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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옥 소속 브랜드, '생각하는 사람'>의 줄거리:
'생각'은 이 땅에서 진행되는 자기 삶에 대해서 인간이 주체적이 될 때 나타나는 가장 본질적인 현상입니다. 말과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인간이 주체가 되기에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프랑스 조각가 로댕은 단체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을 조각하면서 그 상단부에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합니다.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지옥 소속 브랜드, ‘생각하는 사람’
(요한복음 18:1~11)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옥 소속 브랜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옥 소속 브랜드, ‘생각하는 사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뒤에는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빼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말리시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서 치료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본문의 장면에 근거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을 못 보신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직접 못 봤어도 사진으로는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보자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에 소속된 사람들의 영혼에 찍히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랜드(brand)는 상표라는 뜻입니다만 본래 “낙인을 찍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는 여우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밖에도 옷 중에는 악어 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고 영국 사람들이 폴로 게임을 하는 모양이 그려진 옷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브랜드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소속된 사람의 브랜드는 바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로댕은 1880년에 프랑스 정부의 청을 받아들여서 “지옥의 문”이라는 조각상을 만들게 됩니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소설 신곡의 지옥편에 나옵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조각하면서 아치의 상단부에 “생각하는 사람”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8년 뒤에 지옥의 문 위에 있던 생각하는 사람을 독립시켜서 따로 크게 다시 조각합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남아있는 높이가 186cm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옥문 위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에서 벌을 받습니다. 그 벌은 라틴어로 콘트라파소(contrapasso)라고 하는데 “상응하는 벌”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탐식의 죄를 지었다면 이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괴물의 먹잇감이 됩니다. 자기에게는 사치를 부리고 타인에게는 아주 인색하게 살았다면 커다란 돈주머니를 굴리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또 예언가나 점술가나 도사처럼 앞을 내다보며 예언을 하거나 점을 쳤다면 머리가 180도 뒤로 돌아가는 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콘트라파소는 이런 식의 상응하는 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벌을 받아 지옥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왜 생각하는 사람이 보고 있을까요? 생각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주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체적 인격을 가졌음은 생각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문 위에 조각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이로부터 생각해볼 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탐식을 하는 죄조차도 인간이 자기의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죄악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흔히 절에 가면 입구에 사천왕상이나 도깨비형상을 한 무서운 형상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댕이 만든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서 내려다보는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은 고상하고 고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상하고 고귀해 보일지라도 이것은 지옥의 소속된 사람에게 새겨지는 브랜드이자 심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의 도장이 찍혔다면 지옥의 소속이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4~6절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하여 로마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머물고 있는 동산으로 옵니다. 4~5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룟 유다를 앞세워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뒤로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집니다. 마치 암행어사나 잠행중인 임금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선에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하면 옳다 잘됐다 하고 예수님을 잡아가면 그만일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공관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왜 예수님이 잡히시는 상황에서 하신 말씀을 중심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내가 그니라”는 말씀은 히브리 언어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사용되었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면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체 되심 즉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행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41장 4절에서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고 그에 대한 대답도 주시는 형식입니다. 이러한 문답 형식은 욥기에서도 발견됩니다. 4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욥에게 질문을 하신 뒤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사용된 어휘는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맥락은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키시는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이심을 드러내실 때만 사용된 표현이 아닙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나라와 열방을 다스리시고 민족들의 흥망성쇠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그니라”와 같은 말씀이 사용되는 영역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창조주로서 하신 일에 대하여 주체이심을 밝히실 때입니다. 두 번째는 역사의 주권자로서 세상을 이끄신 주체로서 밝히실 때입니다. 세 번째로는 구원과 연관되어서 선민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실 때입니다. 예를 들어 바로와 맞서서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홍해를 갈랐으며 광야 40년 동안 먹이시고 입히셨으며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셨고 약속의 땅인 복지로 들어와 정착하게 한 이가 누구냐고 물으신 뒤에 “내가 바로 그니라”고 말씀하시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내가 그니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있음의 문제, 존재의 문제, 역사의 진행과 흐름, 삶의 진행과 흐름, 나쁨에서 좋음으로의 진입과 구원의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삶의 영역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누가 하느냐, 누가 책임지느냐, 누구의 일이냐, 누구의 과제냐”라는 질문에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내가 그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선악과의 의미는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면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누가 책임지고, 누가 이끌어 갈 것이냐에 대한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선악과의 존재는 “내가 그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형상화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책임진다, 내가 한다, 내가 생각해 둔 것이 있다, 내가 이끌어 간다.”라는 하나님의 주체 되심을 드러내는 표현이 “내가 그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살던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쁨의 동산에서 살 때도 삶에서는 생각하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아담이 “누가 이 상황을 생각할 것인가, 누가 이 문제를 떠맡을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 선악과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는 “내가 그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는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나무의 존재를 통해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기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을 받은 아담은 삶에서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서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마다 “내가 그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주체여야 한다.”라고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가정 문제, 돈 문제, 직장 문제, 승진 문제, 인간관계 문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문제와 상황에 대해서 “내가 그니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가 삶에 대해 생각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가서 엎드러집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임을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순조롭게 자신을 체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고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신적 표현을 들은 사람들은 혹시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칠까 봐 두려워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 사건을 진행시키기 위해서 제자들과 당신을 연관시키십니다. 8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러졌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제자들을 보니 누추하고 추레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과 당신을 연관시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무리의 두목으로 생각하고 잡아가게 됩니다.
