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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S) 양들의 굶주림은 누구 책임인가?_태승철 (요한복음 21:15~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3.14|조회수66 목록 댓글 0

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양들의 굶주림은 누구 책임인가?>의 줄거리:

예수님의 양들이 굶주림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기독교 종교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양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기독교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양들이 숨겨진 채로 지금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 굶주림은 누구 책임일까요? 예수님의 양이니까 예수님 책임인가요? 목사들 책임일까요 아니면 양들 자신의 책임일까요?

 

양들의 굶주림은 누구 책임인가?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양들의 굶주림은 누구 책임인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양들의 굶주림은 누구 책임인가?”

지난 금요일에 살펴본 본문을 다른 주제를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양들이 굶주리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이 질문은 꼭 책임 소재를 밝혀서 잘못을 추궁하자는 의도로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의 책임인가를 염두에 두고 양들이 꼴을 먹는 상황을 함께 생각해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나는 예수님의 양으로서 배부른가? 혹은 배불러 본적은 있는가?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충분히 먹고 있는가? 내가 놓여 있는 곳이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한때 북한에서는 흰 쌀밥과 고깃국을 모토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먹이라고 주시는 꼴이란 무엇일까요? 양들이 꼴을 배불리 먹는다고 할 때 꼴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무엇을 꼴로 먹어야 하는지, 나는 지금 그 꼴을 충분히 배부르게 먹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양이 되셔서 배부르십니까? 만약 예수님의 양이지만 도대체 무엇에 배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고 배부름을 느낄 수도 없다면 누구의 책임일까요?

 

본문에는 예수님을 사랑함과 예수님을 따름과 예수님의 양을 치는 일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에 관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또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엇을 확인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확인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양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양들을 맡길 것이다. 너는 나의 양들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게 되는 상황을 본문을 통해서 그려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을 치지만 사랑하는 대상은 양이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장 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사랑하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양들을 사랑하는 대상은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양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양을 맡기십니다.

이것은 언뜻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이 어떤 직원을 골라 중요한 일을 맡기고자 합니다. 그러면 일을 사랑하고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자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장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전문성보다 인맥을 앞세워서 일을 처리할 때 나타나는 부정부패가 조성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는 능력이 없으면서 사장님에게 아부를 떨고 가깝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이 일을 맡는다면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부정부패가 조성되는 패턴을 당신의 양을 치는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시고자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양을 치는 사람은 양에 대해 잘 알고 양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양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사람에게 양을 먹이고 치게 하십니다. 이것을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 대입해보겠습니다. 만약 성도가 굶주리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목사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이 목자로 발탁되는 조건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양을 배부르게 먹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 종교 안에서 평생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는데도 배부름이 없다면 계속해서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이 생깁니다. 이것저것이 잘 되었으면 좋겠고, 어떤 사람이 내게 안 좋게 대하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부른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뭐가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도 않고, 나한테 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배부른 사람은 비난과 공격에 대해 무뎌집니다. 예민하다면 배고프고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굶주리는 이유는 저를 포함한 목사님들 중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은 양들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양이 몇 마리인가, 양이 얼마나 목자를 잘 따르는가, 양들이 얼마나 예배당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내가 어떻게 많은 양들을 모아서 큰 목회를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를 따르는 양들은 굶주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양들을 칠 수 있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같이 놓고 계십니다. 이것을 함께 생각할 때에 왜 예수님 사랑하기가 예수님의 양을 치는 조건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하기는 예수님 따르기입니다. 예수님 따르기는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해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나라에 머물면서 하늘과 땅을 향하여 꼴을 먹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부활의 나라는 유일한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따르기에 사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과 마음에 욕구가 있습니다. 의식은 존재감의 대상을 찾고 마음은 좋음의 대상을 찾습니다. 세상을 빠져나갔다는 것은 더는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지 못하면 부활의 나라에 이를 수 없고, 부활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도 만날 수 없습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면 예수님은 목자의 입장입니다. 베드로를 양으로 여기셔서 이끌어 들이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시켜주신 예수님께서는 19절과 22절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나라에서 승천하심으로 베드로의 의식과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부활의 나라에서 베드로에게 지시를 해주심으로써 세상에서 살게 해주십니다.

부활의 나라가 푸른 초장인 이유는 두 가지 꼴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꼴로 먹습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땅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를 꼴로 먹습니다.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로 배부르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지시만을 따라서 살게 됨으로써 배부르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할 수 없다면 내가 양이 아니거나 옳은 목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만드셨고, 승천하심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꼴을 먹고 아래로는 땅을 향하여 하나님의 지시의 꼴을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공생애 때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4장 32~34절의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에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해서 본문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양을 친다는 것이 무엇이며 양은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양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양들을 먹이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조건으로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은 곧 예수님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양을 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나라 안에 계시면서 세상나라에 속해있던 제자들을 만나셨던 것처럼, 베드로는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야만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는 예수님의 양들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의 나라에 머물지 못한다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로 사람들을 이끌어 들일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부활에 나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양들을 먹이고 양들을 치는 일에 절대 불가결한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낄만한 대상이 있음을 포기하고, 세상에서 마음을 채울만한 좋음에 대해 체념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와 무덤의 입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부활에 이르도록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렇게 부활의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양을 푸른 초장으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목회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절대로 양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진짜 목사는 목회 현장도 떠납니다. 예수님을 따라 목회 현장이 없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진정한 푸른 초장이고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 머물러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예수님의 양들을 그 나라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가본 적도 없고 모르면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로 양들을 끌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에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분 아래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 세상에 마음이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예수님의 일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고 예수님 대신 예수님의 일을 사랑하는 한 세상을 벗어날 수 없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나라에 이른 사람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실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시를 따를 수 있을 뿐이지 세상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일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는 십자가를 외벽으로 삼아서 세상을 바깥에 두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외벽으로 삼는다는 것은 곧 철저한 차단입니다. 몸이 놓여 있는 세상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의식과 마음의 시야는 차단되어야만 합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내용이 나옵니다.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베드로에게 요한은 가장 가까운 동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한조차도 의식과 마음으로 쳐다보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옆에 있는 대상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감수하고 고통에 신음하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외벽입니다. 그 십자가 너머에 세상이 있습니다. 면벽수행 하듯이 세상을 보지 않고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십자가를 봐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에 대해 나의 의식과 마음은 십자가를 봄으로써 면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봄이 유지되면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양을 치는 자의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입니다. 부활의 나라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앞에 어떤 분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저는 이 분이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이때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 입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 앞에 있는 분이 돈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분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 문제로 헤매고 있을 때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드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집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됩니다.”라는 말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양을 치는 목자로 위임받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돈이나 건강 문제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나라가 더 우선적인 현실임을 자각하도록 일깨워드리는 것입니다.

