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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아버지 주체성의 화형식이 일상인 삶 _태승철 (요한복음 18:12~2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19|조회수6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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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버지 주체성의 화형식이 일상인 삶>의 줄거리:

과격 시위에서 종종 눈에 띄는 화형식은 사라져야 할 대상을 상징하는 허수아비나 그림 따위를 만든 후 그것을 불태우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 땅을 향하시는 주체성의 형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 주체성의 형상이신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태도 표명이 나옵니다. 모두 과격 시위의 화형식을 방불합니다.

 

아버지 주체성의 화형식이 일상인 삶

(요한복음 18:12~27)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버지 주체성의 화형식이 일상인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버지 주체성의 화형식이 일상인 삶”

예수님께서는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에게 체포당하십니다. 대제사장의 집안 뜰로 끌려가셔서 재판을 받으시기 직전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문 지키던 여종에게 들켜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부분입니다. 이 이후에 베드로는 두 번 더 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게 됩니다.

 

제목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주체성을 일상적으로 화형시키면서 살고 있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화형식(火刑式)은 옛날에 중범죄인들을 처벌할 때에 불에 태워서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요즘은 실제로 화형식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만 시위 현장에서 거부하거나 적대시하는 무리나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 등을 태우는 것으로 그 형태가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미 시위를 보면 미국 국기나 대통령의 모형을 불태웁니다. 화형식의 불길은 시위대에 참여한 사람들의 분노와 적개심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미우면 그 사람을 불로 태워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이처럼 모형물이나 상징적인 대상물을 만들어서 공개적으로 불에 태우는 것이 화형식입니다. 불에 태운다는 것은 큰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화형식이 있는 시위는 보통 과격 시위로 분류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형식과 아버지의 주체성이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창조주와 주권자로서 주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주체성이 눈에 보이도록 형상을 입으신 사건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주체성이 이 땅에서 살아 움직이신 몸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체성에 대한 태도로 드러나야 합니다.

주체성(主體性)은 주인 된 인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삼라만상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삼라만상 모든 개체에 대해서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 하나님의 주체성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머리카락 하나로부터 세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솜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생각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때까지도 정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체성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또한 구약성경 곳곳에서 “내가 그니라”는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곧 스스로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스스로 주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스스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흉내를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고 타락이고 부패이며 더러움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존재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만 앞과 뒤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면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길 것이고 또 저렇게 하면 미래에 나쁜 일이 생길 것임을 분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생각하시는 것과 계획하시는 것은 무조건 실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만이 스스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결정한 것이 바로 내일 좋게 나타날지 나쁘게 나타날지를 모릅니다. 생각한 것을 이루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무능력한 존재인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원래 그렇게 살도록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이룰 수 없다면 생각하고 계획해서는 안 됩니다.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생각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고 생각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른다면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주체성을 이 땅에 확장시키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주체성을 완전히 유보시키셨습니다. 하물며 우리같은 인간이 주체성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주체성의 형상이신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뜻하고 계심에 대하여 우리 인간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며 살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화형시키고 있습니다. 중동 사람들이 미국 국기를 불태우고 미국 대통령의 형상을 만들어 화형식을 하듯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죽이면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엄청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의식중에 자행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2~13절을 보면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체성이 우리 눈에 보이도록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당신 안으로 흡수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예수님을 결박하였다고 했습니다. 결박은 분리시켜 격리시킴입니다. 감옥에 가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억 인구 각자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고 언제 빠져야 될지도 다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75억 인구 각자는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감옥에 가두듯이 격리시키고 분리시키고 추방시킨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미치는 영역은 내 머리털과 세포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오는 모든 일에 대하여 생각하시고 계획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결박하였다는 말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격리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워하는 대상을 화형식을 해서 없애버리듯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없애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19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신 예수님을 심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뜻을 심문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판결하고 재판을 해서 잘잘못을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주체성의 형상되심의 의미를 알고 적용시키면 우리의 문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안나스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생각해봅니다.

화형을 시키는 심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심판과 재판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납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 지금 내게 주어진 상태를 부족하게 여기고 미래에 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체성을 난도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주체적으로 이끌고 주관하시며, 백합화 한 송이 피는 것까지 관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판단(判斷)은 칼로 절반을 나누는 것이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더 나은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지금을 잘못되었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안나스가 창조주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심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내 삶의 형편을 주장하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배운 대로 더 낫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기준으로 잡으면 하나님의 주체성을 심판하고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판단의 결과는 지금과 같은 형편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주체성을 화형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따위 식으로 나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체성은 불태워 죽여야겠다.”라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주체성은 내게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20~21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대해 잘못이 있었다면 즉시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와서 죄목도 정하지 못한 채 오히려 예수님께 “무엇을 했느냐”고 말하라는 것은 올바른 재판의 과정과 절차일 수 없었습니다.

