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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S) 마리아의 모성애가 믿음은 아니다_태승철 (요한복음 19:23~3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2.28|조회수68 목록 댓글 0

마리아의 모성애가 믿음은 아니다

(요한복음 19:23~30)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리아의 모성애가 믿음은 아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리아의 모성애가 믿음은 아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과 달리신 후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하나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25절 이하를 살펴봅니다. 십자가 밑에 와 있던 여인들 중에는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와 어머니 마리아를 모자지간으로 엮어주십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이 부분에 집중해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깊이 다루지 못한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어떤 유기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참 특이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십자가 밑에 세 명의 여인이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세 명의 여인 이외에 한 명을 더 추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예수님의 생물학적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이 두 복음서에 비해서 어머니 마리아를 추가로 언급한 것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하는 제자로 언급된 인물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이를 더 강조하기 위하여 본문을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모자지간으로 엮어주시는 예수님의 의도 속에 깊은 메시지가 들어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특이한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중이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제자 요한을 양아들로 삼는 일이 예수님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태도는 공생에 초기에 제시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을 생각해봅니다. 2장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는 이제 공생애를 살게 되었으므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적인 일에 사사롭게 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입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 또한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하셨던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 직전에 어머니 마리아를 사적인 아들의 입장에서 챙기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모자관계로 엮어주시는 일이 인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거꾸로 말하자면 인류 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류 구원의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는 중차대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효심이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께서 주관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시는 것도 아버지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주권이 세상에 남아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는 일을 잊으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꼭 제자 요한이 아니더라도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배 아파 낳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중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격인 장로였습니다. 이러한 동생들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왜 굳이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를 모자관계로 엮어주셨던 것일까요? 이상한 점은 또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님이 많이 계십니다. 이 부모님들은 자녀의 빈자리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꼭 수양자녀를 들여서 먼저 간 자녀의 빈 자리를 메워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의 빈자리를 메워주시려고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모자관계로 엮어주셨던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만으로 말하자면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모자지간으로 묶어주신 이 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전체의 마지막 사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마지막 사역이라는 것은 이 사건이 사적인 일이 아닌 공적인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천국에 계시던 아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어오시는 통로로 쓰임을 받은 사람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을 보면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는 이러한 순종으로부터 성령으로 잉태되심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태초 이전부터 영원토록 계시던 예수님은 이 땅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서론을 보면 기록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장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조차도 실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창조한 피조물임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피조물인 한 여인이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로 쓰임 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고 다시금 본래의 영원하신 자리와 신분을 천국에서 온전히 회복하시게 됩니다. 이제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애초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게 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일어난 뒤에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본래 예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사실 때에는 어머니 마리아로서 통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본래 영원토록 계시던 천국의 자리로 가신 후에는 어머니의 입장일 수 없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마리아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있게 하신 피조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을 아들이 아닌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로서 만나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자리를 제자 요한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아들이 죽었어도 여전히 어머니입니다. 죽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막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셨다면 제자 요한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있던 빈자리를 마리아에게서 지워버리고자 하셨습니다. 지워버리기 위해서 제자 요한을 그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천국으로 가시게 됩니다. 천국에 가신 예수님은 마리아를 창조하시던 자리에 회복되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자리를 첫 번째 아들의 자리로 붙잡고 있다면 예수님의 어머니임에도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모성애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물학적 어머니였고 극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아들로 보았다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하나님이셨던 자리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마리아는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죽은 아들이 아닌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로 계시던 빈 자리에 제자 요한을 두심으로써 예수님이 아들이었다는 흔적 자체를 지우십니다.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체적 차원의 어머니라는 자격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영생이 없으며 영생과 이어지는 인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 통로로 쓰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예수님 나라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는 동안 천국에 이름을 등록하여 천국에 태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의 마지막에 이 태어남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사역의 매듭은 바로 태어남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 일에 쓰임 받은 어머니 마리아를 예를 들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로 바뀌어야 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가 될 때 천국에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사건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나라에 태어나게 하시는 어머니 역할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체적 어머니조차도 예수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있던 아기가 자궁을 벗어나서 세상에 태어나듯이 세상에 속해있던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벗어나 예수님의 나라와 천국에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을 모자관계로 엮어주시는 사건을 통해 가르쳐주시며 사역을 마치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의 