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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자들은 세상 무용론자 외계인>의 줄거리:
지상의 예수님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이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로 나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제자들이 이 세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밉상이고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은 일색으로 세상 무용론을 온 존재로 증명하는 외계인들이기 때문이지요.
제자들은 세상 무용론자 외계인
(요한복음 15:18~27)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제자들은 세상 무용론자 외계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 무용론자 외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이 아무 용도가 없다고 온몸으로 증명을 하고 사는 외계인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로 이어지는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과 연관 지어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극을 받아서 출렁거리고 넘쳐나게 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은 예수님을 너무나 예뻐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예뻐하시며 껴안으시는 모습을 상상하면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계명이란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아닙니다. 지금 내 속사람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예수님의 계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의 계명을 기억하면 우리의 인격은 깔때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라는 인격이 깔때기라고 볼 때 넓은 부분이 하늘을 향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체적으로 해야 될 말과 행동들이 예수님 안에서 알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환경적인 자극에 반응해서는 안 됩니다.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우리를 껴안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예쁘게 보이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문자로 기록된 계명이 아니라 살아있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연합해서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럴 때 외부의 환경적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오직 나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살아있는 계명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세상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일들이 나타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이쁨받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밉상이고 천덕꾸러기로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미움받을 것을 당연하게 여기라는 말씀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에는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밉상으로 살게 될 것을 당연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지는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자녀를 학교에 보내야 하는 부모님들이 제일 걱정하는 것은 교우관계입니다. 자녀가 밉상으로 따돌림을 받을까 걱정합니다. 선생님에게도 귀여움을 받고 친구들에게도 호감을 사는 학교생활을 바랍니다. 그렇기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내가 너를 너무 예뻐하기 때문에 네가 학교에 가면 선생님과 아이들이 너를 밉상으로 보겠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건 난센스입니다. 우리도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런 느낌으로 읽지를 못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는 말씀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이해하기 위해서 외계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았습니다. 외계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없습니다만 외계인이라는 말은 지구라는 행성 바깥에 살고 있는 인격적 생명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 바깥에 살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세상 바깥에 살고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은 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천국은 언어 체계와 가치 체계와 신념 체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뿌리를 두고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외계인으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내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가치관이나 신념 체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외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계인의 특징은 세상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세상무용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이 제자들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속사람을 들여다보라고 권면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세상에서 밉상으로 여겨지고 있는지, 오히려 세상에서 귀여움을 받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그것이 제자의 모습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혹은 어디를 가든지 외계인으로 사는지 지구인으로 사는지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지구촌의 시민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천국이라는 별에서 온 외계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8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관계를 앞서 규정하는 것은 세상과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세상과 예수님의 관계가 안 좋기 때문에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 또한 안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이어지는 19절 하반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은 선택하여 부르신 제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이 세상입니다. 제자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과정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세상을 빠져나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세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무관한 채 아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기준이기에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는 한 세상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서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셨습니다. 이 일은 십자가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이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선택을 받아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외계인이 되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딸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딸이 아무리 어머니의 몸을 흔들어도 어머니는 죽었기에 더 이상 딸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무엇이 보이고 귀에 무엇이 들려도 그것에 대해 의식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세상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존재감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마음은 세상에서의 좋음을 추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뭔가 있다고 느껴야 그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데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에 채우고자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의식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고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의식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채워지고 마음은 아버지의 좋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의식과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그대로 이관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가진 자나 권세 잡은 자들 앞에서 그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예의상 존경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마음으로 존재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박사님, 총장님, 재벌들의 무게감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연합한 제자들에게 세상은 굴욕적으로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의식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마음의 채움을 위하는 일에 대하여 세상은 완전히 무용지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코로나 백신 접종률은 성인을 기준으로 80~90%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백신 무용론자들이 있습니다. 