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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세상의 복과 세상과 구별되는 복_태승철 (요한복음 17:6~1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12|조회수8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의 복과 세상과 구별되는 복>의 줄거리: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신 자신은 이제 떠나왔던 천국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가지시는 마지막 소원은 다름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소원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세상의 복과 세상과 구별되는 복

(요한복음 17:6~19)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의 복과 세상과 구별되는 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의 복과 세상과 구별되는 복”

제목을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세상의 복과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 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기도 속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생애 마지막 기도 속에 예수님의 진심 어린 소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제자들이 받아 누릴 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것이 17장 전체의 핵심 요지입니다.

앞서 영광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기도의 근본 취지는 내게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내게 진정한 복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17장 전체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드렸듯이 17장의 핵심 요지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복의 구체적인 내용은 “저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갑니다만 여전히 세상에 남아 살아가야 될 제자들에게 가장 큰 복을 주시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실제로 누려야 될 복은 세상에 속하지 않음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가장 큰 복은 “세상이 필요 없는 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복은 복이 아니기에 세상이 필요 없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삶의 특징은 험악하다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7장 9절에서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삶이 힘들고 괴로운 이유는 세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은 세상이 없어도 되는 복입니다. 이 복을 받아야 세상의 삶도 힘들지 않고 괴롭지 않고 재미있고 신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복은 이와는 반대여서 받으면 받을수록 삶이 무거워집니다. 인격은 세상의 복에 의해 중독되고 그 독성에 의해 죽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또 이 말씀을 중심으로 주일에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나눔을 통해서 아무쪼록 세상의 복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복,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에 대한 간구가 바로 17장 전체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하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복, 다시 말해 세상의 가치들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있는 복을 좇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의 기도 속에서 제자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거쳐야 될 과정을 아주 논리적으로 표현해주고 계십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은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이고 세상과 구별되는 복입니다.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읽지 않은 6절부터 10절을 봅니다. 6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과 기적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줄을 제자들이 알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나타난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으로 예수님께서 초시간적인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취지와 같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마치시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온전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지금의 일처럼 말씀하시며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경 써야 할 것은 동사의 시제가 아닌 상황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이 마무리되고 성령이 오시면서부터 이루어지게 될 상황에 대한 기도로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을 누리기 위하여 제자들에게서 일어나야 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신 분이심을 보는 것입니다. 내 문제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 종교인의 특성입니다. 내 문제와 예수님을 연결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할 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결 상태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심을 보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을 받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문제와 나의 처지를 예수님과 연결시킨다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은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복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습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을 받는 과정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0절을 보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났던 영화와 같은 뜻인 영광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영광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을 받는 두 번째 단계와 연관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연결되어 계심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내 문제와 예수님을 연결시키는 대신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연결시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두 번째 단계는 그 연결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결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결에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제 나누었던 영광에 대한 말씀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십자가 예수님이 내게서 1등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고 계셨던 영광은 변화산의 모습에서 계시되었습니다. 창세 전의 영광이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가지고 계시던 영광입니다. 변화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던 베드로의 마음은 좋음의 단계를 넘어서 황홀경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빛이 투과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 예수님이 너무 좋았기에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랐고 세상에서 추구하던 복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의 예수님을 좋아했듯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똑같이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5절의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변화산의 예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은 상황적으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 다른 상황에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세상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세상을 잊어버렸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모든 복을 잊어버렸습니다. 갖고 싶은 복이 하나도 없게 되었고 세상이 필요 없어졌기에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랐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이 내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실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부러워하면서 “나도 예수님처럼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가 되고 싶다.”라는 소원을 가질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내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변화산의 예수님을 볼 때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졌듯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 세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사라짐으로써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받는 준비가 무르익어가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세상을 제외시켰을 뿐이지 여전히 의식과 마음에는 숙제가 존재합니다. 의식은 있음을 느낌으로써 나의 존재의 근거를 확보합니다. 내가 있어야 될 근거를 찾지 못할 때는 차라리 죽기를 바라게 됩니다. 존재의 근거 찾기는 그만큼 무서운 문제입니다. 사람의 의식은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있음의 근거를 확보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남편이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남편이 있음으로 나의 있음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설령 원수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를 통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대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세상에서 존재의 근거를 찾고자 한다는 점이 일치합니다. 마음 채움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복을 추구하지 않고 십자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 때는 이 세상에 대해 죽게 됩니다. 의식의 존재감 찾기와 마음 채움의 문제가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제거되었을 뿐이지 복이 제시된 상황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2절에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고 사셨습니다. 선민들 중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들이 예수님과 달랐던 점은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되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으셨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의식과 마음의 채움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오감을 통해 수없이 쇄도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을 뿌리치고 오직 아버지를 향하고 계셨습니다. 의식이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져 계셨고 마음이 아버지의 좋음으로 가득 채워져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기쁨이라고 표현하십니다. 13절에서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 예수님도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 세상은 사라지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결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의 의식은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채워져 계셨고,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좋음으로 채워져 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예수님이 내게서 영광을 받으실 때는 세상이 다 사라지고 세상의 복은 불필요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연결되어 계시던 예수님의 복이 그대로 나의 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입니다. 13절의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기도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삶이 기쁘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둡고 우울하고 걱정 근심에 쌓여 있다면 아직도 세상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붙잡고 있고, 마음이 세상 것들의 좋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돈 문제의 존재감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을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셔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으신 하나님 대신에 있게 된 것들을 의식으로 붙잡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의 채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 대신에 세상에 있는 것들의 좋음을 붙잡을 때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음행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음행입니다.