어머니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오해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된다고 믿고 있으며 본문의 사건을 다르게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는 교회를 상징하며 사랑하는 제자가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듯이 교회는 마리아를 숭배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결코 옳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해 생물학적 관계에서 아들과 어머니로 생각하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전히 자아의식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의 어머니라는 자아의식까지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의 자아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함께 죽어야 하듯이 마리아 또한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마리아에게는 “내가 예수를 낳은 엄마”라는 자아의식 또한 죽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리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로부터 예수의 어머니라는 자아의식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제자 요한을 당신의 자리에 앉히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는 사람들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벗어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가지고 있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조차도 이 세상이 허락한 자아의식을 가질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는 세상이 준 어떠한 자아의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 속해있던 모든 자아의식이 없어지는 사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생물학적으로 낳았다는 어머니의 자아의식까지도 없어져야만 했는데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세상의 자아의식은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자아의식 외에 고집하며 유지해야 될 자아의식은 없습니다. 어떤 자아의식도 예수님에 대한 자아의식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갖기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바로 앞에 제시됩니다.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로마 군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23절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깃으로 나누었다는 표현으로부터 네 명이 한 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이 이루어질 때 죄수의 물건들은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이 나누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겉옷이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옷을 네 벌이나 걸치고 계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겉옷이 복수로 쓰일 때는 몸에 걸친 의류 전반을 의미합니다. 걸친 옷에 더해 두건과 허리띠와 샌들을 포함해서 겉옷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부터 네 명의 군인이 예수님이 걸치셨던 옷과 두건과 허리띠와 샌들을 나누어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속옷은 통으로 된 것이기에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뽑아 한 사람이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전제를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나눠 가진 겉옷은 예수님이 몸에 걸치셨던 것들이었습니다. 앞서 보았던 6장 5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가진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양식으로 먹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강릉에서 살고 있지만 여러분들께서는 부산, 여수, LA, 파리, 도쿄, 베이징 등에서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모양의 삶을 살지만 모두가 다 공통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먹습니다. 이 공통된 참여를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눠 가진 사건이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속옷을 제비뽑아 가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죽음에 공통적으로 참여할 때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관심과 사랑을 인원수대로 나눠 갖는 것이 아닙니다. 10명이 참여하면 10분의 1을 받고, 100명이 참여하면 100분의 1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통으로 짠 속옷을 한 사람이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째로 온전히 갖는 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일에는 공통적으로 참여하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마치 예수님이 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관계하듯이 예수님을 통째로 온전히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께서는 30절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그 모습 그대로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한 자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의 특징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식 속에 붙박이로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왕국에 속한 자이고 예수님께 속한 자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식 속에 붙박이가 되어 유지되고 남아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끝없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죽음을 먹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왕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이 그 사람만을 사랑하고 관심하듯이 예수님을 통째로 인격 안으로 받아들여서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가질 때는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앞서 생물학적 어머니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에 대해 아들이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다면 구원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라는 자아의식에 대해 죽어야 했듯이,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겨두고 유지시켜야 될 세상에 대한 자아의식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자아의식만을 가질 때에 비로소 예수님 왕국에서 태어나는 일은 실제로 성립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왕국에서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골고다 언덕과 두 강도 사이에 십자가가 선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만지거나 가까이하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의식과 예식과 혜택으로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에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시체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해골이라는 뜻의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강도 사이에 위치하였습니다. 이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하다는 십자가형을 받아야 하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강도 사이에 선 십자가는 세상의 중심부에서 가장 먼 곳입니다. 예수님은 궁궐의 왕좌나 용상에 앉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인 두 강도 사이를 왕좌로 삼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문제는 바라봄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중심부를 향해 가고자 합니다. 그럴 때 가장 기피하고 싶고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해골의 언덕과 두 강도 사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가장 기피하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왕좌를 펼쳐놓으셨습니다. 예수님 바라보기는 세상의 중심부를 향해 가려는 방향성을 완전히 꺾는 것이고 세상에 대한 바람을 죽이는 것이며 세상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 바라보기에는 이러한 결심이 들어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중심부를 향하면서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 더 나아지고, 내일보다는 모래가 조금 더 개선되기를 바라고, 모래보다는 글피가 조금 더 향상되는 바람을 갖고 있는 한 십자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 바깥에 만들어져 있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 나라에서 새로운 자아의식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만 그 십자가가 세상 중심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해골의 언덕과 두 강도의 사이에 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상추에 쌈을 싸듯이 이러한 상황과 십자가 예수님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중심부로 나가려는 바람은 꺾이고 세상의 중심부로부터 등을 돌리게 됩니다. 세상 밖을 향하여 십자가를 보는 완전히 새로운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셨듯이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 나라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 태어남을 위해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사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위한 통로로 쓰임 받은 마리아조차도 거꾸로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태어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자아의식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의도를 백분 받아들이게 하시고, 오늘도 십자가를 잊지 않고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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