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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_태승철 (로마서 7:7~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4.16|조회수5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할 죄의 속임수>의 줄거리:

십자가는 죽음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본 자만이 그 죽음을 죽이기 위해서 십자가를 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행동하며 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이 죽었음을 보는 일은 절대 쉽지 않고, 거꾸로 이렇게 행동하며 사는데 왜 내가 죽은 것인 가고 의문을 품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이것이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입니다.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

(로마서 7:7~13)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

본문 말씀은 읽어도 오리무중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율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은 곧 행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과 행위를 언급하는 이유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을 알차게 채우기 위함입니다. 율법과 행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이 튼실하게 채워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복음으로 삶을 사는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자 율법과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본문에는 특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죽음이 언급됩니다. 또 10절을 보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사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도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죽음이 언급됩니다. 13절에서도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라고 사망이 언급되고,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라고 죽음이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죽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있게 된 자기의 죽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자기의 죽음이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고 믿게 하려는 대전제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의 죽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율법 때문에 발견됩니다. 이 “나의 죽음”이 있어야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는 “나의 죽음”을 죽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망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죽음을 죽이기에 십자가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내가 죽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요지입니다. 본문의 표현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러나 복잡한 표현의 이면에는 명확한 주제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는 죽음을 죽이는 사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면 자기의 죽음을 죽이는 구원의 역사 또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나의 어떤 부분이 죽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나의 죽음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죽음의 상태가 무엇인지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상태를 살아있다고 여기며 착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살아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실제 죽음의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걷어내고 죽음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제목에서 “십자가 보려면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의 속임수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먼저 10절과 11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11절을 보면 죽음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옵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계명은 율법과 같은 의미합니다. 그런데 율법 때문에 내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구절을 풀어보자면 “나는 본래 죽은 사람인데 율법을 통하여 나의 의식이 죽음에 이르러있음을 알게 되었다.”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을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죽였다고 했지만 사도 바울의 몸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의식이 나의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민들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복과 영생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0절에 기록되었듯이 사도 바울이 율법과 계명을 통해 이르게 된 결과는 복과 영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멸망하여 지옥행이 합당한 사형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간파해야 할 죄의 속임수가 있음이 제시됩니다. 다시 11절을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내게 율법과 계명이 주어진 것을 기회로 삼아 나를 속였고, 나는 그 속임수에 빠진 결과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죄의 속임수에 빠져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십자가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결국 십자가를 보게 되었기 때문에 죄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는 나를 속였고 나는 죄에게 속았습니다. 그 결과로 나의 죽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죽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의 간악함을 간파하시고 내가 나의 죽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쓰신 방법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서 나를 속이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율법으로 인해 십자가를 보게 된다는 내막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어려운 표현들 속에서 복음과 연관된 절묘한 영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신나기도 합니다.

11절에서 언급된 죄는 다 아시는 대로 빗나가는 것입니다. 빗나감이란 의식과 마음이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 대신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결혼이라도 한 듯이 달라붙어 버렸습니다. 이제 의식과 마음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있음을 느끼고자 하고 좋음을 열망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결혼을 해버린 듯이 붙어버린 빗나감의 죄의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행위와 연관됩니다. 죄는 행위에 대해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위를 “내 마음이 간절히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내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속입니다. 오늘도 세상의 75억 인구는 속아서 행위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몸을 움직이며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속인 것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서 행동 규칙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을 행위라고 속입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 선민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행동 규칙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 율법과 계명에도 속임수를 썼습니다. 선민들로 하여금 율법과 계명을 세상의 행동 규칙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 규칙이라는 것도 결국은 내가 몸을 움직이면서 따라야 하는 일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고 속였습니다.

이러한 죄의 속임수의 핵심은 행위가 무엇이냐에 대한 착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행위는 스스로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달라붙어서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가운데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죄는 육체를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서 소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다시 말해 행위를 통해서 궁극적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나를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밝혀진 진짜 행위는 이와는 다릅니다. 참 행위는 내가 나의 육체를 움직여서 일어나는 동작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 나의 육체를 움직이셔서 일어나는 동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선 말씀들을 통해 이것을 복음 안에서 밝혀주셨습니다. 6장 13절에서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몸이 불의의 무기가 되는 상태는 죄에게 속아서 내가 나의 육체를 무기로 삼아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 움직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이 의의 무기가 되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이 나의 육체를 무기로 삼으시고 이 땅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과 생각을 위하여 움직여 가시는 것입니다. 몸이 의의 무기가 된 상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8절에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하나만 가지고도 행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했습니다.