백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저는 아스트라제네카를 2차에 걸쳐 맞았는데 동료 목사님들은 아스트라제네카는 맞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맹물 백신이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1차를 맞을 때 무척 심한 몸살과 근육통을 겪었기에 목사님들께 맹물 맞고 죽을 뻔했다는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세상 무용론자이고 외계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경쟁의 판에서는 이기면 이길수록 존재감을 인정해줍니다. 획득한 자, 성취한 자를 높게 여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 무용론자는 밉상을 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재벌들 앞에서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대로 “돈은 해가 되는 독극물이고 없애야 될 배설물이다.”라는 소리를 하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재벌들 앞에서 천하가 굽실거리는 이유는 돈의 힘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거지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이 돈을 오물덩어리로 취급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 빈정거리기 위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빈정거리기 위해 하는 소리거나 못 먹는 호박 찔러 보겠다는 심보는 무시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이 세상 가치들을 유해한 것이고 독극물과 같고 버려야 될 배설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기에 세상은 이를 모욕적으로 느끼고 미워합니다. 이렇게 의식과 마음에 대하여 세상무용론을 주장할 정도로 외계인 같은 모습이 십자가 사건 하나를 붙잡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외계인 같은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제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서로 권력 좋아하고 서로 건강 장수 좋아하고 서로 돈 좋아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친할까요? 실질적으로 좋아하지도 않고 화목하지도 않으며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이나 좋아함은 예외 없이 변색되고 변질되어 있습니다. 전부 자기 자신에 대한 병적인 집착현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100%로 느끼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100% 느끼면서 예수님 안에 있지 않다면 누구도 타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만족을 위하여 빨대 꽂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 남편을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십자가 없는 사랑 이야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갈등과 경쟁의식과 다툼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미워할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살고 있을 뿐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면 당장에 미워합니다. 세상 사람들끼리도 미워하는데 여기에 천국이 개입되면 똘똘 뭉쳐서 미워합니다. 평소에 앙숙이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일치단결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군중들 또한 평소에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자로 여겨서 격리시켰던 바라바와 같은 살인강도조차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풀어주라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자신들과 더 가까운 사람으로 의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외계인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지구라는 세상이 아닌 외계의 별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외계의 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외계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와닿을 것입니다. 외계는 지구 바깥의 공간입니다. 천국 또한 지구 바깥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외계의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 가닿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열망이 외계의 천국에 계신 아버지께 가닿아야 합니다.
반면 세상에서는 “지금 죽으면 천국 간다.”라는 말은 금기입니다.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도 지금 죽는 것은 재수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다가 천국에 가야 제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서 가는 천국은 금기시하는 세계입니다. 천국은 먼 미래의 일이라야 제값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무병장수하며 사는 것에 비하면 천국은 당장 버려야 될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천국은 언제나 세상에 비해 열등한 곳이고 어쩔 수 없어서 죽을 때 붙잡는 차선책일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천국이라는 외계로 가자는 말을 하면 “외계인, 당신이나 가시오!”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대의 나이에 아무 주저함 없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살아있으면서 주저함 없이 천국으로 가신 예수님은 외계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에 대해 외계인이셨던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또한 외계인입니다. 여러분도 지구의 사람이 아닌 외계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외계인이라고 상상해보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가 실감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의식 속에는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혹은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한 제자들이라는 외계인들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게 되었으니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 대한 존재감과 이 세상의 가치들의 좋음에 대한 열망이 없는 세상 무용론자입니다. 이들에게 이 세상은 정을 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을 외계의 천국으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에서 연합한 뒤로는 외계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하나도 갖고 싶어 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아직도 세상이 좋다면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박해받을 것을 팔자로 생각하라는 내용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대하던 방식은 예수님과 연합한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관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팔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나 희망도 갖지 말라는 것이고 아예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대우받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미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칼로 쳐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도 이 세상에서 좋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외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아지기입니다. 이 같아지기를 전제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같아지기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본받아 같아지기”가 있고, 둘째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연합하여 같아지기”가 있습니다. 본받아 같아지기에서 예수님은 모범이고 모델이 되십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은 독자적인 상태에서 예수님과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기에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복음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연합하여 같아지기뿐입니다.
예수님의 의식에는 100% 아버지의 존재감만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100% 아버지의 좋음만이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연합하면 아버지의 있음을 의식하고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의식하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한 상태에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의식하시고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십니다. 예수님이 의식하시고 좋음을 느끼시는 그대로 내가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연합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거나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할 수는 없습니다. 연합된 상태에서 나 대신에 예수님이 의식하시고 느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식하시는 아버지께서 나의 의식의 존재감이 되시고, 예수님의 느끼시는 아버지의 좋음이 나의 마음에서 좋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버지를 의식하고 아버지의 좋음을 느끼는 동안에 나도 예수님과 똑같은 외계인이 됩니다. 이후의 내용은 오늘 저녁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서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고 이제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에 대해서 세상 무용론자이고 외계인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 사람인 아닌 외계인으로 아내나 남편 노릇도 하고 직장에서 일도 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모든 성도는 외계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불러내주셔서 그 선택하심을 따라 이 지구에서 사는 동안에 외계인이 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외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