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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뜻>의 줄거리:
믿음은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연쇄 사건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되었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믿음이 불어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국한된 믿음이 아니라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믿음으로 불어납니다. 그 결과 24시간 모든 영역을 믿음 하나만을 밑천 삼아 삶을 살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뜻
(로마서 1:1~1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뜻>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뜻”
본문 1~4절은 로마서의 서두입니다. 그리고 16~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였고, 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할 때 산다는 표현은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산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제세타이(ζήσεται)는 “살다, 살아가다”라는 뜻을 가진 자오(ζάω) 동사의 미래형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주로 영생을 언급할 때에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사도 바울의 서신 속에서는 “생활을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을 직역해 보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2~4절에서 언급된 대로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되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 복음을 믿어서 얻게 되는 구원의 결과는 단지 의롭게 칭함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의롭게 여기신다면 그 증거가 24시간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는 곧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를 비롯한 모든 삶의 현장에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을 밑천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을 믿어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을 아버지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너는 의롭게 되었다.”라고 칭해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게 되면 믿음으로 살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모습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는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는 습관으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어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복음 안에 들어있는 능력에 의해서 경험과 지식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반복되는 익숙함이나 원칙과 규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믿은 사람은 이러한 일들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따라서 판에 박힌 매너리즘에 의해서 살지 않습니다. 또한 살다보면 기분이 삶에 영향을 미칠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분에 의해 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굴의 의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반대로 끊임없이 의지가 꺾여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사람은 불굴의 의지로 살지도 않고 의지가 꺾여서 끌려가듯 살지도 않습니다. 의욕으로 살지도 않고 기가 죽고 풀이 죽어서 살지도 않습니다. 윗사람 말을 들으며 살지도 않고 아랫사람을 신경 쓰며 살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쇼핑할 때도 구매욕이 아니라 믿음으로 합니다.
이렇게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건을 믿었을 뿐인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처럼 점점 더 믿음이 불어나게 됩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불어나서 삶 전반에 걸쳐 오직 믿음으로 사는 시간과 장소로 빈틈없이 덮여버립니다. 우리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도 경험도 지식도 기분도 의지도 의욕도 원칙도 규칙도 다 사라지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간단한 말씀에는 이와 같은 혁명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 삶의 차원을 생각할 때 혁명도 이런 혁명이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삶 전반을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부활의 자리로 이끕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에 도달하게 되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삶 전반에 걸친 믿음으로 확장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동일시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에 자리에 이른 상태에서는 긍정적인 일들이 나타납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르면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야말로 마구 불어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동일시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라는 고백만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고백으로 시작했다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든지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현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삶의 현장에서 나의 주체성인 바람과 욕구가 완전히 죽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됩니다. 고백으로 믿음이 시작되었다면 반드시 간구해야 됨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기계의 스위치를 켜고 끄듯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내게 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체이지만 죄적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간구가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세상을 빠져나와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더욱 불어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는 세상 바깥으로 나간 자리입니다. 다만 여전히 나의 의식은 존재감의 대상을 찾고 나의 마음은 좋음의 대상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세상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어떠한 대상도 존재감과 좋음의 대상으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재감의 대상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믿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있음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마음 또한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세상 바깥으로 나오고 보니 더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대상들을 있는 것으로 여기며 채움거리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유일한 채움 거리로 간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십자가의 믿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하고, 천국을 유일한 현실로 느끼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간구함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24시간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믿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이 현장에서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간구를 유지하는 동안에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뭉치를 손에 쥐고 있다면 그 돈에서 분명한 현실감과 만족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현실감과 만족감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도 적용됩니다. 굳이 돈을 예로 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마음으로 믿음 안에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 아버지와 상대하고 관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의가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만 관계할 수 있도록 가려져 계십니다. 로또의 당첨을 확인하는 일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려진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부활의 자리에 이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마치 로또의 당첨을 확인하듯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받아들이고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믿음의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사보다 나은 점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좋으심에 노출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믿음을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좋으심이 가려진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보고자하고 좋아하고 간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바라는 간구를 통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확장되어서 천국이 현실로 믿어지고 아버지가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고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심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부활의 자리에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의 주권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이나 백합화 한 송이가 피고 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듯이 나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심을 믿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이 세상 모든 만물과 내가 겪는 사사건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눈을 비벼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부활의 자리에 도달해서 세상 밖으로 나간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볼 때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나의 주권이 살아 움직일 수밖에 없고, 이 세상에 빈틈없이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보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동일시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자리에 이를 때에만 하나님의 주권이 빈틈없이 내려오고 있음을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 믿음은 하늘과 땅을 향하여 뻗어가며 불어나고 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자리에 이를 때에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의식에서 아버지가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인 믿음, 마음에서 아버지가 유일한 좋음의 대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을 돌아보면 내가 빠져나간 세상에 아버지의 주권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믿음에 도달하게 되면 세상에 대한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믿음 안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내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내 느낌이 아버지의 느낌입니다. 내 의지가 아버지의 의지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우리를 이러한 상황과 차원으로 견인해갑니다.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의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좋아하시는 일은 복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가진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하늘과 땅을 향하여 끌고 갑니다. 믿음이 아니면 단 한순간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삶 전반을 도배하고 융단폭격하듯이 뒤덮어버립니다.
십자가 믿음이 올바르면 그 믿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심이 나타납니다. 믿음이 아니면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하는 상태를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믿음의 삶은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따라가고 손에 만져지는 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삶입니다. 즉 믿음이 우리의 감각이 되어 주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스스로를 의롭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의롭게 생각하신다면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의로우심이 나를 십자가 믿음으로부터 하늘과 땅을 향한 믿음으로 불어나게 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 의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늘과 땅을 향하여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구하며, 믿음 안에서 천국이 현실이 되고, 믿음 안에서 아버지의 주권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보며, 믿음 안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성령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복음에 대해 부끄럽다는 부정적인 어법을 사용하였을까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고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좋은 표현으로 복음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에서 200년 이상 평화가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로마제국의 평화는 군사력에 의해 억압되던 평화였습니다. 구겨진 옷을 다리미로 다리면 평평해지듯이 힘으로 눌러버린 평화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시기는 AD. 57년경으로 추측됩니다. 50~53년경에 데살로니가전후서가 쓰였고, 55년경에 고린도전후서가 쓰였고, 56년경에 갈라디아서가 쓰였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57~58년경에 3차 전도여행 때에 고린도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당시에 로마는 힘으로 유럽과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에 걸친 광활한 대제국을 형성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힘이 곧 법이고 정의로 통하는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믿으라는 소리는 지독하게 모순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마치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시험에서 떨어져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승진이 우상인 직장에서 만년 대리로 일하는 사람에게 “해고당하는 것이야말로 복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자 구원이라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하늘에 대한 믿음과 땅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복음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 로마제국 판도 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살기를 요청합니다. 힘으로 유지되는 로마제국 내에서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313년에 로마제국은 뒤집혀서 그리스도인들의 나라가 됩니다.
앞으로 우리는 로마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이어지는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의인답게 24시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늘과 땅을 향하여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재테크처럼 불려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함께 나누는 동안에 하늘과 땅을 향하여 믿음이 아니면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움직이지 않는 온전한 의인들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주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수 있기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오직 하늘과 땅을 향하여 믿음이 아니면 단 1초도 살아있지 않는 의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