설령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3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의식과 마음을 다 빼앗길 것입니다. 그럴 때도 제가 위임받은 목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이 당신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건보다 3차 대전은 우선될 수 없으며, 당신이 놓여있는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부활의 나라와 천국이 진짜 현실임을 일깨워드리는 것뿐입니다. 목자들이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양들로 선택받은 사람들조차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에 의식과 마음이 함께 종속되어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지금의 상황이 진짜 현실이 아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될 진짜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천국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머물러야 될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와 부활의 나라에 있어야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부활의 나라에 머물지 않는 한 세상에 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세상에 있는 사건과 사람의 존재감을 받아들여서 그것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들 중에서 좋음을 발견하려고 할 때 의식과 마음은 세상에 종속됩니다. 의식과 마음에 세상을 담는 것 자체가 양들이 꼴을 먹는 대신에 독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돈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면 세상의 독초를 먹고 있는 것이며 이미 먹은 것입니다. 지금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면 세상의 독초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과 마음이 문제가 있는 세상을 빠져나와서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해줘야 합니다.

예수님께 위임받은 목자가 양들을 부활의 나라에 이르게 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목자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부활의 나라 안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 안에 있는 베드로를 만나서 사랑을 확인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나라에 있으면서 세상 나라에 있는 양들을 부활의 나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꼴이 되어주시고 아래로 땅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세상을 향하신 뜻이 지시로 내려와 꼴이 됩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반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예수님의 양으로 꼴을 먹어본 경험과 꼴을 먹고 있는 상황을 전해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직 하나님 아버지의 좋음으로 충만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한 좋음으로 구하기만 해도 자유와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자유가 없고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종속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으로 세상을 붙잡고 바라고 있는 중에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지옥입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지옥을 살수도 있습니다.

전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지시라는 꼴을 먹고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에서 아버지만을 구할 때는 아직 아버지가 충만히 주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온전한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열망은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나라에 들어와서 세상을 십자가 외벽 바깥으로 두고 단절할 때에 나의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방향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구하게 됩니다. 아버지를 구함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목표를 향한 열망입니다. 부활의 나라에서 아버지를 구할 때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믿음 안에서 이미 아버지를 가진 것으로 여기게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주체성이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나의 주체성이 살아나게 됩니다. 부활한 주체성을 활발하게 활성화시켜 아버지를 구할 때 진짜 배부름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향하여 배부를 때에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립니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지시가 들려옵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에게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제시하고 이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다만 양에게 꼴을 먹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주어진 꼴을 먹는 것은 양의 역할입니다. 아무리 십자가라는 부활의 나라 입구를 제시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담을 쌓고 구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온 예수님의 양은 하나님 아버지를 꼴로 구하게 됩니다. 부활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고 세상일과 연관 지어서 아버지를 찾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아버지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철저하게 나의 자아의식 속으로 들어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과 단절하는 철벽이자 옹벽이고 외벽입니다.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이 십자가를 볼 때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신경 쓰는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신경 쓰지 않고 십자가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닌 십자가입니다. 건강 문제가 생겨도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고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서 건강이나 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들이 꼴을 먹는 상황이며 이렇게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목자의 역할입니다.

양을 먹이기 위해서는 목자 자신이 먼저 부활의 나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세상의 일을 쳐다보지 말고 예수님의 승천하신 방향만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구해서 배불러 봐야 합니다. 목자가 아버지로 배불러 본적이 없다면 양들을 먹일 수도 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체성을 가지고 할 일은 승천한 예수님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아버지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있을 때 돈 문제의 해결을 구한다면 꼴을 먹는 것이 아니라 독초를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에게 문제가 있을 때도 가족 문제의 해결을 구한다면 꼴을 먹는 것이 아니라 독초를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아버지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의식과 마음이 돈 문제, 가족 문제가 있는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양들을 이끄는 사람이 이미 세상을 빠져나간 목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굶주린다면 목자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양이기도 하지만 목자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을 만날 때에는 부활의 나라에 있는 사람으로서 목자의 입장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위탁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위탁인 것입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푸른 초장이자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 입구를 제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입구로 들어와서 꼴을 먹는다면 예수님의 양입니다. 이처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맡겨진 위탁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종교에 속한 사람도 있고 세상에 속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만 예수님의 양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이들과 마주할 때 나는 부활의 나라에 머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배부름을 느낀 사람으로서 세상에 남아 굶주리고 있는 예수님의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인 부활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는 제이, 제삼의 베드로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 사랑은 예수 따름이고 예수 따라 부활의 나라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 나라에서 굶주리고 있는 예수님의 양들에 대한 목자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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