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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일한 자아의식과 다양한 열매 현장>의 줄거리:
참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 주제는 연합과 그 증거인 열매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연합은 실제 어떤 상태로 이루어질까요? 바로 자아의식의 형태입니다. 모든 다양한 자아의식은 관계에서 생기며 속사람의 연합 상태를 드러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단 하나의 자아의식으로 다른 모든 관계를 열매 맺는 현장으로 삼으라 하십니다.
유일한 자아의식과 다양한 열매 현장
(요한복음 15:1~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일한 자아의식과 다양한 열매 현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일한 자아의식과 다양한 열매 현장”
사람은 다양한 관계에서 다양한 내용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단 하나의 유일한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다양한 자아의식의 내용을 갖게 했던 다양한 관계들은 자아의식을 주는 관계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현장의 관계로 변하게 됩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유일한 자아의식과 다양한 열매 현장”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참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 키워드는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는 상황을 비유로 삼아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했다는 사실은 열매로 확인되고 증명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연합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까지의 말씀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모순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지와 포도나무는 언제나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나무의 곁가지를 잘라서 열매 맺는 가지에 양분을 모아주는 정지작업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비유로 삼아 붙어있는 가지들 중에 열매 맺는 가지가 있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을 경우에 잘라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나무에 가지가 이미 붙어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미 붙어있는 가지들을 제거하여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해진 사람만이 예수님께 붙게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제부터 붙으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지가 이미 붙어있는 포도나무의 실제상황과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합은 논리적으로 똑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연합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연합이 이루어지려면 깨끗해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해짐은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때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늘 해왔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의 연합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무엇으로 확인되고 연합 상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연합의 증거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연합 자체가 이루어지는 실제 상태가 “깨끗함”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다만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깨끗해졌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목요일 밤이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금요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다만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제자들이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뒤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연합하는 상태를 염두에 두고 3절의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사건은 초시간적 초공간적 사건이라고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깨끗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와의 차이점은 실제 포도나무와 가지는 이미 연합된 상태에서 농부에 의해 깨끗하게 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깨끗해야만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깨끗함이 연합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깨끗함은 자아의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자아의식은 성별에 대한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부모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형제나 자매라는 자아의식도 갖게 됩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나 아내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아이를 낳으면 아빠나 엄마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외에도 사회적으로 다양한 자아의식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다양한 관계에서 생긴 자아의식이 활발하게 살아있는 상태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는 깨끗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은 자아의식만으로 더러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아의식의 특징을 염두에 둘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식은 인격이라는 속사람의 연합입니다.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속사람이 부모님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대한민국과 연합한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라는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다른 형제와 연합한 상태이고, 회사의 직원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회사와 연합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먼저 만난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 대상과 연합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연합하려고 할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연합은 반드시 첫 번째 자아의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을 위해서는 깨끗해짐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만나기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자아의식이 없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가지기 전에 있었던 자아의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이고 부모님의 자녀이고 형제들의 형이고 동생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세상에서 생긴 모든 자아의식을 없애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끗함입니다. 그리고 깨끗함은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으로 나의 사건이 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십자가 사건을 자기의 사건으로 가진 상태를 전제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깨끗해졌기에 이제부터 과제는 붙어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자아의식의 죽음입니다. 남자라는 자아의식, 자녀라는 자아의식, 부모라는 자아의식, 남편이라는 자아의식, 회사의 직원이라는 자아의식, 목사라는 자아의식, 의사라는 자아의식, 선생님이라는 자아의식 등을 비롯한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모든 자아의식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이 모든 자아의식이 십자가에서 죽는 상태가 깨끗함입니다. 이렇게 죽은 다음에 예수님과 연합하여 첫 번째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자아의식에 대해 죽은 자이다.”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통해 깨끗해집니다.
이 상태에서 열매 맺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나에게 자아의식을 갖도록 연합했던 관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깨끗해졌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이 다 지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나의 속사람이 연합하지 않았지만 겉사람으로 이루어진 실제 관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에 대해 죽는다고 해서 실제로 나와 부모님과의 관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이 관계는 자아의식을 주는 관계가 아니라 열매 맺는 관계가 됩니다.
