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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녹취문: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하자_태승철 (요한복음 3:16~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10.16|조회수53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하자>의 줄거리: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잠시 두셨을 뿐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권 아래 두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내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죄고, 그래서 가지려 함이 악이고, 그 결과가 멸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내 마음으로 받아도 되는 것은 오직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하자

(요한복음 3:16~1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게 ‘두신’ 것과 ‘주신’ 것을 구분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것과 가지라고 주신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신 것을 가지라고 주신 것으로 착각해도 안 되고, 가지라고 주신 것을 갖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멸망이 전제되어 있음을 기억할 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는 75억 인구는 이미 죄 아래에 있습니다. 죄를 출발점으로 해서 악을 행하고 결과적으로 멸망이 정해진 상황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에게 죄와 악과 멸망은 숙명적입니다. 이것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는 인간의 죄와 악과 멸망이 하나도 새삼스러울 일이 아닙니다. 따져볼 필요도 없이 죄와 악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러므로 멸망 역시 숙명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문제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과 멸망은 기정사실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문제시하시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새삼스럽게 심판을 강조하시기 위함이 아닌 구원을 제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다 아십니다. 내가 평생 저질러온 모든 범죄를 다 아시고 지금도 마음속에 있는 악하고 더럽고 부패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란 죄의 목록을 작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어떻게 구원과 연관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나의 죄의 목록은 완전히 무의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와 악으로 인한 멸망이 숙명적인 나의 인격이 통째로 죽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악하고 부패한 인격에 의해서 나오게 되는 모든 죄악과 멸망 또한 완전히 무의미해지게 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죄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 어떤 죄로부터 출발해서 어떤 악을 자행했으며 계명과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는 따질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죄와 악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존재하지만 계명과 율법을 어기는 범죄의 횟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와 악이 멸망으로 치닫는 충분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범죄의 횟수가 적든 많든 멸망으로 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죄로 인해서 얼마나 더러워지고 부패했느냐, 죄로부터 출발해서 얼마나 악을 자행하면서 살았느냐, 악이 넘쳐나서 얼마나 큰 범죄로 나타났느냐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죄와 악으로 인해 멸망이 결정된 나의 인격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통째로 죽음으로써 더 이상 죄를 따져 물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지만 동시에 다소 꺼림칙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범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 아동학대범, 강간살인범, 가정파괴범같이 온갖 범죄를 저지른 악한 자들이 있으면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피해자는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그 모든 범죄는 사라지는 것인가 의문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악을 행하던 인격이 죽었기에 그 범죄도 없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몸이 살아있기에 몸으로 행한 범죄에 대해서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과 멸망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어떠한 흉악한 범죄자라도 진심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인격 내부의 죄악을 자각하고 그러한 자신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자임을 깨달을 수 있는 자만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무슨 흉악한 죄를 저질렀든지 구원을 받게 됩니다. 피해자의 피해가 극심하고 그 가족들이 분통이 터지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죄를 지은 인격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기에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8절을 보면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믿지 않은 순간에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멸망으로 결정된 심판이 계속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인간이 처한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멸망하게 되는 이유가 죄와 악과 범죄 때문이 아니라 죄와 악과 멸망으로 향하는 숙명적인 흐름으로부터 독생자를 붙잡지 않아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자기 죄와 악과 범죄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멸망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까이에서 보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물의 두께가 어마어마합니다. 굉음을 일으키는 물의 양과 물살에서 느껴지는 힘이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잔잔히 흐르던 강물은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급류가 되어갑니다. 예를 들어 폭포 100m쯤 되는 급류 지점에서 사람이 빠졌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구조 헬기가 주변을 돌고 있었고 금세 구조를 시작하였습니다. 20m 정도 흘러온 지점에서 밧줄을 내렸으나 이 사람이 밧줄을 잡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급류에 휩쓸리고 폭포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급류에 떠내려가 폭포 때문에 죽은 것일까요? 밧줄을 붙잡지 않아 죽은 것일까요? 밧줄을 내리지 않았다면 폭포 때문에 죽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밧줄이 내려온 뒤에는 밧줄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구원과 멸망의 문제가 이와 닮았습니다. 나는 죄와 악에 휩쓸려서 멸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밧줄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자기 죄악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에 놓고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죄와 악과 멸망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와 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는 것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작은 복음이라고도 별명이 붙여진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셨다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바로 독생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이 주셨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에덴동산에는 모든 과실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아담과 하와의 인격에 대해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아담과 하와의 몸에 대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좋음과 싫음을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고자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서 좋음이 느껴져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실제로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좋음과 싫음의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 안에 있는 것들을 갖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도 살기 위해서는 판단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기에 좋음과 싫음의 판단을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다보니 하나님만을 찾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악과라는 장치를 통해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만을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가지는 것으로 기쁨의 에덴동산에서 삶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게 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죄와 악과 멸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인격을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것을 주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 몸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 세상 법으로 나의 소유에 속한 것들, 내 소유권 밖에 있는 것 중에 좋아해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은 본래 모두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것입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보고 듣고 만지게 됩니다. 애초에 몸부터 인격체인 나에게 하나님이 두신 것이지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양새를 주관하셔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장육부를 운행하고 계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죽을 때를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이 몸조차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에 대해 두신 것이지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만나는 가족들도 내 인격에 대해 두신 것이지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도 두신 것이지 주시려고 만드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것들을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계속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관하지 않아도 내 인격에 대해 두신 것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권적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스스로 판단하게 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곧바로 가질 수 없게 된 것이 타락이고 죄악입니다. 이제 세상 안에서만 가져야 하는 인간들, 세상에 있는 것들만을 가지려는 체질이 굳어진 인간들 앞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18절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마다”라고 하신 것은 개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들과 소유권이 있는 대상들과 소유권 바깥에 있는 대상들까지 다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입니다. 주신 것이 아니기에 가지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고 내가 가져도 되는 유일한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뿐입니다.

