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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사망한 내 양심 대신 책망쟁이 성령님_태승철 (요한복음 16: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03|조회수9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망한 내 양심 대신 책망쟁이 성령님>의 줄거리: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아니 어떻게 그렇게 비열할 수가 있어?' 이렇게 말들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특징은 영적으로 양심이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버린 내 안으로 들어오신 성령님이 바로 나의 양심이 되어 주십니다. 절대로 용납 불가한 오류에 대한 무감각을 성령님이 책망하시고 가책을 주셔서 비로소 제자가 됩니다.

 

사망한 내 양심 대신 책망쟁이 성령님

(요한복음 16:1~15)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망한 내 양심 대신 책망쟁이 성령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망한 내 양심 대신 책망쟁이 성령님”

내 양심은 죄 속에서 사망한 지 오래되었지만 내 양심 대신에 책망쟁이 성령님께서 죽은 양심의 자리에 들어서신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전에 욕쟁이 할머니라는 식당주인이 계셨습니다. 제가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욕을 하는데도 손님들은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책망쟁이 성령님께서 오시면 사실은 책망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책망이 바로 내 양심을 대신하는 일이 됩니다.

책망이란 잘못에 대해서 지적하여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책망하는 경우가 있고 내가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을 양심이라 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양심이 살아있는 상태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지옥행 사형수로서 진즉에 양심이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님께서는 죽은 내 양심의 자리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1~15절까지 중에서 5~11절에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목요일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말씀은 세상에 큰 잘못과 오류가 자행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잘못을 깨달아 책망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도 없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향하여 책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공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류에 대해서는 책망을 하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님께서 오실 때는 책망쟁이로 오십니다. 욕쟁이 할머니가 온통 욕만 하듯이 성령님께서는 온통 책망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보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는 죄의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죄의 상태에 빠져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양심이 없습니다. 흔히 “참 양심도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야비하고 비열하고 못된 짓을 할 때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살아있는 사람 중 누구에게도 양심은 없습니다. 모두가 양심이 죽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하여 양심이 없다고 지적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는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오시면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게 하십니다.

여기서 죄란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 주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한 가지 더 붙인 것이 “의식의 있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의식은 있음을 느끼고 마음은 좋음을 느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럴 때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이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빗나가지 않은 상태라면 의식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앞에 사장님이 있다고 해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님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존재감은 무척 큽니다. 그렇기에 대통령 앞에 선다면 대통령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 의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감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버려도 아무도 탓하지 않습니다. 돈 문제가 크게 발생하면 돈 문제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돈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어버려도 아무도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는 것이 죄이고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빤히 보고 계시는 것을 알면 대통령이 나타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죄이고 양심이 죽은 상태임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상황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면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의식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은 공백의 마음이 채워져야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채워지리라는 확신과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들어가셨기에 우리도 하나님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 예수님의 일이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 크기의 맞춤형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요 주권자 하나님의 좋으심을 젖혀둔 채 돈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것은 양심이 없고 양심이 죽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좋겠다, 저것을 가지면 좋겠다, 그것을 이루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좋겠다는 말은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향하여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조금도 “하나님을 가지면 좋겠다,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면 좋겠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좋겠다.”라는 열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빗나감으로써의 죄입니다.

이 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께서 있으시다는 사실의 기척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헴! 나 여기 있다”라고 기척을 내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붙잡지 않음은 곧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의 화살을 100% 아버지 하나님만을 향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을 들여다본다면 의식 안에는 하나님이 있으셨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좋으심으로 가득 차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의식과 마음이 24시간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며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 속에 있으면서도 잘못인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한 책망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있음의 기척이시고 좋음의 표징이신 예수님을 붙잡지 않는 양심 불량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향하여 의식과 마음이 날아가지 않음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내 앞에 있다고 해서 아내를 하나님보다 크게 느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령님께서 오셔서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책을 느낄 수 있는 양심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성령님께서 책망을 하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내 죽은 양심을 대신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책망하시는 사람은 살아날 뿐만 아니라 인생이 제자리를 찾고 꽃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책망하신다는 것은 나쁜 의미나 심판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나의 죽은 양심의 자리에 오셔서 나의 양심이 되어 주시기에 진짜 올바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잘못된 길은 이래도 저래도 복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서 기쁠 수는 없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느끼는 기쁨은 도둑놈이 도둑질을 잘했다고 기뻐하는 것과 똑같은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강도와 깡패가 약탈하고 착취를 성공적으로 했다고 기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한 기쁨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살아나야만 합니다. 내가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양심이 살아나야 되는데 죽은 양심이 살아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죽은 양심 대신에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성령께서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나의 상태를 책망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100% 고정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면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이 틀어지고 이 세상을 향하는 상태가 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이것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가야되겠다.”라는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모든 사람은 양심이 죽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셔서 책망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가 예수님을 붙잡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떤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하나님 아버지가 있으시다는 것,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이런 모든 일들이 다 거짓이라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마음에서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생겨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를 가정만 해도 불안이 급습하는 상태는 성령님의 책망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지 않으면 속이 불안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어진다면 성령님의 책망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대단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본질적 역사는 책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젖혀두고 이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찾는 나에게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주시고 책망하십니다. 주님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되고 아버지를 향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고 계십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 것을 향하여 의식과 마음이 달려가는 중에 혼자 십자가를 붙잡고 죽지 못해 안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세상을 향하여 의식과 마음이 달려가고 있는 상태가 잘못이라는 책망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여러분이 세상에서 잘되지 않으면서도 십자가를 놓지 못하고 예수님과 연합하려고 애쓰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과 연합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으면 내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적으로 함께 거하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더 이상 함께 거하지 않는 상태와 의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의에 대해서도 성령님께서는 책망쟁이가 되어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 누구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의 옮음과 그름에 대해 관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유익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뿐입니다. 옳음과 그름을 생각해도 옳을 수가 없는데 아예 생각조차 않으니 결코 옳을 수는 없습니다. 옳은 일을 하면 나중에 상을 받는 정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복과 은혜와 충만함과 행복과 기쁨은 옳음 속에 있습니다. 그름 속에는 축복이 없기에 그른 중에 복 받기를 원할 수도 없습니다. 옳으면 축복은 저절로 주어집니다.

