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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극하는 예쁜 짓>의 줄거리:
천지를 창조하신 영원하신 아버지 앞에서 내 나이가 80세고 100세가 된들 예쁜 짓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100세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어른이라는 의식을 가진다면 이야말로 난센스이지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행하는 예쁜 짓에 동서고금 남녀노소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밉상을 떠는 일은 지금 까지로 족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극하는 예쁜 짓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극하는 예쁜 짓>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극하는 예쁜 짓”
예쁜 짓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목회할 때 예배당에서 성탄절이 되면 교회학교가 행사를 합니다. 위로는 청년대학부로부터 해서 중고등부 초등부 유년부 유치부 영아부까지 있습니다.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무대에서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즐겁습니다. 언제든지 단연코 가장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영아부와 유치부입니다. 선생님들은 3~4세 아이들에게 진땀을 흘리며 가르쳐서 무대에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한 절반은 앞에 선생님을 따라서 몸짓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혼자 팔을 흔들기도 하고 다른 곳을 보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초등부나 중고등부는 잘하고 못하고가 분명하지만 유치부나 영아부 아이들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다 예쁩니다. 실수를 해도 예쁘고 선생님을 잘 따라해도 예쁘고 울어도 예쁩니다. 예쁜 짓의 왕은 역시 영아부와 유치부 아이들입니다. 요즘은 예쁜 짓이라는 단어를 연애하는 남녀사이나 부부사이에서도 많이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남편을 향하여 “우리 남편이 예쁜 짓을 하네!”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 말입니다.
예쁜 짓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예쁜 짓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4차원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밉상을 부리는 삶을 중단하고 예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하십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80살이 넘고 100살이 넘었어도 어린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하나님 앞에서 예쁜 짓 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40대 초반 때에 목사님들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90대 중반을 넘기신 목사님이 계셨고 다른 목사님들은 70~80대의 은퇴하신 목사님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느꼈던 것이 있습니다. 90대 중반을 넘기신 목사님 앞에서는 70~80대의 은퇴하신 목사님들도 어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100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가지는 연장자의 의식을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가진다면 난센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행하는 예쁜 짓에는 동서고금과 남녀노소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밉상을 부리는 일을 중단하고 예쁜 짓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예쁜 짓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특징적으로 세 개의 관계가 언급됩니다. 이 세 개의 관계는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제자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세 개의 관계는 우리에게서도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면서 이어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언제나 이 세 관계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그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사의 동료를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심에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이 세 개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입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는 방향성이 사람으로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주도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종교와 신을 선택하여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택할 것인가, 어느 신을 택할 것인가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이 방향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그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제자들은 사랑받은 자들로서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하향성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 하향성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을 계명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고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받은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사람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받은 사람들의 올바른 반응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은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주신 사랑을 완성시키는 마침표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반응함으로써 받은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는 계명을 지킴으로 나타납니다. 계명을 지킴이 없으면 주시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명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계명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대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드는 마침표가 계명입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내게 허락하신 사랑은 완성됩니다. 온전히 완전히 내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계명과 별도의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이 완성되는 단계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은 힘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구원 속에서 허락하시는 모든 은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선 4절의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부활이고 승천이고 보좌 우편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에 더해 한 가지를 더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어떤 맛인지를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의 자리를 주시지 않고 계명만 지키라고 하셨다면 이것은 고역이고 율법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좌 우편의 자리까지 주셨습니다. 보좌 우편의 자리를 받았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가 된 것입니다. 사위일체가 되면 “나”라는 몸 하나를 사용하는 사위일몸으로서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이로부터 받은바 은혜가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가를 알게 됩니다.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10절에 이어서 11절을 보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킬 때 앞서 일어난 모든 은혜의 사건들이 활성화되고 살아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한 조건으로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조건이 계명이라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는 상충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사시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하나이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라고 말씀하신 바대로 영원 전부터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거하셨고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 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사건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연합이 이루어짐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계명을 지키면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되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할 때에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되심은 기계의 두 부품이 볼트와 너트로 조여지는 것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 되심 안에서 아버지도 예수님도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움직임을 통하여 일어나는 상황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연합되어 계심을 전제하고 계명을 지키게 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빠와 두세 살 된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아빠의 마음속에는 두 아이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이들이 “아빠!”하고 달려와 뽀뽀를 하면서 안깁니다. 그럴 때 아빠 마음에 이미 있던 사랑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출렁거리고 용솟음칩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과 하나 되신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사시는 동안에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예쁜 짓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갖고 계신 아버지의 사랑은 출렁거리고 용솟음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자극하고 커지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인이 되신 장로님에게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출근할 때는 딸에게 뽀뽀 한 번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뽀뽀를 해주었는데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안 해줍니다. 그러자 “아빠한테 뽀뽀해주면 용돈 달라는 대로 줄게!”라고 했지만 그래도 뽀뽀를 안 해주자 아쉬움이 생깁니다. 장로님의 마음에는 딸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시큰둥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아빠의 볼에 뽀뽀를 해줍니다. 그러자 시큰둥해졌던 사랑이 불시에 기름을 붓듯이 살아 오르고 커집니다. 이렇게 사랑이 활활 타오르면서 용솟음치고 넘치는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마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고 출렁거리고 활활 타올라서 사랑 안에 거하는 상태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예쁜 짓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세 살 된 아이들이 아빠한테 달려와서 뽀뽀를 하고 예쁜 짓을 하면 아빠의 마음에 있던 사랑이 용솟음치고 꼭 껴안아줘서 사랑 안에 있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장로님의 딸이 이제 나이를 먹어서 뽀뽀를 안 해주는데 어느 날 평소에 안 하던 뽀뽀를 해주면 아빠의 마음이 사랑으로 딸을 꼭 껴안게 됩니다. 예쁜 짓을 하는 바람에 껴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바로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시큰둥하고 시무룩할 수도 있습니다. 그 상태에 예쁜 짓은 불을 지르게 됩니다.
