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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를 실제로 살기>의 줄거리: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적인 부활을 가리키기 전에 이미 세상에 남아서 여전히 삶을 살아야 할 제자들이 맞닥뜨린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나라를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 안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신 사건이었지요. 한 사람이 예수님 부활의 나라를 실제로 사는 모습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를 실제로 살기
(요한복음 20: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를 실제로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를 실제로 살기”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1절부터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을 가리키기 이전에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살아야 될 제자들이 맞닥뜨린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부활을 말하기 이전에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되는 어떤 특별한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시작된 상황이란 바로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부활의 나라요 예수님의 나라를 사는 모습이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는 본문의 묘사를 통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요 부활의 나라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10절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내용입니다. 다만 본문에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는 물론이고 나중에 무덤가에 왔던 베드로나 요한도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부활과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오순절 성령강림 역사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빈 무덤은 예수님의 무덤이자 곧 나의 무덤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살던 나의 인생의 끝을 말합니다. 어머니에게 잉태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던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이 무덤을 지나가야만 부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요 부활의 나라의 입구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이 세상의 마지막 가장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지막 가장자리인 무덤에 시신이 없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밖으로 나가셨음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무덤이 비어있지 않고 일반 사람들처럼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셨다면 예수님의 생애는 그대로 끝난 것이기에 그 다음 이야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시신이 살아난 것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사로의 부활과 다른 점은 나사로의 부활은 세상 안으로 다시 들어온 사건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밖으로 나가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은 이 세상의 끝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세상 끝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 밖으로 나가셨지만 여전히 아직은 세상 안에 머물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머무신 기간은 이 세상에 예수님의 나라를 건국하신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세상 밖에 계시면서 세상 안에 머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의 실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과 같은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을 살아가는 것이고 동시에 세상 밖에 있으면서 세상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실존 상태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완전히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이 세상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계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들어가 살아야 되는 부활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부활의 나라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그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머무시면서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예수님의 나라를 건국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공생애 때처럼 인간세상에서 공공연하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제한된 숫자의 사람들에게만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당신을 심판하고 못박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군중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어땠을까요? 로마 총독과 군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셨다면 어땠을까요? 이전보다 더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셨던 것처럼 문이 잠겼을 때 벽을 그대로 통과해 들어오시는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도 보이셨다면 아마 유대 사회와 로마 제국은 당장에 뒤집혔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의 생각처럼 시원하게 세상을 뒤엎는 일을 하시지 않았을까 아쉬움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탈출로써 부활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속한 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나타나십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4~8절에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에 따르자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습을 나타내신 사람은 500~600명 정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부름을 받아 세상을 탈출하여 세상 밖으로 나와서 부활의 나라에 속하게 될 사람들은 적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때 기적을 베푸시며 만나셨던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고작 500~600명 정도에게만 부활의 모습을 나타내셨고 부활의 나라요 예수님의 나라로 끌어들이십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부활의 나라요 예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나라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알려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땅에 머무시면서 500~600명 정도에게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 사는 첫 번째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 40일 동안은 부활의 나라가 건국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 두 번째 특징은 천사들의 등장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천사들의 등장은 예수님의 무덤이 세상 안에 있지만 부활이라는 사건은 천국과 연결돼있는 상황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통하여 세상 밖으로 나와 부활하신 상황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는 천국의 앞마당과 같은 영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연합하는 자들은 또한 예수님의 무덤을 나의 무덤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장자리까지 온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세상은 천국의 앞마당이 됩니다.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국의 확장된 영역 속에 부활의 사건이 포함돼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는 자리는 천국의 영역 안입니다. 천국과 연결되어 통하는 자리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천국과의 연결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천국과의 연결이 배제된 믿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천사들의 등장은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모두가 천사와 같은 삶을 살게 됨을 뜻합니다. 부활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천사로 살게 됩니다. 천사는 하나님 보좌가 있는 천국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이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위해 땅에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나라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은 이러한 천사와 같습니다. 천국의 앞마당과 같은 부활의 사건 속에 포함돼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삶의 현장으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가정도 직장도 사회도 보냄 받아 온 현장입니다. 다만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는 부활의 나라에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 머물고 있다가 땅에 내려오는 것처럼 부활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로서 부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보냄을 받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며 직장인도 아니고 사회의 일원도 아닙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무덤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가장자리의 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바깥은 천국의 앞마당과 같은 장소입니다. 우리는 세상 바깥으로부터 세상의 현장으로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있을 때 부활의 나라로부터 보내진 사신으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정에서 이루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은 이미 세상 바깥으로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몸이 가정에 있는 이유는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보냄을 받은 것이지 결코 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천국만이 현실입니다.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닌 현장입니다. 현실(現實)은 내 마음이 가서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현장(現場)은 내 몸을 통해서 일을 이루어내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천국을 현실로 느끼면서 세상을 현장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현실은 천국이고 가정도 직장도 사회도 현장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경제상황이나 건강상태 혹은 가족들의 문제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내야 할 현장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천국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고 특징입니다.
