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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길, 진리, 생명인 예수님 실제로 가지기_태승철 (요한복음 14:4~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1.15|조회수9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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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길, 진리, 생명인 예수님 실제로 가지기>의 줄거리: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 익숙한 그 정도만큼 예수님을 관계하며 길로서 진리로서 생명으로서 충분히 가지고 누리며 있는 겁니까? 우선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뜻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하시는지 모르면 가짐도 누림도 없으니까요.

 

길, 진리, 생명인 예수님 실제로 가지기

(요한복음 14:4~6)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길, 진리, 생명인 예수님 실제로 가지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길, 진리, 생명인 예수님 실제로 가지기”

본문은 너무나 유명하고 소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여러분께서는 길이신 예수님을 실제로 누리고 계십니까? 또한 본문에서 예수님은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진 여러분은 무엇을 누리고 계십니까? 생명이신 예수님을 가지고 누리신다면 어떤 느낌을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길이고 왜 진리라고 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생명이라고 하셨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참고하는 주석들을 보면 외람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과연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있도록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처럼 본문의 말씀은 유명하지만 유명한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우선 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6절 전체를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말씀을 주된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부분을 앞선 말씀에 이어지는 부차적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논리적 구조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부분을 주된 내용으로 생각하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로 오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하다.”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보기로 합니다. 문장의 논리만을 놓고 보자면 예수님이 아니라도 길과 진리와 생명을 가질 수 있다면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물론 절대 그럴 수는 없지만 문장에 담긴 의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로 오는 것입니다. 다만 아버지께로 오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선 말씀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음이 요동치지 않게 하라는 뜻임을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마음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 6절의 말씀을 풀어보자면 “나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버지께로 오기 위한 길과 진리와 생명은 세상천지에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께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다.”라고만 생각한다면 말씀에 담겨진 의미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버지께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그런데 길과 진리와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6절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의 마음이 하늘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하고 진리가 필요하고 생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기로 하고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 왜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부터 먼저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합니다. 길이 필요한 이유는 아버지와 나의 마음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나의 마음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여기에서 저기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이 간격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차이에서 생겨납니다. 저는 강릉에 살고 있는 시민입니다. 제가 청와대에 살고 있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민과 대통령이라는 간격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또 저 같은 사람이 대기업의 회장님을 만나고자 하여도 간격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다만 이러한 간격들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강릉에 살고 있는 제가 만나려는 분은 한국이나 미국의 대통령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 중의 하나인 제가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 간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이 계신 곳은 4차원 천국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3차원에 살고 있는 제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차원의 간격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극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심에 비해 저는 죄악과 더러움과 추함에 절여진 장아찌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간격과 거리가 되어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있는 간격을 극복하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조차 간격을 극복하고 실제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대통령 만 명을 모아놓아도 그 존재감이 당해낼 수 없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과 나의 간격을 극복해내셨습니다. 예를 들어 10억을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10억을 갖는 상황까지 가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합니다. 돈 뿐만이 아니라 인생은 목표와 길입니다. 다만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형통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목표의식도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따르는 나를 아버지께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십자가 예수님과 틈새 없이 밀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함은 수평적 목표의식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고자 하심은 수직적 목표의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목표의식을 갖는 것은 예수님의 목표의식을 횡으로 절단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시려는 목표의식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도달하게 하시는 길이십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려는 목표의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 치고 가고 싶다는 소원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처음으로 아버지께로 가는 목표의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세상에는 나와 대통령의 간격을 극복하게 해줄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의 간격을 극복하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가서 만나야만 하는 아버지는 영이십니다. 영이시기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심을 압니다. 그밖에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론과 속성에 대한 가르침을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내용들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괄호 안에 들어가는 묘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묘사하고 많은 이야기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운다 하더라도 결국 그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 안에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때 나의 부름이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께 도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름이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가 부르는 이름이 실제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 보장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서 29장 13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나 그 부름이 천국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진리는 이름과 실재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실재에 연결됨이 없는 이름 부르기는 헛됨이고 거짓입니다.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 맥락에서 진리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실재하시는 아버지께로 정확하게 도달하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는 부름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에서 수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었어도 선민의 부름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었고 선지자들도 항상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목표로 삼고 예수님과 밀착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귓속에 정확하게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진리이신 이유입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이 실재하시는 하나님께 도달되지 않으면 그 이름은 헛된 것이 됩니다. 진리 속에 있지 못하고 거짓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리로 가지고 누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위처럼 확고해집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것은 나의 부름이 아버지께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이 아버지의 마음에 전달되고 있다는 확고한 확신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가진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부르면 아버지께서는 나의 부름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짜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자녀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관계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나의 부름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대통령과는 연락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 대통령도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부름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가질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생명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길과 진리에 대해 살펴보았던 내용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이 실재하시는 아버지께 도달한다는 이 진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앞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을 “아버지께 도달하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하다.”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길, 진리, 생명이라는 개별적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와야 한다는 사실과 관계해서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아버지께로 오는데 왜 길과 진리와 생명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심도 알 수 있습니다.