행위는 육체가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내가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는 이 행위를 내가 하는 일로써 속였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의식과 마음이 빗나가서 육체에 달라붙는 것이 죄의 상태입니다. 이 죄의 상태는 교활하게 우리를 속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행위에 대한 착각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래 행위란 내가 나의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몸을 무기 삼아 움직이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서 나타나야 할 참 행위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를 속였고 참 행위는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해볼 수 있습니다. 죄는 왜 우리를 속이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죄를 의인화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서 이해해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란 사탄을 의미합니다. 죄는 “네가 너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행위이다. 행위를 잘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끌어내서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죄는 무슨 이득을 위하여 행위에 관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요? 사탄, 즉 죄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육체에 달라붙은 죄의 상태가 사실은 죽은 것임을 숨기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 행위 하기를 요구합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 육체와 달라붙어서 세상에 있는 피조물에게 향하므로 하나님과 끊어져 있고 이 하나님과의 끊어짐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죄는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숨깁니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 몸을 움직일 것을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마치 좀비와도 같습니다. 중남미의 부두교에서는 약물과 주술로 사람이 죽은 후에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좀비라는 말의 시작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과 끊어져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육체를 움직여서 행위 할 것을 요구합니다. 스스로 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우리는 평생 육체를 움직이는 행위를 하며 살아갑니다. 움직이고 있기에 실은 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세상뿐만 아니라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 왔습니다. 복음이 살아나지 못하고 종교에 묻혀버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자임을 알아야 십자가에서 그 죽음을 죽이는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게 속아서 몸이 움직이는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니 십자가에서 죽을 생각 또한 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벌고자 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 지켜야 될 행동 규칙들이 있고 그 규칙들을 지키기 위하여 몸을 움직입니다. 다만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돈을 향하게 되었기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으니 죽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로마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과 끊어진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아는 것과 그것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임을 체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몸을 움직이는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를 진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상응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리적으로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끊어져서 죽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30년간 일궈온 기업이 부도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사장님에게 기업은 인생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지만 사장님에게 있어서 기업은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과 단절이 되자 마음에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나의 마음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단절되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육체를 죽이는 자살은 마음이 죽은 뒤에 찾아오는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의 단절이 일어나게 되면 도저히 육체를 끌고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의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대상과의 단절이 마음의 죽음 즉 인격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일어나게 되면 더 이상 육체를 끌고 삶을 지탱해야 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마음을 짓누르니 살아갈 수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은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가사상태에 빠진 것을 죽음으로 오해합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대상이었습니다. 이제 줄리엣과 단절되었다고 생각하자 로미오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육체를 살아있는 채로 내버려둘 수 없었고 살아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줄리엣을 따라 자살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였고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가 죽은 것을 보게 됩니다. 줄리엣 또한 로미오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됩니다.

 

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는 대전제일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죄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죄의 상태는 우리의 마음이 로미오가 줄리엣을 잃었을 때나 사장님이 30년 동안 일궈온 기업을 잃었을 때와 같은 상태 혹은 나인 성 과부가 외아들을 잃었을 때와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함이 죄이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에서 유일한 있음이시고 우리의 마음에서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잃고서는 더 이상 육체를 끌고 살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전제이자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기록된 성경은 미래의 십자가를 향해 있으며, 십자가 사건 이후에 기록된 성경은 일어난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나의 죽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 더 이상 육체를 보존하며 살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는 더 이상 육체를 한순간이라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줄리엣을 잃은 로미오의 마음, 30년 일궈온 기업이 부도난 사장님의 마음, 외아들을 잃은 나인 성 과부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고 하나님을 잃게 된 나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죽음이란 가장 소중한 것으로부터의 분리됨입니다. 이것이 진짜 죽음임을 알지 못하면 십자가 복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나의 죽음”과 관련된 표현들을 반복해서 사용하며 우리에게 십자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죽음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율법이 그 기능을 합니다. 죄는 율법과 계명이 주어지기 전에도 존재했습니다. 죄는 세상의 행동 규칙을 따라 몸을 움직이도록 사람을 속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선민들에게 율법과 계명이 주어졌고 죄는 이것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네가 너의 몸을 움직여서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있다.”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전에는 몸을 움직여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혀 지킬 수 없다는 결과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근본 취지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계명조차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나타나는 증거이자 열매입니다. 따라서 죄의 상태에서는 결코 율법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죄의 상태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죄의 상태는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육체와 달라붙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취지의 율법과 계명이 지켜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께 몰입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는 상태인 죄는 나를 속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감추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은 몸을 움직여서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율법과 계명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과 계명의 근본 취지를 지킬 수 없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고 그 대답으로 하나님과의 단절로써 “나의 죽음”을 깨닫게 됩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 느꼈던 그 마음을 하나님에 대해서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져서 죽은 자”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는 더 이상 육체를 움직여야 한다는 속임수에 빠져 살 수 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는 우리를 속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과 계명이라는 행동규칙에 의해서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가 죽음임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계명이 준 깨달음은 정반대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완전히 하나님과 끊어졌고 이것을 극복할 길이 없음을 죽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져서 살 바에는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과 끊어진 죽음을 죽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줄리엣을 잃은 로미오의 상태가 죽음이고, 30년 일궈온 기업이 부도난 사장님의 상태가 죽음이며, 외아들을 잃은 나인 성 과부의 마음이 죽음이었듯이 율법과 계명으로 행위 하려 함으로써 하나님을 잃은 상태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다고 여기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과 좋음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행위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몸을 움직이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몸을 움직여 가시지 않으면 나는 한순간도 몸을 유지하며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죄의 상태인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자 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 규칙인 율법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시기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죄에 속은 내가 몸을 움직이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도저히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 규칙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과 어긋나면 사장님이 준 행동 규칙도 지키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행동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어긋나고 빗나가고 끊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에 속아서 살고 싶지 않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행위를 통하여 무엇인가 세상 것을 얻을 수 있고 삶을 채워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나의 몸은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죽는 편이 낫다.”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끊어진 죽음을 죽이는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죽이면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의 자리에서는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내 몸은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의의 무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자기의 죽음을 보고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사건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로마서를 통해 율법을 허락하신 아버지의 의도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그 의도를 따라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을 줄리엣 없는 세상에서 로미오가 한순간도 살 수 없었던 그 마음으로 나의 죽음을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나의 죽음을 끝없이 죽여 나가는 일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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