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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확인사살된 예수님 무덤은 두번째 태초>의 줄거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나왔습니다. 확인사살입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십니다. 이 무덤은 두 번째 태초가 됩니다. 모든 개인의 삶에서 빚어진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본격적인 새 창조 역사의 시작점입니다.
확인사살 된 예수님 무덤은 두 번째 태초
(요한복음 19:31~42)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확인사살 된 예수님 무덤은 두 번째 태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확인사살 된 예수님 무덤은 두 번째 태초”
본문은 두 문단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의 문단에는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고 확인사살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의 문단은 공회원이자 부자였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 두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형의 풍습대로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당장 죽지 않기에 오랜 시간 방치됩니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 시체가 말라서 거죽만 남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한편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면 다리를 꺾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몸은 아래로 쳐지고 늑골은 위로 올라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리에도 못이 박혀있기에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간신히 숨을 연장하고 있던 사람의 다리를 꺾어버리면 더는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해 죽게 된다고 합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이유삼아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달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이 일을 위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계셨습니다. 다른 두 강도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간에 당한 고통이 너무나 극심했기 때문에 이미 죽어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군인들은 확인사살 차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그러자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이 장면을 구약의 말씀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6절을 보면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출애굽기 12장 46절입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하였습니다. 집 밖으로 내지 말라 함은 이방인은 절대로 먹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뼈도 꺾지 말라 함은 유월절 어린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선민들은 출애굽 바로 직전에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유월절 어린양과 예수님을 연관시키며 십자가 사건을 유월절 사건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출애굽을 위해서 먹어야 될 고기이자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7장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할 일은 출애굽과 같은 출세상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출세상을 위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양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 방식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양식으로 먹음으로써 이 세상을 떠나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출세상은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역사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을 먹었듯이 십자가 예수님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어린양을 먹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뼈를 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뼈가 꺾이지 않은 채로 죽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심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듯이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출애굽을 위한 사건이었다면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은 출세상을 위한 사건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12장 46절을 보면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어린양의 고기를 절대로 먹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5절과 19절을 보면 선민들 중에서도 이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민은 하늘에 속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속한 백성이 아닌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날마다 먹지 않습니다. 설령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지 않는다면 하늘에 속한 백성이 아닙니다. 선민으로부터 내쳐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과 마음이 진정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진정한 복지인 천국에 돌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선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엑소도스(ἔξοδος) 즉 탈출을 위해서는 양식과 음료인 예수님의 죽음을 반드시 먹어야만 합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음으로 이루어진 출애굽은 애굽에 대한 죽음입니다. 애굽에서는 더 이상 존재를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먹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 나의 의식과 마음이 철저하게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더는 세상에 대한 나의 의식과 마음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확인사살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은 확인사살이 이루어질 정도로 철저하게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토록 철저해야만 되는 이유는 그 다음 과정이 무덤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을 무덤에 묻을 수는 없습니다. 무덤에 묻히려면 죽어야만 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았음에도 창으로 찌른 것은 죽음을 확실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는 반드시 무덤의 의미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무덤에 묻힐 정도로 확실하게 세상에 대해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37절을 보면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 12장 10절의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민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찌르듯이 아프게 하였으며 그것을 후회하며 간절히 용서를 빌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찌름은 죽음에 대한 확인사살임과 동시에 그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찔러댔는가를 확인하는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대상을 바라볼 때 의식은 세상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의식은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기에 세상에 대한 의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창으로 찌르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좋으심을 망각하고 마음으로 이 세상의 좋음을 추구하고 소망하고 바라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창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은 철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인사살 뒤에 예수님은 무덤에 매장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박당하시고 붙잡히시게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 등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넘겨지십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뒤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십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대체 왜 이러한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굳이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고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그대로 승천하셨을지라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분명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박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과정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에서 별도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공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정해진 과정이 존재하듯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결박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후에 부활하신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의도적 과정이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이 우리가 가지고 써먹어야 될 부분입니다. 