여기서 의란 옳음, 정의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예수님께서는 옳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옳음을 찾아갈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됩니다. 또한 옳음이 무엇이냐가 문제가 됩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유익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면 이 세상을 살며 말하고 행동할 때 옮음과 그름이 관심의 첫 번째 자리에 놓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붙잡게 하십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일이 옳고 그름에 대한 관심입니다. 있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주권자이십니다. 내가 하려는 말과 행동이 그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에 맞느냐 틀리냐를 관심하게 됩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했을 때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혹은 내게 어떤 유익이 주어질 것인지를 고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에 맞느냐 틀리냐를 관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관심의 기준을 놓치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한다든지 내 유익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하려고 한다면 성령께서 책망하십니다. “네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까? 하나님도 그런 뜻을 가지고 계실까? 네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너의 멋대로 하는 것이냐? 너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곤란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냐? 상대방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춰주기 위하여 하는 것이냐?”라고 성령님께서 가책을 주시고 책망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보시며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고 나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주장하시고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성령의 책망이 주어집니다. 제가 통화한 분과 같이 그 책망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느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성령의 책망이 없으면 제멋대로 말하고 자기 유익과 체면을 세우고자 합니다. 위기를 모면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고자 합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죽은 양심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돼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자 주권자로 매 순간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나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맞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요구되는 사람이 저 같은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반응을 고려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신경 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사람들은 그러한 말과 행동을 하고자 할 때 걱정과 불안을 느낍니다. 성령님께서는 책망으로 평강이 깨지게 하시며 주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하십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면 의식과 마음이 아버지께로 집중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과 생각만을 찾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으로 11절을 보면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은 이 세상에서 심판을 하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상징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태를 책망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평가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임금 자체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절대로 사람들이 나를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신경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든 칭찬하든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것을 신경 쓰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 땅에 사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신경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나를 평가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양심 있는 자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젖혀두고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신경 쓰는 것은 양심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앞서 본 14장 30~31절에서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이 세상적인 존재감은 무조건 무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의 존재감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상태에서는 세상 것에 대해서 어떤 존재감도 느끼지 않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평가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상태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쓰려고 하면 책망쟁이 성령님께서는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십니다. 개인적으로는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평가하실 때에 바른 길이고 좋은 길을 갈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뭐라고 하든지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개가 만 마리가 모여서 짖어대면 그 소리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 짖는 소리가 아무리 커도 달리는 기차가 멈추지는 않습니다. 개 만 마리가 짖어대는 것처럼 세상은 나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 평가가 긍정적이라도 성령님께서는 세상의 평가에 취하지 않게 하십니다. 책망쟁이 성령님께서는 “네가 지금 세상 사람들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느냐?”라고 책망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시면서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죽은 양심의 자리를 대신하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살아있음은 내가 잘못한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잘못을 깨닫는 것은 축복의 비결입니다. 축복은 잘못 없는 나에게 달려오기 위해 대기 중이고 넝쿨째 들어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책망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려는 모든 축복이 마음껏 달려올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책망쟁이 성령님의 역사를 생활 속에서 날마다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여러분에게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책망받아 오류만 없으면 축복의 왕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의 양심에 자리에 오신 성령님의 책망에 민감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책망하심을 따라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름이 줄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게 오신 성령님께 감사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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