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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활은 세상변화 아닌 사람발탁 사건>의 줄거리:
예수님의 부활 위에 세워진 부활의 나라는 몸이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모든 예수님의 제자가 사는 나라입니다. 위로는 천국이 직통으로 연결되는 이 부활의 나라로부터 세상으로 보내지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이지요. 부활의 나라는 천국이 이 땅으로 연장된 곳입니다. 부활의 나라가 이 땅에 건립된 이유는 변화가 아니라 발탁입니다.
부활은 세상 변화 아닌 사람 발탁 사건
(요한복음 20:19~31)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부활은 세상 변화 아닌 사람 발탁 사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부활은 세상 변화 아닌 사람 발탁 사건”
부활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발탁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되어 건립된 부활의 나라는 세상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속해야 할 나라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의 나라에서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이끌어가고 변화시키고 개선함을 목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나의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과거가 아니며, 기독교 종교의 교리도 아니며, 신화적인 전설도 아니며, 종말적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표인 것만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 부활에 기초 된 나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부활의 나라이며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부활의 나라 안으로 발탁되어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부활의 나라로 발탁되어 들어간 사람들은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냄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다른 두 개의 나라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의 이동은 보냄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있기 때문에 보냄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나라가 완전히 다른 나라임을 본문을 통해 확실히 보여주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두려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노크 하시며 “내가 죽은 뒤에 부활했으니 어서 문을 열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벽과 닫힌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이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비로소 주님을 확인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크 하시고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대신에 왜 벽을 통과하셔서 들어가셨던 것일까요? 부활하신 모습을 보이시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부활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병행하고 있으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전 인류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의 눈에 보이고 있지만 거하시는 차원은 인간 세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차이를 비유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와 닮은 사건이 사도행전 8장에 빌립 집사님이 공간을 초월하여 전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그 외에 이러한 기록은 더는 없습니다.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했던 사도 바울도 배와 도보로 그 머나먼 곳들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속해야 될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세상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3차원의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부활의 나라로 발탁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나라로 들어가 사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나라 안에 들어가서 살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입니다. 닫힌 문과 벽을 통과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은 유대인의 인사말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서 이 세상의 삶이 별 탈 없이 유지되며 마음에서 바라는 크고 작은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강의 의미는 이와 달랐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되어 세워진 나라 안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평강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갈지어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온전한 평강이 없습니다. 오직 세상 밖으로 나가신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된 나라에만 온전한 평강은 존재합니다. 십자가 죽음을 먹고 세상의 끝인 무덤을 지나서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자리에 이른 사람들만이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부활의 나라 입구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세상의 끝인 무덤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사건이 부활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빠져나간 부활의 자리에서만 평강은 주어집니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저 세상에 가서 쉬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아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어떠한 상황이 주어져도 평강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식으로 삶이 이루어질지라도 평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참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게임업계의 1인자이자 재산규모 1위인 분이 미국에서 54세에 자살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살의 이유는 우울증이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공대를 나와서 대한민국 게임업계를 이끌며 재산규모 1위였던 분이 대체 왜 자살을 해야 했던 것일까요? 세상 안에는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업계의 1인자였다는 것은 그만큼 일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보통 순조로워서는 이런 경지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부활의 나라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 특징은 참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이제 너희가 머물고 있는 세상 나라를 떠나서 나의 십자가 사건과 무덤을 너희의 것으로 삼고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평강을 말씀하신 뒤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그대로 있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께서는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갖고 계실까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또 본문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 1장을 보면 성령을 통해 접하게 된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16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은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있는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시는 대신에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이셨던 것일까요? 제자들이 알고 있던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인격과 지금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다는 인격의 연속성을 확인시켜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못 믿는 사람들은 혹시 천사가 예수님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심을 말끔히 제거하시고 확신 위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시고자 공생애 때에 만나서 알고 있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예수님이 바로 당신이라는 인격의 연속성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로부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손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지시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믿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십자가가 묶여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자국과 창 자국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주이심을 확정지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통과해야만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고 발탁될 수 있고 평강은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또 다시 평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평강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갔을 때 갖게 되는 평강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평강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부활의 나라로부터 세상의 나라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세상의 나라와 부활의 나라는 병행하고 있으나 다른 차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나라 특징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서는 절대로 주어질 수 없는 평강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천국에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으셨던 것처럼, 평강의 나라로부터 세상의 나라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평강은 부활의 나라 바깥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세상 끝으로 가셨고 부활하심으로 세상 바깥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과정이 늘 의식 속에 기억되고 유지되어야 부활의 나라에 머물고 평강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나라로부터 세상의 나라로 보내는 제자들에게도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가정에 보내져서 자녀들을 마주하든지 혹은 부모님을 마주하든지, 직장으로 보내지든지, 사회로 보내지든지 우리는 삶의 현장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럴 때 부활의 나라에 감싸인 채로 보내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나라 안에만 평강이 있기에 부활의 나라로 감싸여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보내짐으로써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 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부활의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나를 만남으로써 부활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나라를 만나게 하시려는 이유가 바로 “부활은 세상 변화 아닌 사람 발탁 사건”이라는 제목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만나는 사람을 부활의 나라로 발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의도에 따라 우리는 평강의 나라인 부활의 나라에 감싸인 채로 세상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살면서도 평강이 있는 부활의 나라를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나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발탁하여 부활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발탁은 영어로 스카우트(scout)입니다. 