이로부터 의식이 돈을 붙잡는 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가족의 문제, 나라의 문제, 대통령 선거의 문제도 똑같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감을 의식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의해 짓밟히는 것이며 유린당하는 것이며 강간을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의 존재감을 끌어안고 의식하는 중이라면 세상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린당하고 짓밟히고 있기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남편과의 관계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의식과 마음이 강간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잡지 못하는 상황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의식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잡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좋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다만 이 말만으로는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 대신 세상의 존재감을 붙잡고, 마음으로 세상의 좋음을 붙잡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지독하게 잘못된 일인지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유린당하고 있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옛날에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패자의 재산을 약탈하고 아이들은 노예로 잡아가고 아녀자들을 강간하는 참혹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상황이 우리의 인격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빠져들지 않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기를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간구는 주기도문에서도 발견됩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의식은 무엇인가의 존재감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이름 외에는 돈도 가족도 나라도 어떤 이름도 없어지고, 오직 아버지의 이름만 남게 됨으로써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상태입니다. 마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좋음만이 느껴져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좋음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 것의 있음과 좋음을 붙잡고자 하면 붙잡히게 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세상을 도구로 강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험악한 표현을 기억하시고 끊임없이 십자가를 붙잡고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이유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조명을 받으실 수 없다면 그 어떤 성인군자라도 의식과 마음에 세상이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유린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심각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간구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마지막 단계는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기쁨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으면 의식은 아버지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마음은 아버지의 좋음만을 느끼는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복 있는 말과 복 있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룩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9절을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희생 제물을 드릴 때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거룩함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의식과 마음에서 붙잡으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내가 해야 될 말과 행동이 아버지로부터 전달됩니다. 그럼으로써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배우고 보고 듣고 경험해서 아는 대로 내 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을 통하여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5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악에서 구해달라고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죄가 존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일이라면 악은 말과 행동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빗나가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향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한 빗나간 존재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연결되어 계셨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연결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전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 됩니다. 생각 말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는 것은 공자도 석가모니도 소크라테스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못난 사람도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오직 아버지가 주시는 진리를 따라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를 두고 15절에서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내가 제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신앙의 선배들은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처럼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했을 뿐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부러워하면서 세상이 필요 없는 자리로 나가려는 마음과 진심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고 계신 생각은 점차적으로 뚜렷하고 명확하게 증진되어 나갈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처럼 좋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지독하게 좋아하는 자들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복, 세상에 속하지 않는 복,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서 드러나는 마지막 소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각자를 향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담은 기도가 고스란히 다 이루어지는 삶을 언제 어디서나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간구하시는 기도를 이해하여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함께 방향을 맞추어 따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의 복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복, 세상이 필요 없는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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