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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_태승철 (요한복음 17: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10|조회수7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의 줄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내게서 사라지면 나의 영생도 사라집니다. 영생은 살아생전에 약속되었다가 죽은 뒤에 받게 되는 무슨 보장 된 물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항상 현재 적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바로 영생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

(요한복음 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생”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3절부터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의 의미를 명확하고 쉽게 정의하신 참 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안다”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히브리어의 야다(ידע)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이나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서로를 알게 되듯이 연합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구절의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사후의 일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앎은 육체가 죽기 전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영생은 죽은 뒤에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는 것으로 요한복음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산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이 살아있는 동안 천국적으로 살다가 몸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전에 인생과 영생을 다 얻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구원은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육의 구원은 인생의 구원을 말합니다. 인생의 구원이란 인생이 영생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영생에 포함된 인생이 바로 천국적인 삶입니다. 이 천국적인 삶의 특징은 목마름이 없는 생수가 흐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쁨, 감사와 같은 단어들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영생뿐만 아니라 영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행 사형수의 운명을 짊어진 채 사는 사람들은 지옥적으로 살게 됩니다. 지옥적으로 살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을 천국적으로 살다가 육체가 죽으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지옥적 삶이 어떠한지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특징을 갈증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지옥에 들어간 부자가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를 부러워하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이 갈증이 지옥의 특징인데 이러한 갈증은 삶에서도 나타납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벌에 처한 사람들의 특징은 지옥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허전하고 매일 외롭습니다. 이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향하여 구걸하며 삽니다.

세상에는 인생을 천국적으로 사는 영생을 얻은 남녀가 있고, 인생을 지옥적으로 사는 남녀가 있습니다. 천국적으로 사는 영생을 얻은 사람은 배우자에 대해서는 영생의 남편과 아내가 되고, 자녀에 대해서도 영생의 부모가 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지옥적으로 사는 영벌의 남편과 아내가 되고, 자녀에 대해서도 영벌의 부모가 됩니다. 천국적인 사람으로 일을 하든지 지옥적인 사람으로 일을 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국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이 세상의 삶이 천국적 삶이 되고 모르면 지옥적 삶이 됩니다. 이렇게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주님께서는 “영화롭게 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을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을 천국적으로 영생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가? 내가 예수님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고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고 계신다면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이고 천국적으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게서 영광을 못 받으신다면 말뿐이지 실제로는 여전히 영벌에 처해있는 상태입니다. 지옥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게서 영광을 못 받으신다면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과 이론을 많이 알지라도 실제로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이름과 이론을 많이 알면서도 지옥적으로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시 1절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고 제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대상 또한 나 자신이고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때는 십자가의 죽음과 이로부터 연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부활과 승천의 과정 전체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내용입니다. 지금도 이 기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당시에는 더더욱 이해할 수 있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는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메시아로 모든 민족을 정복하고 선민나라의 왕이 되신다면 전 세계가 바라볼 것이므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내용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기도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실 십자가는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의 자리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적인 기준을 적용해보면 십자가는 영광스러움과는 가장 반대의 위치에 있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의 예수님으로 여겨지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광(榮光)은 한 사람의 의식 안에서 전혀 의식이 되지 않던 어떤 대상이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히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에 섰을 때 조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극장 안은 깜깜한데 배우만 보이는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의식 속에 어떤 대상 하나만 보이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대상은 내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참혹하게 죽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깜깜한 극장에서 조명을 받는 배우만 보이듯이 제자들의 의식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이 의식될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1절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고 유일하게 보이는 대상이 되시는 상태야말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꿈에서라도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갖는 자리에 가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영광이란 높아지고 많이 갖는 경쟁에서 1등을 한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신 자리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가장 낮은 자리였습니다. 목숨조차 지킬 수 없는 십자가의 자리로 가셨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꿈에 나타날까 무서운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참혹한 모습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제자들의 의식과 마음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것 같은 영광의 대상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본래 영광은 선망과 부러움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비참한 자리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부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의식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보일 때에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십자가가 영광의 자리라면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부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부러움이 있어야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모든 영광의 자리는 선망과 부러움의 자리입니다.