나는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세상의 모든 자아의식이 지워진 자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기존에 존재하던 관계는 열매 맺는 관계가 됩니다. 이전에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으로 살았습니다. 부모님을 향해서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소원과 바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열매 맺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이라는 자아의식 대신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면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열매 맺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일까요? 그동안 나에게 자아의식을 갖게 했던 수많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자아의식이 다 지워진 깨끗한 상태는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동안 자아의식을 주던 모든 관계의 대상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하늘에서 갖고 계신 생각과 계획을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연합하고 있다는 증거의 열매가 됩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의식을 가졌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은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으로는 하나님께서 부모님을 향해 가지신 뜻과 계획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라는 자아의식으로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향해 가지신 뜻과 계획도 열매로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상대하는 대상들을 향해 갖고 계신 뜻과 계획들을 이루시려면 먼저 그 대상과의 관계가 규정하는 자아의식이 십자가에서 지워져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열매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이어서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기존의 자아의식이 다 지워지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한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의식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아의식이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구하는 모든 것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에 대한 자아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구하는 것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자아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서 자녀에 대해 무언가를 구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열매는 맺힐 수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자아의식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서 “나는 나고 아이들은 아이들이다.”라는 상태가 될 정도로 속사람의 연합이 지워진다면 그만큼 예수님과의 연합은 탄탄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럴 때 속에서 자녀에 대한 바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바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합하기에 다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자아의식이 남아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열매의 씨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생각입니다. 그 씨가 나를 통해 열매 맺기 위해서는 자녀에 대한 자아의식이 완전히 지워져야만 합니다. 자녀뿐만이 아닙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아내고 남편이라는 자아의식도 지워져야만 합니다. 세상이 주는 자아의식이 지워지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만 유지되는 깨끗한 상태에서만 열매 맺힐 수 있습니다. 하늘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고, 세상을 향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될 때에 연합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아의식은 속사람의 연합 상태입니다. 내가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이 회사의 직원이라는 자아의식보다 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부모님보다 회사에 대해 더 마음을 쓰게 됩니다. 약한 자아의식은 곧 약한 연합 상태입니다. 친구와의 관계보다 아내와의 관계를 더 신경 쓴다면 친구와의 연합이 아내와의 연합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과의 연합이 약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과의 연합이 지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하나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멋대로 생각하고 계획하면서 말하고 행동할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가 없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 없는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관계에서 내가 아버지라는 자아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실제로 열매 맺는 관계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늘 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이 씨입니다. 그 씨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열매로 나타나야 자녀와의 관계 또한 충실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별 볼 일 없이 되어버리는 이유도 자아의식 때문입니다. 남편이라는 자아의식, 아내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에 부부관계에서 열매는 맺힐 수 없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아가는데도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으로 남편이나 아내라는 자아의식을 지워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배우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씨가 되고 말과 행동을 통해 열매 맺게 됩니다. 실제로 열매 맺는 부부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과 공부와 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자아의식을 규정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먼저 일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일에 대한 아버지의 뜻이 씨가 되어서 나를 통해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일에 대해 실제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자아의식은 그 어떤 것이든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지워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과의 연합은 불가능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씨로 삼는 열매가 이 땅에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생 수많은 중첩된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아의식을 주는 관계의 대상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모든 대상들에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생각이 단 하나도 열매로 맺혀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 인생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몇 년이나 되셨습니까? 30년, 40년, 50년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한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열매를 맺어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자녀라는 자아의식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지워야만 합니다. 십자가가 아닌 그냥 지우는 것은 불효자일 뿐입니다. 부모님의 자녀가 아니라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부모님에 대해 갖고 계시는 뜻과 생각이 씨가 되어 열매 맺는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 5~6절을 보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에 던져 사른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소모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떠나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알렉산더, 시저, 칭기즈칸 같은 세계적인 정복자들도 있고 우리나라에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발명가들과 과학자들 노벨상 수상자들도 있지만 이들 또한 예수님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온 세계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만든 스티브잡스의 친부는 무슬림이고 본인은 일본 불교를 좋아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치기준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생각을 이 땅에서 이루는 존재이며 그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떠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과 뜻 중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준 자아의식이 지워졌을 때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모든 계획과 생각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 중에 이룰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지는 못했더라도 여전히 스티브잡스가 만든 스마트폰은 대단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인류 구원을 앞당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사건은 가룟 유다와 빌라도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신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 또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소모품으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스티브잡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가시기 위한 하나의 소모품이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이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버리신 소모품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당된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3장 9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일을 이룬 모든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들로도 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일조차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모든 업적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나 앗수르를 선민을 일깨우기 위한 막대기로 쓰셨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무관하다면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섭리의 소모품으로 쓰셨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지옥행 사형수들로 태어납니다. 이 지옥행 사형수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소모품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음악가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소모품일 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연합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처럼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고 마음은 하나님의 좋으심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갖게 된 상태이고 예수님과 연합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나와 함께 사위일체를 이루셨다는 증거로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이 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특별한 사람 없이도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다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지옥행 사형수들뿐만 아니라 원하신다면 나무나 돌을 통해서라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의 섭리의 소모품이 되어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된 자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허락하시려는 많은 계획을 갖고 계시고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기존의 자아의식을 깨끗하게 지우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만을 유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철저히 연합하여 당신의 생각을 열매 맺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가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기회를 백분 활용함으로써 모든 관계가 열매 맺는 현장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