길은 간격의 극복입니다. 내가 대통령과 만나고 싶어도 나와 대통령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어서 불가능합니다. 또한 재벌 회장님을 만나고 싶어도 마찬가지로 큰 간격이 있어서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대통령과 재벌 회장님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실로 무한한 간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목표로 삼으면 이 간격은 극복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끌고 가시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간격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로 나의 마음을 끌고 가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간격 없이 밀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는 간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내 마음이 올라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올라타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과 간격이 없는 예수님의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간격은 극복됩니다. 청와대에서 느닷없이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온다면 기쁨은 둘째 치고 정말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게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그 초대장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살아있음입니다.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지 않으면 아버지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려면 생명이 있어야만 됩니다. 생명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맥락에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살아있다, 죽었다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장례를 수없이 치러보았습니다. 고인의 시신을 닦고 옷을 입혀드리는 염을 시작할 때에 유가족들은 시신을 붙잡고 통곡을 합니다. 그래도 시신은 의식이 없기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기에 옆에 유가족이 있어도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시신은 욕구도 없고 바람도 없습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은 것으로 채우려는 욕구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이로부터 아버지께로 오기 위해 필요한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4차원 천국에 계셔서 육체의 오감으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 하늘 아버지의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입니다. 시신은 유가족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시신과 똑같은 상태입니다.

유가족들은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아무리 붙잡고 흔들어도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남은 쌍방 간의 존재를 의식함으로부터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께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로 와서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시신이 움직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존재감이 제일 크기 마련입니다. 적어도 사장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보다도 사장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장님과 말하고 있지만 시체입니다. 사장님을 의식하고 있는 시체입니다. 시체가 된 순간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도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을 우선적으로 의식하는 동안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게 되었다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시체가 된 것입니다. 유가족이 시신을 아무리 흔들어도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임을 확신하고 열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활성화될 수 없다면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돈을 의식하고 돈을 열망하는 중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시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시체와 만날 수 없고 관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바랄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으면 세상의 모든 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좋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드디어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생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시체입니다. 유가족이 옆에서 울어도 의식을 못하는 시체와 똑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의식도 없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여 열망하는 마음도 없는 상태의 시체와는 하나님께서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있음의 의식과 하나님을 향한 좋음의 마음이 활성화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생명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활성화되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활성화됨으로써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와 아버지의 간격이 극복되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이 실제로 아버지의 귀에 들리도록 이름과 실재가 연결되는 진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내가 실제로 관계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도록 생명이 되어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주어진 과제를 잘 이루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앞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간격 없이 밀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이 더 깊이 뿌리내려서 만사를 대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은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하나가 된 아버지께서는 이 지상의 모든 삶에 대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오려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3차원에 사는 동안에 4차원에 계신 아버지께로 나의 마음이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밀착함을 목표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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