주신 것과 두신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달라져야만 합니다. 주신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서 밀착해도 되고,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도 되고, 마음이 그 안으로 들어가도 됩니다. 그런데 두신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마음이 밀착해서는 안 되고,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마음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두신 것은 마음 바깥에 있도록 상황을 유지시켜 가야만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몸도 나의 인격에 두신 것이기에 내 마음이 끌어안거나 밀착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있어서 만나게 되는 가족들도 내 마음이 밀착하거나 마음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가족 또한 하나님이 두신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이 관할해 가실 대상이기에 내 마음이 접촉해서는 안 되고 마음 바깥에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만 마음을 접촉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을 만드셨기에 우리의 마음이 접촉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늘을 쳐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만을 마음에 담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를 갖는 방식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독생자를 가지게 하십니다. 독생자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가지려고 했던 죄와 악이 끝나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를 가지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독생자를 가지면 죄와 악이 끝나게 됩니다.

죄란 내게 주신 것이 아닌 두신 것을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이란 두신 것들을 실제로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격체인 나에게 두신 몸부터 시작하여 몸으로 관계하는 대상들을 좋아하여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본래 마음에 담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신 것이 아닌 두신 것을 마음에 담고 가지려 하는 것이 바로 죄악입니다.

그리고 멸망은 하나님께서 두신 것을 좋아하는 죄에서 출발한다면 가지려는 악을 이어가며 살다가 생이 끝나게 되면 멸망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곳으로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멸망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마음의 공백을 더 이상 채울 수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공허함의 상태는 육신이 살아서 이글거리는 불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 말씀을 꼭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자면 이 세상은 내가 좋아해서도 안 되고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과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사탄에 속아서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거짓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짓된 희망 때문에 아직 멸망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은 천국에 그 존재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은 마음에 채울 존재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좋아해도 안 되고 가져서도 안 되는 이 세상 것들을 좋아하고 가지려 하다가 죽으면 멸망은 찾아옵니다. 마음 채움을 위한 자격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세상 전체가 나눠 가질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분이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져도 되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뿐입니다. 그리고 그 독생자를 가지는 방식은 바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의 구리뱀을 든 사건에 비유하셨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말씀에 이어서 제시된 것이 바로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질 것으로 주신 유일한 대상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을 기억함을 통해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면서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마음에 담을 대상이 아닙니다. 심지어 나의 몸조차도 마음으로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내 몸에 두신 재산이나 물건들이나 그 어떤 것도 마음에서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갖고 싶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두신 것을 좋아하는 것이 죄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항상 그 공백을 채울 것을 찾고자 합니다. 공백 채움을 위해 좋아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대신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러한 죄악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마음을 채울 대상이 없는 곳으로 빠지게 되고 천국에서 존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독생자뿐입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늘로 가게 됩니다. 이렇게 독생자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격체인 나에게 두신 것들을 더 이상 좋다고 여기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주신 것만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셨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질 수 있으면 됩니다. 가진다는 것은 늘 지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예수님을 가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좋게 느낍니다. 또한 내게 두신 것들을 가지려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에서 떠나고 악에서 떠난 모습입니다.

그럴 때 그동안 죄와 악으로 점철되었던 나의 인생 또한 변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설령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가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그 죄 된 인격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죄 된 인격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었음을 날마다 확인하였다는 것입니다. 두신 것들을 좋아하던 인격이 죽었기에 더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전부 하나님이 두신 것들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과 관련하여 이러한 대상들을 두신 이유는 주권적으로 이끄실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과거에 무슨 죄를 저질렀어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없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독생자를 가짐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느끼고 가지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를 자랑한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진 것이 십자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십자가 하나로 사도 바울에게서 부족함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도록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셨던 것입니다. 또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독생자 예수님 한 분을 가질 때에 삶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삶에 부족함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독생자뿐입니다. 그 독생자를 갖는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공생애의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만 두신 것들을 좋아하던 죄와 그것들을 가지려 하던 악은 근절되고 멸망으로 향하는 흐름은 중단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간단하고 좋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만 마음으로 가질 수 있으면 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마음 바깥에 두신 대로 내버려 두면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가지려고 해야 봐야 골치만 아플 뿐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만 가지면 됩니다. 하나만 가진 자가 이기는 자이고, 하나만 가진 자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 몸조차도 갖지 아니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니 이처럼 단출하고 가볍고 가뿐할 수가 없습니다. 죄와 악이 근절되고 멸망의 흐름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 땅에서는 영생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두신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시고 주신 것에 매진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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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수연 | 작성시간 21.10.17 할레루야!
    정말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내아버지가 되심을 감사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내게 두신 모든것은 아버지 앞에 내려 놓고 내안에
    십자가예수님을 통해 주신 은혜와 진리만
    가득 채우고 진리에 취해 날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 저의 지정의 언행을 움직이며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게됨을 믿고 또 애쓰겠습니다
    오늘 주신 구원의 확실한 성경적인 해석으로 저는 더욱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며 말씀주신 목사님께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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