부활의 나라 세 번째 특징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도 알아보지 못하고 앞에 계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는 십자가 예수님과 무덤입니다.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무덤을 통과해야만 부활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입구를 모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이 입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부활의 나라로 들어갈 때 천사로 보냄 받아 살게 됩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 있는 남편은 아내와 대화할 때 아내에게 보내진 천사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라면 남편이 천사임을 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등장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무척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공관복음서를 보면 다른 여인들도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를 부각시켜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한 마리아가 정작 자기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15절을 보면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변화산 사건 때처럼 영화로운 광채의 모습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부활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알고 지내던 예수님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밖으로 나가셨고 동시에 이 세상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부활의 나라요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고 계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의 대표로 마리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많은 고심을 합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었다는 생각이 확고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생긴 사람이 살아서 앞에 났다고 해도 예수님으로 알 수 없었다.”라고 하고 “이른 아침의 무덤은 어두컴컴한 동굴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몰라보았다.”라고도 하며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몰라보았다.”라는 식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동산지기로 착각하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모습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굳이 어렵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설명의 시도가 요한복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까운 거리에서도 몰라본 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무의미합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온 사람은 열두 제자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한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계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못 알아본 사건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세계가 겹쳐있지만 서로의 소속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손을 뻗어 예수님을 붙잡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드러내고자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소름이 끼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자기를 부르시던 음성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깜짝 놀란 마리아는 살아계시던 예수님을 부르던 호칭대로 선생님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리아가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붙들지 말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깜짝 놀란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든 마리아는 착각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시중들고 하였던 과거가 다시 회복되었다는 기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의 나라를 살아야 될 사람들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았던 것처럼 이 땅에 발을 붙인 채로 예수님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 올라가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 하반부에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제자들의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갈 수 있었습니다. 로미오를 사랑하는 줄리엣의 마음은 로미오가 향하는 곳을 향합니다. 로미오가 미국으로 출장을 가면 줄리엣의 마음은 미국을 향하게 됩니다. 로미오가 없는 미국에는 줄리엣의 마음이 향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는 의식이 아버지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고 마음은 아버지의 좋으심을 열망함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식과 마음을 가진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똑같이 아버지의 존재감을 의식에 담고 있고 아버지의 좋으심만을 열망하고 있기에 아버지의 피를 나눈 형제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언제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데 주력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로서 의식과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 있을 때 몸은 천사가 되어서 이 땅에 보냄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장자리의 예수님의 무덤은 우리의 무덤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부활의 나라에 속했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천사로 마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마주할 때도 부모가 아니라 천사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의 나라요 예수님 나라에 속한 부모는 자녀에게 보냄을 받은 천사입니다. 아내와 남편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로 천사입니다. 직장으로 보냄을 받을 때도 천사입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안 하든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그곳에서 여러분은 천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앞마당인 부활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들입니다.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곳으로 보내지는 천사들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이루신 부활의 사건을 통해 시작되는 부활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임을 알았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오직 아버지의 존재감과 아버지의 좋으심만으로 의식과 마음이 가득 찬 예수님의 형제로 천국이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현실로부터 이 세상 현장으로 보냄 받은 천사들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