이 과정을 그대로 나에게 적용하고 매일매일 삶에서 써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승천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결박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을 수행하신 것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마치 우리가 죽을 때까지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하시듯이 십자가 사건의 과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박당하셔서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써먹어야 되는 은혜의 총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철저해야만 합니다. 그 철저함이 무덤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만약 제가 오늘 죽는다면 묘비에 1958년부터 2022.3.2까지 살았다고 적힐 것입니다. 이처럼 무덤은 죽음의 완결이자 인생의 끝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무덤의 의미가 특이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고지 받은 후에 가나안 땅으로 가서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 틈에 끼어 살다가 자기 소유의 땅을 하나 갖게 됩니다. 창세기 23장 9절을 보면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127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곳을 찾다가 헤브론 땅에 있는 막벨라 동굴을 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죽은 후 그곳에 묻혔습니다. 이후에 아들인 이삭과 아내 리브가도 죽은 후에 그곳에 묻히게 됩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그 아내 레아도 그곳에 묻히게 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복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복지에서 처음으로 자기 소유로 삼았던 땅은 바로 무덤으로 사용할 막벨라 동굴이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매장하기 위해 샀지만 아브라함 자신도 묻혀야 할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동굴을 사며 자기의 죽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지를 살아야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복지인 동시에 이 땅에서도 복지를 살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하루하루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날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살려두셨다는 것은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으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전제로 나는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이 약속되지 않은 날은 죽음의 날입니다.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약속의 땅을 사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해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잘 모르고 그곳에 들어가 이루어질 삶의 내용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허락하신 것은 이 땅에서 이룰 일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모르더라도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나안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자리가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은 곧 죽음입니다. 이 땅에서 복지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제일 먼저 죽음을 품어야만 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나의 첫 번째 자리는 무덤이라는 죽음을 의식할 때에 복지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살기 위해서 죽음을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 모순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가나안 복지로 허락하시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창조적인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은 약속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들이 이루어져야 될 이 땅에 대해서 내가 취해야 될 태도는 죽음입니다. 죽음을 의식하고 마음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죽음을 간직할 때 이 땅에 흡수될 수 없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국외자처럼 이 세상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덤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첫 번째 소유로 삼은 자리는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덤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끝났음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출생일로부터 오늘까지 살았다고 매일같이 허락하시는 하루하루를 내 묘비에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덤을 의식하며 나의 생애를 오늘로 한정할 때에 그 무덤은 두 번째 태초가 시작되는 지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야기하던 나의 주체성의 무덤이 확인되어야만 합니다. 이 무덤으로부터 내가 과거에 이루어 놓았던 혼돈과 공허와 흑암, 내가 주체가 될 때 나타나게 되는 미래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에는 언제나 나의 무덤이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지에 들어가 처음으로 산 땅이 막벨라 동굴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은 또한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선민들이 출애굽을 하였듯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야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갖고 계신 약속들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지에 대한 약속은 그저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에덴에서처럼 그 땅에 들어가서 이루어질 삶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신명기 11장 12절에 “그 땅은 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하셨고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함포고복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진 땅이 복지 가나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단순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들어가 살 때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창조를 해나가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나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이루어질 이 세상에 대해 나의 무덤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 세상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은 두 갈래 역사가 시작되는 태초입니다. 첫 번째 태초에서는 아담이 만들어지기 전이었으므로 두 갈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태초인 무덤은 의식과 마음의 주체성이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무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을 향하여 돌진하는 시작점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주체성이 땅으로 이루어지는 시작점입니다. 무덤이 연상하는 바대로 죽음은 철저해야만 합니다. 매일 하루하루를 오늘까지라고 묘비를 쓰고 시작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무덤자리로부터 두 번째 태초가 시작됩니다. 이 두 번째 태초를 날마다 반복하시면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본문의 뒷부분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공회원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향품은 무려 34kg로써 왕의 장례에서나 쓰일만한 양이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사회에서 최고로 잘 나가고 높은 자리였고 이들은 또한 부자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내며 자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모든 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 무덤은 의식과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돌진해가는 새로운 시작점이며 하나님의 주체성이 땅으로 내려오는 새로운 시작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까워할 것이 너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이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내며 무덤을 만들었던 것은 동시에 자기들의 무덤을 얻은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대비시켜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아까운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당장 죽기에는 아쉬운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까울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것은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가나안 땅에서의 첫 번째 소유지로 삼았던 것처럼, 그 많은 재산과 관직이 있는 땅에 대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은 주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십자가 죽음과 무덤을 통하여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돌진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은 나의 무덤은 두 번째 태초가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시고 나의 삶을 향하여 약속하셨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이루어나가시게 될 것입니다.
확인사살 된 예수님의 무덤은 두 번째 태초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을 나의 죽음과 무덤으로 확인하심으로써 오늘 하루 여러분을 향하여 갖고 계신 하나님의 약속된 뜻들이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가나안 복지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죽음을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먹고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역사가 철저한 죽음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의 무덤이 나의 무덤이 됨으로써 이 땅을 향해 갖고 계신 아버지의 계획과 약속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태초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