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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적 외로움은 하늘평안의 토대>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행하신 모든 사역의 목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한 사람을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친히 사랑하시는 상태가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시는 사랑을 받기 위한 사람의 상태가 바로 외로움입니다. 십자가의 외로움이 아버지의 사랑을 끄는 힘이지요.
세상적 외로움은 하늘 평안의 토대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적 외로움은 하늘 평안의 토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적 외로움은 하늘 평안의 토대”
하늘 평안의 토대가 왜 세상적 외로움이라는 것일까요? 세상적으로 외로운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적으로 외로움 가운데 계시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 외로움에 대해 끌리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주님께서는 본문 27절에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시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음으로써 창조주이시고 온 나라와 민족과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친히 사랑하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외로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외로움은 원죄로 인한 상태이기에 아담의 후손에게 운명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시는 사랑 안에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채로 머무는 것은 원죄에 죄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시는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외로움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반드시 외로움이 극복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모든 세상적인 외로움 극복의 시도와 결과를 죽이고 본래의 외로움으로 돌려놓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이 본래의 외로움이 하나님이 친히 베푸시는 사랑으로 극복된 상태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친한 사람이 있어서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친함의 대상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외로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푸시는 사랑으로 극복돼야 하기에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다면 원수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친히 사랑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친히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는 상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루신 모든 사역의 최종목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결과는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개별적이고 직접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의 최종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수님께서 매달려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되 예수님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예수님과 나를 못(?) 구분하시는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아버지께 무엇인가 구하는 소리가 들릴 때 독생자 예수가 구하는 것인지 예수님을 껴안은 내가 구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실 정도로 예수님과 강하게 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연합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에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하나님께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을 베푸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밖에 있는 외계인 천국에 가고 싶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지독하게 연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기에 예수님과 연합한 나를 아버지께로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의 전부입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예수님의 역동적인 방향성을 놓치면 신앙은 무조건 거짓이고 헛것이며 오류입니다. 이 방향성을 놓친 상태에서 부르는 예수 이름은 악령의 역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깨워줘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아버지께로 가기 위함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께로 가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의 입구이고 살아있을 때만 십자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죽은 다음에는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기에 아버지께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 역동적인 예수님의 방향성을 놓치면 절대로 신앙이 성립할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방향성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떠나신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기억함으로 예수님의 방향성이 간절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은 이미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소망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어제 어떤 선교사님과 말씀을 나누었는데 “제발 천국과 십자가를 써먹으며 살자. 묵혀두어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향성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자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29~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서는 아직 외로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신 분임을 믿는다고 고백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31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의도대로 풀어보자면 “너희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믿는다고 대답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질문하기도 전에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십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근거로 생각하였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핑크빛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방향성일 수 없었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친히 사랑하시는 이유 두 가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이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의 이유는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에서 믿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보시고 시큰둥하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은 결코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32~33절에서는 드디어 외로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는다는 제자들을 향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온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세상을 떠나 승천하신 사건이 자기들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질 것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을 올바로 믿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두시고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아서 철저하게 세상적 외로움의 상황 속으로 던져지십니다. 다만 이것은 제자들에게도 일어나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믿게 되고 아버지께로 가고자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아버지께서는 친히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이 세상적으로 극단적인 외로움의 상태가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방향성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세상적 외로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처하셨던 지독한 세상적 외로움이 모든 사람 각자에게도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의 상태가 아니면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외로움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믿음도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작 이 세상 안에서 원하는 일들에 도달하는 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처하신 극단적 외로움의 상황에 도달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음을 몰랐습니다.
이 외로움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필수적 단계입니다. 이 외로움의 경험이 없다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외로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 홀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외로움이 똑같이 주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때 하나도 걱정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외로움이 찾아올 때 주어지는 것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안은 세상적 외로움의 토대 위에서만 주어집니다.
외로움의 상태가 반드시 필요하기에 누군가 항상 옆에 있어서 외로움을 느낄 수 없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지된다면 아버지께로 갈 계기가 없어지고 친히 사랑받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이 아버지께 사랑받을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 것은 아버지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는 세상적 외로움의 상태입니다. 이 외로움의 상태가 반드시 주어져야 합니다.
한편 33절 하반부를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오해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을 초대교회가 유대인과 로마정부로부터 받은 박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평화로운 시대에도 반드시 세상적 외로움이라는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처하신 외로움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될 제자들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의식과 마음에서 관계하던 대상들이 존재감과 좋음을 상실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어떤 관계에 대해 의식에서 존재감이 제로로 느껴지고 마음에서 좋음이 제로로 느껴진다면 그 관계는 끊어진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부모 자식관계가 유지되고, 형제자매 관계가 유지되고, 친구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일어나야 될 일은 끊어짐입니다. 내가 관계하는 대상의 존재감과 좋음이 의식과 마음에서 느낌 제로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다 끊어져서 실제로는 외톨이 외로움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시는 외톨이 외로움의 상태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면 바로 이 외로움의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고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는다고 탄압하는 사람은 없기에 외적인 탄압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려면 반드시 운명처럼 주어진 외로움 극복의 시도로 관계를 다 끊고 본래의 외로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환난을 예상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외로움의 상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뼛대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로움을 방해하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의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끊어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다 끊어낼 때 외톨이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주뼛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적 외로움에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외로움이 목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혼자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버리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에 대해서는 외로워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고 세상적인 외로움으로 돌아와 보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평판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적 외로움으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환난으로써의 외로움으로 담대하게 들어가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가 주어지게 됩니다. 혼자인데 평안합니다. 외톨이인데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와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주뼛대지 말고 담대하게 십자가로 외로워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버림받아 외로웠던 것처럼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적 외로움 안에는 천국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천국을 찾고 진정한 세상적 외로움의 토대를 둔 하늘 평안을 가진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루어집니다. 외로운 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고 찾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 사람까지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여러분에게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울 때마다 핸드폰을 드는 대신 십자가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외로울 때마다 전화 걸고, 외로울 때마다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상태는 외로움입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해도 성공해도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실패한 사람을 찾지 않으며, 성공해도 환호 속에서 외로워질 뿐입니다. 그리고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세상에게 요구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로우면 술을 마시든지 극장에 갑니다. 외로우면 다른 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더라도 외로운 상태에서 하면 죄악입니다.
아담에 의해서 유산으로 물려진 것이 외로움입니다. 이 외로움을 세상에서 극복하려는 것이 악입니다. 아담이 물려준 외로움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물려준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시도를 죽이고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적인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홀로됨 속에 하늘의 평안이 주어질 수 있으며 인생의 행복 또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팔자나 운명처럼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홀로 행복해지실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만나 연합함으로써 반드시 홀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해진 다음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계명을 따라 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진짜 예수님의 제자이자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이 세상적으로 극단적인 외로움에 들어가는 것을 담대히 감행하게 해주시고 그 세상적인 외로움 안에 있는 4차원의 평안을 진짜 내 것으로 실감나게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