 세상을 빠져나가고 계셨습니다. 그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무서웠기 때문에 “세상을 빠져나가는 예수님과 나는 얽혀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무서웠던 이유는 세상 떠나기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고 승천하신 뒤에 베드로는 비로소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구원의 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된 베드로의 특징은 베드로전후서에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나그네로 규정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영광을 추구하던 베드로가 이제는 세상에 대해 외인임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예수님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베드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화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듯이 베드로는 복음이 낳은 독생자 복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 아버지만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이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 계명은 나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랑의 방향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하고 성공이 보장되고 지치지 않는 삶의 방식은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올 한 해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에 대한 관계에서 사랑의 방향성 안에서 끊임없이 십자가 자아의식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주어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주기만 하며 사는 동안 끝까지 행복하고 끝까지 성공만 하고 절대 지치지 않는 삶을 사는 새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을 유지하면 새 계명이 밥 먹듯이 이루어지고 호흡하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아버지만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지게 해주시는 복음을 허락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그 복음이 낳은 독생자 복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 두 복음을 붙잡고 불행의 그림자조차 실패의 흔적조차 지침의 조짐조차 볼 수 없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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