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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S) 생각함이 중범죄인 예수님 나라_태승철 (요한복음 18:28~4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21|조회수110 목록 댓글 2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함이 중범죄인 예수님나라>의 줄거리: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굉장히 이상히 여겨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꼭 그래야만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생각 없는 삶은 불가능하지요. 그렇지만 생각은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공급받는 겁니다.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스스로 생각함이 중범죄인 예수님 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스스로 생각함이 중범죄인 예수님 나라”

스스로 생각함은 예수님 나라로부터 추방될 정도의 중대한 범죄입니다. 생각함에 대해서 나 자신에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 예수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빌라도의 나라나 유대인의 나라를 살고 있는가?”라고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를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를 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만 유념하면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어지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가를 알면 됩니다.

금주령(禁酒令)은 술을 만들거나 팔지 못하게 하는 법령입니다. 미국에서도 발효된 적이 있었고 조선은 개국 이래 극심한 기근이나 가뭄이 들 때마다 금주령을 내려서 백성들의 궁핍함을 염려하는 왕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 굳이 말하자면 술 주(酒) 대신 생각할 사(思)를 써서 금사령(禁思令)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금사령이 내려진 나라이기에 자기 삶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모든 범죄자는 예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됩니다. 금주령은 술을 만들지도 못하고 팔지도 사지도 못하고 마셔서도 안 됩니다. 다만 금사령은 생각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생각하면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생각을 공급받아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생각 없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듯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배급되고 제공되는 것입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기다릴 때 주방으로부터 음식이 나오지 않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라에서 살 때는 한 가지만 유념하면 됩니다. 생각은 삶에 꼭 필요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중범죄인이기에 추방되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 나라에서 살 수 없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금하는 금사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공급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나라 밖으로 추방되어 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구원의 은혜와 감격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빌라도와 예수님이 기싸움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나라의 왕으로서 이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빌라도와 맞닥뜨리고 계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며 고발한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을 보면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라고 오히려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던 빌라도의 질문의 의도와 심정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젊은이를 고발한 것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자칭하였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였지만 총독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라는 젊은이의 행색은 초라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초라한 사람이 유대인의 왕을 자칭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생각에 왕을 자칭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행색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군대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호위무사들이라도 대동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전혀 그러한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에 맥없이 붙잡혀서 결박되어 온 예수님은 왕이라는 요소에 부합하는 요소가 전혀 없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을 풀어보자면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를 섬기는 백성과 군대는 어디에 있느냐? 내가 알기로는 너를 왕으로 섬기는 백성도 없고 군대도 없다. 그런데도 너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느냐? 제정신이라면 어떻게 그런 처지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중요했던 것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로마제국의 안정이었습니다. 제국의 안정에 위협을 주는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려내려는 죄는 바로 이 점에서 성립되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빌라도를 자극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왕을 자칭했다는 죄목으로 모함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반항하려는 의도가 명명백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혐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결백하고 고결한 인격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의 기준에서 아무리 훑어보고 정보를 수집해보아도 예수라는 젊은이에게는 로마제국의 안정을 위협할 실질적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고발한 내용은 빌라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의 관심사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빌라도의 생각을 아시고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고발이 거짓된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왕이라는 개념이 빌라도가 생각하는 왕과는 달랐기에 이에 대해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생각하는 세상적인 왕의 개념은 나라와 백성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왕이란 빌라도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특성을 진리와 연관 지으십니다. 37절에서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빌라도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고 로마제국의 안정에는 어떠한 위협도 줄 수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로 여겨 놓아주고자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과 타협하여 바라바를 놓아주는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이상한 사람 하나쯤 십자가에서 죽인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겠나 싶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넘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이름이 영구히 따라붙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궁금증은 빌라도의 질문 속에 있습니다. 왕이심을 인정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으로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진리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빌라도의 질문은 바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의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하신 일은 다스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증언이셨습니다. 이 맥락에서 진리란 앞서 살펴보았던 “내가 그니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는 정형화된 표현을 사용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주체성의 문제를 18장의 주제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드러내신 명칭이었습니다. “내가 그니라”는 정형화된 표현은 이러한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과 하나이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일한 생각과 행동의 주체이심을 밝히신 이름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여러분의 삶에 대해 공급받은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시시각각 문제와 대상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문제와 대상들에 대해 여러분은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상황과 사건과 일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증언하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왕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한 일은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서 이스라엘 나라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왕으로서 진리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나 한 사람과 내 몸을 중심으로 한 관계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이 관계의 영역은 예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의 영역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과 대상과 일들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주체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내가 죽어도 삶은 얼마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나의 죽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나의 삶에 대해 아버지가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럴 때 내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시는 아버지의 생각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나라의 첫 번째 특징은 생각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금사령이 내려진 나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범죄인 나라입니다. 