이사야서 41장 4절을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창조주의 일이고 역사의 주권자의 일입니다. 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대”는 세대에 이어지는 세대라는 의미로써 끝없이 이 세상의 역사가 진행되도록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이사야서 43장 10절에서도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모두 “내가 그니라”는 말씀과 통하는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그니라”는 말씀은 있음과 연관되어 있고, 삶의 진행과 연관이 있고, 구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있음의 문제를 주관하시는 주체이시고, 동식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각자의 인생과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체이시며, 그리고 나쁨이 좋음으로 바뀌는 상황을 위한 구원의 주체이십니다. 이 세 가지 주체성에 대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한 주체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이 바로 “내가 그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되심을 나타내는 “내가 그니라”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위해 잡히심과 연관 지어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말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4절과 28절에서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8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누구냐”라는 대답을 보이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해서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이렇게 사시면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를 든 후에”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뒤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뺏어온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인간이 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누가 할 것이며, 누가 한 것이며, 누가 해나갈 것이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누가 담당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체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스스로 “내가 그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상태입니다.
스스로 돈 문제를 생각한다면 “내가 그니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본래 이것은 하나님만이 돈 문제에 대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돈 문제에 대해 책임질 자는 하나님이시고,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책임지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대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물건을 사고자 합니다. 그럴 때 본래는 “이걸 살까, 저걸 살까”라고 고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그것을 있게 하시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 조용히 하세요! 내가 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문제를 누가 담당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문제는 스스로 자기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기쁨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나 지옥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지옥에 속한 브랜드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화인을 받은 자로서 자기의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로부터 “누가 인간을 구원해 낼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스스로를 가리키신 표현대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을 들어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봅니다. 이는 곧 생각하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누가 구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의미의 예수님의 말씀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 시작되는 체포의 순간에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질 일은 인간이 자기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입니다. 내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한다면 지옥으로 갑니다. 내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내가 그니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뿌리박힌 병입니다. 이 병을 책임질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본문 10절 이후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말리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는 이 말씀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요한은 이 말씀을 체포되시는 순간으로 가져와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체포는 물론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처참함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칼을 들어 내리친 베드로의 반응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누가 이 상황을 타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그니라”고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칼을 들어 저항하는 베드로는 승리와 평안을 쟁취하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말리십니다. 이기고 성공하고자 주체적이 될수록 지옥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것 같을 수 있고, 안 좋을 수 있고,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생각할 책임자가 누구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화인을 받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생각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생각을 따라가게 되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느라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혹은 예수님과는 반대로 이 세상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잘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다르다면 지옥으로 들어가는 상황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기쁨의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로부터 죄와 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있음과 좋음을 하나님 대신에 다른 존재로부터 채우는 것입니다. 의식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의 존재감을 붙잡고, 마음으로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의 좋음을 붙잡는 죄의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것이 죄이고, 이로부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생각함이 악입니다. 이 죄와 악을 책임질 분은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체포되셔서 십자가의 여정이 시작되는 초두에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답이 바로 “내가 그니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삼위일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주체성이 눈에 보이도록 표현된 형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주체를 거부하고 부인함으로써 아버지의 주체성이 온전히 표현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과제였습니다.
우리의 주체성이 쓰여야 할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기로 작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성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 허락된 주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삶에 대해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문 상단부에 브랜드로써 엠블럼으로써 심벌로써 찍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하는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발견하심으로 십자가나무가 선악과로 변하게 하시고 그 상태에서 여러분의 삶이 오늘도 에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가슴팍에 찍혀진 브랜드였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생각하는 사람”은 고상하게 보이지만 지옥에 소속되는 브랜드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주체가 필요하여 내 생각이 작동하려는 모든 순간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의 “내가 그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세상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고, 삶 전반에 걸쳐 아버지의 “내가 그니라”는 음성이 들릴 수 있는 에덴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