한편 22절을 보면 안나스의 아랫사람이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후려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한 태도의 또 한 가지 예가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대제사장을 윗사람으로 모시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윗사람 밑에는 그들을 모시는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랫사람에게도 그들을 모시는 또 다른 아랫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윗사람을 모시는 아랫사람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임금과 왕 외에는 다 아랫사람입니다. 다만 윗사람을 섬김과 동시에 다른 아랫사람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안나스가 윗사람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아랫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이 사람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주체성을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는 사장님이 있고 직원이 있습니다. 직원들은 사장님 앞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유보시키고 물리치면서 사장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주체성을 정지시키고 사장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고 말하고 행동한 대가로 월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회사나 단체의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도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이 개입되지 않은 현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 개입되고 내려다보시는 상황에서 윗사람의 주체성을 우선시하고 중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손으로 후려치며 모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의 주체성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장님의 지시와 바람을 따르면서 나의 주체성을 팔아넘깁니다. 그 대가로 월급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우선적으로 볼 수 없고 사장님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체성과 권세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체성을 사장님의 주체성보다 아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 뺨을 치는 모욕적인 행동과 입장을 일상적으로 보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사장님을 사장님으로 모시지 말라는 것일까요? 늘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윗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한해서 윗사람을 공경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바벨론 왕을 섬겼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던 중 왕이 하나님 대신에 금 신상을 우선시하여 섬기라고 할 때는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만약 다니엘이 하나님이 아닌 왕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주체성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는 사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체성을 유보시켜야 되는 윗사람을 만날 때에 그 윗사람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서 윗사람도 공경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장님 말도 듣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사장님의 주체성을 우선시하는 동안에 그 현장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손으로 후려치는 모욕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손으로 후려친 사건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보이도록 형상을 띤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체성이 이 땅에서 형상을 입고 움직이는 상태를 좋아했습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주체성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믿음이 이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유일한 주체이심을 이론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하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으리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우리는 나의 삶의 현장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나의 삶의 자리가 사라질 것 같은 위협감과 중압감을 느끼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위협감과 중압감 앞에서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되기를 선택하였고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의 편에 서서 혼자 돌출되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르기에 스스로 판단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판단하고 결박하고 모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체성을 알면서도 버리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모르는 사람들 쪽으로 속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을 잃어버릴 것 같은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세상에 내 삶이 있겠는가?”라는 위협감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보다 더 클 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주체성이 지금도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계심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는가? 내가 생각하고 내가 붙잡지 않으면 내 삶은 사라지고 만다.”라는 위협감을 느끼면서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듯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인(否認)은 아는 것에 대한 거절입니다. 알지만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았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주체성을 인정하기를 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참혹하고 혹독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앞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고 살이 찢기고 사지가 못 박혀 죽어야 했지만 하나님의 주체성이 결정하셨음을 믿으셨기에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제사장 안나스처럼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길의 기준을 가지고 지금 나의 형편에 대한 하나님의 주체성을 난도질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고 살이 찢기고 사지가 못 박혀 매달린 예수님보다 더 가혹한 상황에 계신다면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할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보다 나은 상황에 계신다면 감사는 의무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감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화형시키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감사는 우러나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주체적이기를 원하는 죄의 체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서 이끌려져 가는 삶에 대해서 우러나는 감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러나는 감사는 온전한 십자가 생활화의 상태로 진입해 들어갔을 때만 가능합니다. 온전한 십자가 생활화를 향하여 가는 노상에서 이루어지는 감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것이고 억지로 하는 것이고 의무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의 주체성이 하나님의 주체성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길은 지금의 상황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할 수 없게 하는 나의 체질을 보고, 스스로 주체적이 되고자 하는 습관을 보면서 십자가를 향해 주님을 부르며 간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지금은 억지로 하는 이 감사가 기쁨에서 나오는 감사로 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온전히 아버지의 주체성을 받아들이셨고 그 일을 가장 좋아하셨고 가장 즐기셨으며 가장 기뻐하셨던 것 같이 나도 점차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으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예수님과의 친분과 아버지와의 친분이 더욱 두터워져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시위대 속에서 화형식을 거하는 사람들의 무서운 적개심과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땅에 임하고 있는 아버지의 주체성에 대하여 분노의 불길을 내비쳤습니다. 이러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게 해주셔서 오늘 하루의 삶도 아버지의 주체성을 철저히 인정하는 감사의 시간으로만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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