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갖게 하는 자리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초등학생 자녀를 빙상선수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훈련을 시킵니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를 보면 부모님의 마음에는 부러움이 있습니다. 그 자리가 영광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럽기에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아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에 대해 적용해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내게 영광의 예수님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꾸 부활과 승천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누리시던 영광을 되찾으시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1절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내가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영광의 자리가 선망과 부러움의 자리인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내 인생의 유일한 부러움이자 소원의 대상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상태입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영화롭게 하다”라는 표현으로 묘사하십니다. 영화는 곧 영광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자리를 내 평생에 가장 부러운 자리로 여길 때에 십자가의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상황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 때 영생은 주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최고였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가진 가치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자랑하고, 권력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외모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복 중의 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십자가의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고 인생조차 천국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의 자리에 서고 싶거나 서있는 사람들은 전부 배타성을 띠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 혼자만 영광의 자리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광을 받는 상태에서는 배타성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소원을 따라서 똑같은 죽음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영광의 주인공들은 혼자만 영광을 오래도록 누리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부러워하는 자에게 그 영광을 다 나누어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광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영광의 자리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천국의 기준으로 보셨습니다. 천국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1등을 한 사람은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좌우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속사람이 천국에서 1등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죽는 자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복 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부러워하며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 상태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천국에서 나의 영광이 됩니다. 세상을 이기고, 세상에 좌우되지 않고, 천국에서 1등을 하는 것이 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아들 예수와 똑같이 세상에 대한 완전한 죽음을 줄까? 돈 1,000억을 줄까?”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 때문에 시끄럽습니다만 대통령후보 중에 예수님을 아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도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무엇을 해주랴?”라고 물어보신다면 “하나님!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서 죽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실 때처럼 대통령으로 세우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대통령후보 중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나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아버지께 소원을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너무 부럽고 소원인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기에 영생을 얻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그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부러워할 사람이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버지께서 이끄셔야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의식에서 예수님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만을 보는 것이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느닷없이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감과 아버지 하나님의 좋으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서 십자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아무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이론적으로 연구해서 박사가 되더라도 아버지에 대해서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과 어떤 대상이 앞에 있어도 아버지의 존재감이 의식에서 첫 번째로 느껴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피조의 세계에서 마주하는 대상이나 일어나는 상황 때문에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주권자로 안다면 당연히 사람이나 상황이나 사건 앞에서도 아버지의 존재감이 흔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의식에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에 의해서 아버지의 존재감이 수시로 제거됩니다. 아버지가 어둠 속에 묻혀버리시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걱정할 때는 아버지가 창조주로 살아계신다는 존재감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와 연합하여 안다는 것은 무슨 급한 일이 생겨도 아버지의 존재감을 의식이 꼭 붙잡고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아버지보다 더 큰 존재감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존재감과 비교해서 티끌만큼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우리의 의식은 아버지의 존재감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죽으나 사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십자가 예수님만 보여야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이 자아의식으로 굳어질 때만 아버지와 연합하여 알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아버지가 최고로 좋다는 느낌에 마음이 붙잡히고, 아버지가 유일하게 있으시다는 느낌에 의식이 붙잡힌 상태에서 천국적 삶이 됩니다. 밥을 먹든, 세수를 하든, 장을 보든, 직장에 가든 우리는 천국적으로 살게 됩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천국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알면 됩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이 두 가지 유일하심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부러워할 때 주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러워하는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너도 같이 죽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알게 됨으로써 영생은 이 땅에서부터 천국적 삶의 모양으로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를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오늘부터 천국적 인생을 시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모든 고통과 수치를 제하시고 죽음만을 가져가라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 여생의 가장 큰 부러움이며 가장 큰 축복이 되게 하여 주시고 실제로 이 죽음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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