스카우트는 흔히 스포츠 경기에서 많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A라는 팀에 있는 철수라는 선수를 B팀으로 스카우트하고자 합니다. 스카우터는 이 선수가 빠지는 A팀의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 선수를 A팀에서 빼내와 B팀에 넣는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나라 천사들로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부활이라는 팀으로 발탁하는 스카우터이지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나 개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삶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나 자신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관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부활의 나라로 들어갔는지를 확인합니다. 또 부활의 나라에 들어갔다면 똑같은 의도에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보냄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부활의 나라로 발탁하고자 합니다. 혹은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심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결국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를 추구함은 변화된 세상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고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세상이 변화될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을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목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사람을 빼내오는 것이고 나 또한 세상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붙잡을 때는 이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과 병립하여 진행되고 있는 부활의 나라 안으로 발탁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부활의 나라로 발탁시키는 일은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의 끝자리인 무덤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만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사람을 이 세상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도록 발탁하는 것입니다. 스카우터가 A팀에서 철수라는 선수를 발탁해서 B팀으로 데리고 올 때, 철수가 A팀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고민하거나 관심하지 않습니다. 빼내서 B팀으로 데리고 올 뿐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의도적으로 잡아끄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으로 끝이 났습니다.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에서 무슨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수도 없으며,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을 발탁하고자 의지를 발동시킬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을 때는 부활의 나라에 감싸여서 보냄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와 주님의 무덤을 기억함으로써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있지 않고 부활의 나라에 감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을 만나고 일들을 만날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빠져나온 자로서 부활의 나라에 감싸여서 평강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성령을 언급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는 모습은 마치 인공호흡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이지만 여전히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살아가야만 합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인공호흡을 시켜주십니다. 그 인공호흡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맹물이 되어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호흡이 되시고 활동이 되셨습니다.
호흡과 활동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성령님이 예수님의 호흡과 활동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나라에 들어갈 때는 성령님께서 똑같이 호흡과 활동이 되어주십니다. 배우자를 마주할 때 죽은 자가 되면 예수님께서는 인공호흡으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죽은 나의 주체성 대신에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배우자에게 말하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부모나 자녀에 대해서도 성령의 인공호흡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달라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 사람이 부활의 나라로 발탁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기억할 때에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의 나라로 발탁됩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삶의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부활의 나라로 발탁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죽은 나에게 예수님의 인공호흡이신 성령이 주어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은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영이 아닙니다. 배우자를 마주하고 자녀를 마주하고 직장에 나가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삶 자체가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 성령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 사는 사람은 부활의 나라로 발탁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발탁된 사람이 누리는 모든 특혜와 은혜의 근거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들이 제자입니다. 사람들 또한 나와 똑같이 발탁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한 사람들은 증언에 의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발탁됨이 날마다 반복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시작과 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십자가의 죽음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확실할 때 부활도 확실해집니다.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는 자에게만 인공호흡은 필요합니다. 부활의 나라에 속했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 아직도 스스로 활동하고자 한다면 성령은 임하실 수 없습니다. 생각도 활동이며 감정도 활동이고 의지도 활동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저한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이 세상에 대해 철저하게 죽어야만 합니다. 철저하게 죽은 자들만 예수님과 함께 세상 끝자리인 무덤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혀야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철저하게 속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갈 힘이 없는 죽은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인공호흡인 성령을 보내주심이 강력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교리가 아닌 사실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연속적 과정을 진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 철저해질 수 있도록 간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주님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이 나의 죽음과 묻힘이 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간구가 필요한 이유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격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주문을 외우는 것과 같은 기계적 행동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간구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과정이며 하늘을 향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과정입니다. 이 그리움이야말로 인간이 천사보다도 탁월한 점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직면하고 있기에 그리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가려져 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세상 것들 뿐이기에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십자가 사건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죽음은 철저해야 합니다. 오늘도 간구함을 통해 어제보다 더 철저한 죽음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또 내일도 오늘보다 더 철저한 죽음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서 호흡과 활동 전체가 성령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놀라운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죽음이 정말 철저해지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나라에 속해서 평강을 철저히 누리게 하시고 세상을 향한 죽음도 철저해서 성령을 주님의 인공호흡으로 받음도 철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