아버지가 꼭 껴안듯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예쁜 짓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이 땅에는 의식과 마음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식은 아버지의 존재감만으로 채워져 있었고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좋으심만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고 언제나 아버지와 연결되신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지시하시는 것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는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로 사시면서 계명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시든지 아버지께서 그 순간에 주시는 따끈따끈한 지시를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다 식어버린 율법이 아니라 아버지와 연결돼있는 상태에서 당장 주어지는 생각과 지시와 계획과 뜻을 받아 사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입니다. 그렇게 따끈따끈한 아버지의 생각과 지시와 계획과 뜻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대상에 대해 다양한 말씀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서로 다른 말씀과 행동들이 하나의 핵심적인 정신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관계에 이 사랑이 이식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10절의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너무나 예뻐하셔서 꼭 껴안아 주시고자 하심이 사랑 안에 거함이듯이,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 북돋아지고 용솟음치고 넘쳐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예쁜 제자들이 있느냐! 어떻게 이렇게 예쁜 나의 성도들이 있느냐! 어떻게 이렇게 예쁜 나의 신부가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껴안아 주시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날 때에 기억해야 할 패턴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깔때기를 하늘을 향하게 해서 하늘 기운이 주입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깔때기의 넓은 부분이 세상을 향해 열어둔 상태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좋음이 주입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깔때기 부분이 하늘을 향해 고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입구를 내가 만나는 사람을 향하여 놓고 하늘로부터 나를 통하여 오는 좋은 것들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으로써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내 앞에 원수가 나타나든 친구가 나타나든 상관없이 따지지 말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지금 주어지고 있는 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계명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따끈따끈하게 주어지고 있는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살면서 말하고 행동하면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예쁜 짓이 됩니다. 나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시무룩하거나 시큰둥하지 않고 기름을 붓듯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예뻐하셔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예뻐하시면 그것이 곧 아버지께서 나를 예뻐하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삼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예뻐서 껴안고자 하시는 상태가 되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딸에 대한 사랑이 있어도 딸이 예쁜 짓을 하지 않으면 딸을 껴안아 줄 수가 없습니다. 시큰둥하고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반응할 일들이 많지만 세상에 대해서 다 죽고, 오직 아버지로부터 주어지는 따끈따끈한 지시를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예수님을 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껴안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 또한 제자들을 껴안아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11절의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이렇게 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위일체의 기쁨이 진정으로 너희 것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아버지께 예쁜 짓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께서 껴안아 주시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예쁜 짓을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나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은 자극됩니다. 삼위 하나님이 나를 예뻐 죽겠다고 여기시며 껴안으시는 그 기쁨이 어떠한가를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무엇이 보이고 귀에 무엇이 들리더라도 내가 마주하는 대상이 사람이라면 무조건 하늘로부터 나를 통해 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 안에 있는 나의 대한 사랑은 시큰둥하거나 시무룩하지 않고 활활 타올라 출렁이고 넘쳐나서 나를 껴안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포옹을 받으시던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도 누리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랑을 시큰둥하고 시무룩하게 만드는 밉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에 줄 수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하늘로 열 수 있으면 됩니다. “나는 하늘로 열려있고 이 사람에게 주입구가 돼줘야 하는 깔때기다.”라는 깔때기의 마음가짐을 가지면 됩니다. 깔때기의 자세와 태도를 취하면 됩니다. 그럴 때 주게 되는 것은 내 힘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따끈따끈한 계명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라. 저 사람에 대해서는 저렇게 해라.”고 알려주시는 것들은 깔때기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성입니다. 그렇게 하면 삼위 하나님이 내가 하는 예쁜 짓을 견디지 못해 껴안아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 하신 것은 이웃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웃에게 깔때기 사랑의 태도를 취할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예뻐하셔서 껴안아 주십니다. 그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쁜 짓을 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북돋는 계기이자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껴안는 기쁨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깔때기 사랑을 통해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껴안는 기쁨을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 일곱 살짜리가 부리는 것 같은 밉상은 그만두고 두세 살 아이의 예쁜 짓을 통해서 아버지께 성령님께 주님께 꼭 안기는 기쁨 속에서 여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