내가 나의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며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1장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나라 안에서 은혜 위에 은혜의 삶이 중단되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범죄는 바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의 나라 안에 머물 때만 주어지는 것이기에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한 은혜는 중단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많은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소견을 말하고 개진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생각하시지 않는 대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아버지의 생각을 공급받지 않고 스스로 하는 모든 생각은 다 거짓입니다. 아무리 전문가의 소견을 듣고 전문서적을 읽고 친한 친구의 경험을 근거로 삼을지라도 다 거짓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주체성의 죽음입니다. 삶에 대한 의식이 죽고 마음이 죽고 생각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꼭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제 이 생각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듯이 하늘로부터 매일매일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연합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닥치는 모든 상황과 일과 과제에 대해서 하늘에서 만나를 받듯이 하나님의 생각을 공급받고 배급받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일용할 양식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반드시 생각을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예수님 나라의 두 번째 특징은 양심의 가책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양심의 가책이 살아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은 스스로 삶의 문제에 대해 생각함에 대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함은 에덴에서 추방당하고 아버지를 잃는 영적인 사형입니다. 이처럼 중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악에 찌든 장아찌가 되어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중범죄인지를 자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죄악에 대한 불감증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양심의 가책이 생겨나게 됩니다. 삶에 주어진 문제와 과제와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기가 죄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도 스스로 생각하며 살 수 없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존재감과 좋음의 대상의 될 수 없습니다. 의식에서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1등으로 느끼고, 마음에서는 아버지의 좋음을 1등으로 느낍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뉴스를 보는 동안에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다면 뉴스의 앵커가 뭐라고 하든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앵커의 생각을 받아들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양심의 가책이 생겨서 스스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또한 관장하십니다.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것을 믿고 아버지의 생각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대통령 선거에 관한 아버지의 생각을 공급받는 것이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서 들은 지식을 통하여 이 후보는 어떻고 저 후보는 어떻다고 판단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전문가나 상담가의 의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맹신하는 태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생각이 있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공급받음 없이 확인할 수 없는 채로 세상 전문가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내 생각으로 삼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경로로 받아들인 지식을 근거로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무섭고 더러운 죄악입니다. 이에 대한 가책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기로 하였습니다. 40절을 보면 “…바라바는 강도였더라”라고 하였는데 강도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강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게릴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로부터 주석가들은 바라바가 단순한 강도가 아닌 정치범이자 혁명가였으리라 해석합니다. 바라바는 스스로 생각해서 로마에 대한 게릴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게릴라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게릴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나라에서 게릴라는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을 갖고 계시지 않은 일이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생각하며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아담 이후에 영혼이 죄악에 찌든 장아찌와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범죄인지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생각함에 대한 가책이 생긴다는 것은 생명이 주어지고 영혼이 깨어난다는 증거입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여겨지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에 대한 가책이 생긴다면 영혼이 소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기가 끊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그 영혼은 죄악의 장아찌 상태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론적 확신에도 불구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말처럼 잠도 못자면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다면 죽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좀비와도 같습니다. 아직 그 영혼이 새 생명을 받아서 소생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기에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그럴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이건 아니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영혼이 소생한 사람입니다. 생명이 깃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살아있어서 마주하게 되는 삶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중범죄를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중단해야 합니다. 그 모든 문제에 대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공급받아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이 시시각각으로 공급되는 장소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주어지고 아버지의 생각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배급되고 제공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하셔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듯 필요한 모든 사안과 맞닥뜨리는 대상들에 대하여 오직 아버지의 생각만을 공급받고 배급받고 제공받아 예수님 나라 안에서 회복된 에덴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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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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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희소가 | 작성시간 22.04.28 아버지의 생각을 삶에 고급받아 실행함이 진리안에 거함이니 그 모든 것으로 자유하리라 반공자로 부터요
  • 작성자희소가 | 작성시간 22.04.30 주님 생각을 공급 받자 그 생각이 진리요 생명 그분의 죽음이란 혁명가를 대신 하셨으니 나의 죽음도 물론 하늘나라 국민은 오늘도 공급받은 생각이 땅의 나라를 정복하리다 적그리스도 도당들 멸절하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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